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63화 (40/114)

제63화

몰려드는 사람들 (5)

다그닥, 다그닥.

스르륵.

고운 손이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얄팍한 장난질이로군요.”

서문요란이 서류에서 눈을 떼며 피식 웃었다.

“반 시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 읽으셨습니까?”

호위 동평이 놀라 물었다.

“더 볼 것도 없어요. 정상 계약인척하며 뒤에서 단가를 조작하고 물품을 빼돌려 폭리를 취하는, 고전적인 수법이죠.”

“감히 유운 공자에게 그런 짓을…!”

“서문의 이름이 얽혔는데. 가만둘 수는 없지요.”

서문요란이 서늘하게 웃으며 붓을 놀렸다.

서문과 척진 자, 영원히 상계에 발붙이지 못하리라!

조그마한 사기도 엄하게 벌하는데, 이번은 대놓고 입찰 사기를 치려고 한 사건이었다.

“감사부에서 조사한 결과, 이런 짓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겉보기로만 그럴싸한 집을 지어서 비싸게 팔아먹고, 집이 무너지면 나 몰라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서류상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겠지요?”

“책임을 물으려 주인을 찾아가 보면, 망한 도박쟁이이거나 거렁뱅이였다고 합니다.”

“피해자가 많았겠군요.”

“수십 명이 넘는다 합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먼저 맹의 법(法)을 어긴 죄부터 받도록 하세요.”

서문요란이 차갑게 말하며 무언가를 적었다.

납품 비리, 명의 도용, 계약 사기….

맹의 법은 악인에게 가혹하니.

그가 쌓은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질 터였다.

“훌륭하신 판단입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는 맹의 백성이지만 상도를 걷는 사람이기도 하니.”

“그 말씀은….”

“상인 명부에서 제적하고, 련의 률(律)에 따라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세요.”

“……!”

련에서 배제됨은 어떠한 상거래 행위도 불가능하니, 상인 인생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손해액은 최대로 계산하여 모두 배상해야 했으니.

탁흠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광산 노역!

죽어라 몸으로 갚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십 년, 어쩌면 평생 빛을 보지 못하리라.

“명을 받듭니다!”

동평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쉽군요.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가주님?”

“사업계획서의 양이 방대하고, 치밀하니.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서류는 아니에요.”

“설마 배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동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마도요.”

서문요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유운을 해할 동기가 있으며, 그걸 실행할 능력도 있는 자.

흑산조가 외에 누가 있겠는가?

“아쉽게도 증거가 없네요.”

추측만으로 공격하기에 흑산조가는 너무나 거대했다.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서문요란은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탁흠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다리 건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뒤에 농간이 숨어있어서 그렇지, 계획 자체는 상당히 훌륭해요. 정상적인 방법으로 추진하도록 하세요. 특히 백성들의 피해가 없도록이요.”

“존명!”

동평이 감탄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동평의 업무 보고가 이어졌다.

“공자께서 작은 상인들에게도 서촌 영업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이미 운연상단이 있는데, 괜찮을는지요?”

“아니, 잘하신 일이에요. 상계의 경험이 없으신데도 잘 처리하셨군요.”

“공자와 저희의 이익이 줄어드는데도 말씀이십니까?”

“작은 이익에 집착해서는 큰 상인이 되지 못하는 법이지요.”

서문요란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서촌 부흥은 큰 사업이에요. 그런 일일수록 혼자 할 수 없어요. 아니 혼자 해서는 안 돼요.”

“무슨 뜻이온지요?”

“작은 상인들이 서촌에 기대어 벌어 먹고살게 된다면,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른 세력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팔은 안으로 굽으니. 아무래도 유운 공자의 편이 되겠지요.”

“맞아요. 그렇게 내 사람이 되는 거지요.”

“같이 커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저 그런 상인이 아니라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가문의 차기 주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힘이고 권력이지요. 그게 푼돈보다 훨씬 더 큰 이득이랍니다.”

“어쩌면 공자의 후계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군요.”

“그래요. 물론 공자께서 거기까지 계산하신 것은 아니시겠지만요.”

유운의 맑은 미소를 떠올리니, 서문요란의 입매 역시 풀어졌다.

스르륵.

이번에는 밀린 가문의 업무를 볼 차례.

서문요란이 빠르게 내용을 훑고, 중요한 부분을 손으로 지적했다.

“천염상단의 장방선생이 바뀌었군요?”

“마대평이라는 자입니다. 대륙 상방에서 잔뼈가 굵은 자이온데, 둘째 공자가 상당한 돈을 주고 불러왔다고 합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군요. 중요한 인사이거늘 이리 보고가 늦다니….”

“고작 장방선생 아닙니까? 단순히 장부나 적고 주판이나 두들기는 자입니다.”

“사람의 역할은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뀌는 법이지요.”

“……!”

“둘째 공자가 직접 뽑아서 자리에 앉힌 자입니다. 실질적인 힘은 어지간한 상단주 못지않을 터.”

“……!”

“동 호위께서 그자라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그 말씀은?”

“주인인 이 공자에게 무언가 보여주어야겠다. 그리 생각하지 않을까요?”

“……!”

“대륙 상방에 있을 때부터 거래처를 지독하게 쥐어 짜내기로 유명했던 자에요. 그런 자가 소금을 한 손에 쥐었으니….”

“설마 종가에 공급하는 소금의 단가에까지 손을 댈까요?”

“어쩌면 그 이상을 각오해야 할지도 몰라요. 종가에 자신의 위세를 보일 좋은 기회이니까요.”

“허어. 그 인사에 그런 속셈이 숨어있었군요.”

동평의 얼굴에 감탄과 걱정이 동시에 엿보였다.

“본가가 제일 종가라고 안심해서는 안 돼요. 까딱 잘못하면 잡아먹힐 거예요.”

“곧 계약을 갱신할 시기가 오는데. 본가에서 누구를 내보낼까요?”

“재화전, 제이당의 부당주가 나가도록 조치하세요.”

“새로 임명하신 고 부당주 말씀이십니까? 큰일을 맡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할 터인데.”

“마대평이 자주 쓰는 수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무엇입니까?”

“방대한 양의 장부를 가져와서 상대를 당황하게 하고, 복잡한 계산으로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고는 하지요.”

“아. 그래서 고 당주를….”

“맞아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본가에서 가장 산술(算術)에 밝고, 영민하니. 마대평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에요.”

“과연 소가주님이십니다!”

인사에 숨겨진 속뜻을 읽고, 미리 대처방안까지 준비하다니.

서문요란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럼 청해오가와의 계약에도 고 당주를 보낼까요?”

청해오가는 남해를 중심으로 미곡, 광물 등의 운송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규모 운송은 그들의 협조가 필수였다.

“동 호위, 그거 아세요? 청해오가의 사람들은 보통 둘 중 하나랍니다.”

“어떤 부류입니까?”

“하나는 깊은 바닷물처럼 차가운 성정을 가진 부류. 다른 하나는 대해의 파도처럼 거친 성정을 가진 부류지요.”

“그렇다면 저희와의 거래에 나온다는 오 장로는….”

“명백히 후자예요.”

“아…!”

“고 당주처럼 셈이 밝은 자와는 오히려 맞지 않으니.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적합하지요.”

“술과 사람이라. 본가에 그런 분은 딱 한 분 계시지요.”

동평이 붉은 코를 가진 노인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그래서 제가 외당주님께 부탁을 드릴까 해요.”

“어릴 때부터 소가주님을 예뻐하셨으니. 어지간하면 승낙하실 겁니다.”

“그래요. 그 일은 그리 처리하고….”

서문요란은 더욱 업무 속도를 높였다.

파라락.

바람개비처럼 서류가 빠르게 넘어갔다.

‘아직 방년의 나이이시거늘. 석년의 가주보다 더욱 뛰어나시구나!’

서류의 첫 장만 보고도 일의 경중과 허실을 파악해내니.

지켜보는 내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길음현의 약재 매출이 줄어들었군요.”

“지부장의 말에 따르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합니다. 다른 상단이 끼어들어서….”

“돈이 몰리는데,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나요.”

서문요란은 냉소하면서 손가락으로 숫자를 찍었다.

“매출 부진은 경쟁 탓이 아니에요. 약재 수량 자체가 줄었고, 품질까지 떨어졌어요. 생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이죠.”

“그 말씀은 설마….”

“자르세요.”

“……!”

“본가에서는 충분히 지원했어요. 그런데도 결과가 이렇다? 노력이 부족했다는 소리지요. 아니면 애초에 무능했거나요.”

“지부장이 길음의 호족 출신이라,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지요.”

서문요란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서문의 돈이 칼보다 무섭다는 걸 보여줄 기회니까요.”

거침없이 말하며 다음 업무로 넘어갔다.

‘역시 소가주뿐이로구나. 본가를 이끌 분은 우리 소가주밖에 없어!’

동평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대의 수를 읽는 능력부터 냉정한 결단력까지.

서문이라는 거인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얽히고설킨 업무들을 해결하던 때였다.

거침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이자들은?”

“아. 군소 세가의 주인들 말씀이시군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평은 슬쩍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

“어떻게든 유운 공자와 연을 만들어보고자, 여식을 데려왔나 봅니다. 돈이 넘치는 상단도 아니고, 뛰어난 무인도 아니니 이런 방법을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요.”

서문요란이 반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운이라는 어장 안에 물고기가 많을수록, 값이 올라가는 법이니까.

“공자의 연치(年齒)가 어떻게 되었죠?”

“올해로 열일곱이라고 들었습니다.”

“열일곱이라. 알면서도 믿기지 않는군요.”

“저 역시 그러합니다. 누군들 해원검을 그리 어리게 보겠습니까?”

말에는 깊이가 있고, 행동은 무거우며 눈동자에는 깊은 지혜가 담겨있으니.

누구도 유운을 제 나이로 보지 않았다.

“보통 그 나이에 혼담이 오가나요?”

“학사 가문은 비교적 일찍 혼인을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백리세가는 문인이 아니라 무인이죠.”

“맞습니다. 보통 무가는 혼인을 늦게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체 활동이 가장 왕성할 때, 수련의 효과가 큰 법이니까요.”

“아직 이른 나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서문요란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물론 군소 세가의 가주들도 당장 혼담을 넣을 생각은 아닐 겁니다. 미리 눈도장을 찍어놓으려는 생각으로….”

“공자께서는 큰일을 하실 분이고, 서문이 투자한 분입니다. 저조차 방해할까 두려워 서촌을 떠났거늘….”

서문요란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크흠. 그건 소가주님이 하신 행동 때문에….’

동평은 새빨간 얼굴로 도망치던 소가주를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충신이라면 마땅히 주군의 허물을 감싸야 하는 법.

동평이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바꾸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씀입니다. 유운 공자 역시 엄연한 무인. 한창 수련에 집중해야 할 시기가 아닙니까?”

“제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서문요란이 확 밝아진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을 갈무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공자께는 실로 중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적인 용무로 수련을 방해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동평이 입을 열 때마다 서문요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가 지부장에게 각별히 관리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공자님께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동 호위다운 합리적인 일 처리군요.”

서문요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도 못 미더운지, 고개를 들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당분간 누구도 안 돼요. 어떤 ‘방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알겠죠?”

“물론입니다.”

동평은 빙그레 웃었다.

* * *

그날 저녁, 마차에서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소가주님의 전언이라니. 나에게도 볕들 날이 오는구나!”

서가진미의 주인 겸 서촌 지부장, 왕포삼은 동평의 서신을 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가 아닌가?

왕포삼은 서신을 꼼꼼히 읽고 결론을 내렸다.

“백리세가의 향후 권력 구도에까지 영향을 미칠 큰일이로구나!”

훌륭한 가신이라면, 숨은 뜻까지 헤아려야 하는 법.

유운 공자가 가주로 향하는 길을 깔끔하게 정리하라는 뜻이리라.

연정(戀情) 따위의 티끌이 묻는 일이 없도록.

유운 공자를 하얗게, 더욱 하얗게!

왕포삼은 자신의 해석을 확신했다.

“기필코, 이 한 몸 다 바쳐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만서각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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