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몰려드는 사람들 (6)
“유운 공자께서 오셨다는구만!”
“오 일을 기다려서 마침내 뵙는구나!”
“허어, 이미 한 차례 인파가 휩쓸고 지나갔는데도 이리 많다니.”
“그러게 말일세. 마치 꽃을 찾는 벌떼와 같구만.”
유운을 찾는 이들은 강물처럼 끝이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만서각을 비울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오 일에 한 번, 서가진미에서 사람들을 보기로 했다.
“공자님을 찾아오셨습니까? 여기로 오십시오. 방문자의 신분과 방문 목적을 적으시면 됩니다.”
왕포삼이 나서서 사람들을 이끌었다.
“저 자로구만. 이곳의 주인장이.”
“어허. 이 사람이. 주인장이 뭔가, 주인장이. 외총관 어르신이라고 부르게.”
“고작 주루의 주인이거늘, 그리 높일 필요가 있는가?”
“공자님의 부탁을 받아 일을 봐주시는 분일세. 방문객을 종류별로 구분하고, 면담 순서까지 정한다는구만.
“허어. 알고 보니 실세로구만. 잘 보여야겠어.”
“벼락출세한 사람치고는 괜찮은 사람일세. 뒷돈을 먹지도 않고, 순서도 비교적 공평하게 배분한다네.”
“작은 권력이라도 휘두르고 보는 것이 사람이거늘. 다행이야.”
왕포삼에 대한 평은 전반적으로 좋았다.
그랬기에 더욱 이상했다.
‘기분 탓인가? 우리 차례가 계속 미뤄지는 것만 같은데.’
산양소가의 가주는 초조한 눈으로 딸의 손을 꼭 잡았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곱게 단장했거늘.
귀인에게 보여줄 기회가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 불편해. 그냥 집에 가면 안 돼요? 다리 아프고 힘들어요.”
딸은 머리 장식이 성가신지 자꾸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조금만 참거라.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한 줄 아느냐?”
“뭐가 아쉬워서요? 산양에서는 우리도 잘나가는 가문인데.”
“백리세가의 종가와 연을 쌓기도 하늘의 별 따기이다. 하물며 백리의 직계 혈손이시니.”
노인은 뿔난 망아지 같은 딸을 달랬다.
“어떻게든 공자 눈에만 들면, 이후로는 네 마음대로 하여라.”
“정말요? 그럼 남해로 놀러 가도 돼요? 거기 바다가 옥처럼 푸르다던데.”
“이를 말이냐.”
“새로 들어온 금가락지가 그렇게 이쁘던데….”
“공자와 연만 이어진다면 다 들어주마.”
노인은 간신히 딸을 달랜 후, 왕포삼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보다 늦게 온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것을 보았네.”
노인의 항의에 왕포삼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세상에 사정없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일이….”
“방금 들어간 자는 낙향 문사로서 노모와 처자식 넷을 먹여 살려야 하는 절박한 처지라….”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 사연이 이어졌다.
“크흠.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이야. 허면 다음번에는….”
“청수향에서 제일 큰 상단의 주인께서 긴하게 사업 이야기를 하신다고 하니, 이것 또한 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왕포삼이 방명록을 가리키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 방문자 : 산양소가, 가주 소이현.
- 방문 목적 : 친교.
여러 목숨이 걸린 사연이나, 큰 사업 이야기에 비하기에는 하찮은 목적이었다.
“끄응. 알겠네. 신경 좀 써주게.”
“이를 말씀이십니까.”
왕포삼이 공손히 대답하니, 소이현의 얼굴이 풀어졌다.
하지만 왕포삼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공자님의 앞길을 막게 둘 수는 없습니다!’
잘나가던 학자나 뛰어난 무인이 애정 문제로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거기에 소가주의 명까지 있었으니.
‘절대로 공자님을 흔들게 두지 않으리라!’
왕포삼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꽃향기 나는 일행일수록 면담 시간도 늦고, 짧았다.
때로는 갖은 핑계를 대서 단체 입장을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했나 보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오?”
“우리 딸이 얼마나 귀하게 컸는데 이리 문전박대하다니.”
“우리 가주님을 무시하는 거요!”
점점 더 심해지는 항의에 왕포삼이 식은땀을 흘릴 무렵이었다.
휘이잉…!
문이 열리며 푸른 옷을 입은 사내가 들어섰다.
잘 벼린 검과 같은 기세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고독랑 설영!”
“백리세가의 최연소 무사부!”
“유운 공자의 유일한 호위가 아니신가!”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설영이 검자루를 들어 올리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만서각의 행사에 부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불찰은 공자가 아닌 저희의 잘못이니, 부디 너른 마음으로 헤아려주십시오.”
“과연 고독랑다운 기백이로고.”
“고고하고 고결한 백리의 검이로구나!”
마침 문 뒤로 찬란한 햇빛이 빛나니, 협객전의 한 장면과 같았다.
감탄한 이들은 사내들뿐만이 아니었다.
“아아…! 사내가 저리 아름다울 수 있을 줄이야.”
“청옥이라 불린다더니. 눈이 부실 정도야.”
“어떻게 하지? 가슴이 너무 떨려.”
눈꽃처럼 하얀 얼굴과 그윽한 눈동자.
인형처럼 무표정했던 소녀들의 얼굴에 열꽃이 피어올랐다.
‘먹히는구나! 과연 설 사부야!’
향기에 취한 벌떼를 물리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왕포삼은 그래서 비장의 무기를 소환했다.
설영이라는 또 다른 꽃을!
쿠웅.
설영이 검자루를 바닥에 박아넣고, 문 옆에 기대어 섰다.
날카로운 얼굴선.
우수에 젖은 눈망울.
곳곳에서 가녀린 탄성이 울려 퍼졌다.
“얘, 얘야 어디 가느냐?”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을 깨달았어요.”
“뭐, 뭐라고?”
스르륵.
딸은 무공 고수처럼 아버지의 손을 자연스럽게 흘려낸 후, 설영의 앞자리로 향했다.
꽃을 쫓는 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얘, 얘야!”
“어딜 가느냐!”
벌들이 보이지 않는 줄을 끊어내고 날아갔다.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야.’
‘이런 삶이 있음을 모르고 살아왔다니.’
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었다.
이 순간, 그들은 적이 아니고 동지였다.
억지로 딸을 끌고 가려던 무인도 있었지만.
스르릉.
“……!”
설영이 슬쩍 검을 만지기만 해도 모두 움찔해서 제자리로 도망갔다.
‘으하하! 일석이조로구나!’
왕포삼은 속으로 환호했다.
설영 덕분에 위세 등등한 무인도, 대처하기 곤란한 여인도 모두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포삼을 돕는 이는 설영뿐만이 아니었다.
“봉 학사, 바쁘실 터인데 이리 와주시다니. 고맙소.”
“공자님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덕분에 굶주림을 면하고, 가족에게도 면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마르고 키가 큰 학사가 두 손을 맞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연인에게 연시를 지어주던 낙방 서생, 봉경문이었다.
“글과 관련하여 찾아온 분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봉 학사가 크게 외치자, 머리 허연 학사가 다가와서 탄식했다.
“어리석음이 현명함을 몰아내고, 작은 욕망이 큰 선을 밀어내는 세상이니. 과연 말이 통할 자가 있을 것인가.”
“찾아오신 목적이 무엇인지요? 여기 적어주시면….”
“나의 깊은 깨달음을 어찌 몇 글자로 표현할 수 있겠소?”
“그럼 말로 하여주시지요.”
“세상이 도탄에 빠진 이유는 대덕(戴德)이 쇠하였기 때문이요. 이에 본 학사가 빛을 비추어 천명(天命)을 드러내고자 하오. 사물의 이유인 소이연(所以然)을 바탕으로 원칙 소당연(所當然)을 명확히 하여….”
정작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쉬지 않고 놀리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 양반, 또 시작이구만.”
“평생 골방에서 학문만 연구했다지?”
“학식이 깊으면 뭐 하나.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왕포삼이 가장 골머리를 앓던 손님이었다.
봉 학사는 한참을 듣더니 빙그레 웃었다.
“쉽게 말해서 스스로 이론을 세웠으나, 부족함이 없는지 궁금하다. 즉 공자님께 평가받고 싶으시다, 바로 그 말씀이군요?”
“…뭐, 결론적으로는 그렇소. 학사의 일이야말로 중하다 아니할 수 없는….”
“자, 여깄습니다.”
봉 학사는 종이에 뭐라고 적더니 노학사에게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좋은 조언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이 필요한 법입니다. 공자님을 뵈면 이렇게 묻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노학사는 봉 학사의 종이를 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유운과 만났고, 마침내 노학사가 방에서 나왔다.
“이토록 간명하게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짚어주다니. 어린 나이에 이리 학문이 깊을 수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개운한 얼굴이었다.
“도움이 되셨습니까?”
“멀었던 눈이 뜨인 기분이오. 이럴 시간이 없소, 어서 후세에 길이 남을 책을 써야겠소!”
노학사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집으로 달려갔다.
처치 곤란한 손님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그러니까. 꼭, 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 합니다. 공자님이.”
사내의 말더듬이가 너무 심해서 다들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봉경문은 달랐다.
“그러니까 가문의 보물을 내어주고, 도사에게서 길운을 불러오는 부적을 받았는데, 이것이 진품인지 아닌지 가짜인지 궁금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그거예요. 바, 바로 그, 그거!”
말더듬이 사내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보던 사람이 호기심에 물었다.
“부적술이라. 무공도 학문도 아니거늘. 그게 가능하오?”
“물론 공자님이라고 천하 만물을 다 아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허나.”
봉 학사가 하늘을 보며 가슴을 두드렸다.
“공자님이 모르신다면, 천하의 그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괜히 백리학사라 불리시겠습니까?”
“허어. 백리학사라. 다들 백리, 백리 하는데 무슨 뜻이오? 단지 가문 이름만은 아닐 듯한데.”
“본래 백리(百里)라 함은, 전조(前朝)에서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의 크기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백리제일학사라는 말은, 한 나라를 운영할 지혜를 가졌다는 뜻이지요.”
“오오. 그런 뜻이었구려!”
“또한 공자의 넓고 깊은 지식이, 백리에 이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칭찬도 좋지만. 너무 과하지 않소?’
왕포삼이 걱정스러운 듯 봉 학사를 흘깃거렸다.
유운이 들었으면 기겁하며 말렸을 터, 하지만 유운은 여기 없었다.
“무엇이든 아신다는 말이오?”
“오죽하면 백리다문(百里多聞)이라고 하겠습니까? 공자께서는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오오오!”
봉 학사의 열띤 목소리에 사람들이 진심으로 화답했다.
“공자님을 믿으십시오! 믿습니까?”
“믿네, 믿고말고!”
“목소리가 작습니다!”
“와아아!”
“유! 운! 유! 운!”
“좋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모두의 기대감 역시 한도 끝도 없이 커졌다.
‘끄응. 이래도 되나? 에잇, 나도 모르겠다.’
왕포삼은 신경 쓰지 않고 손님을 맞이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주루 안.
“백리다문이라. 소문의 반의반만이라도 된다면….”
추레한 몰골의 사내가 지친 얼굴로 탄식했다.
분명 과장이리라. 그럼에도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사내가 가슴팍을 더듬었다.
가벼운 두루마리가 오늘따라 묵직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