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몰려드는 사람들 (8)
“옛말을 어찌 곧이곧대로 믿겠습니까? 잘해야 검기지경의 무공이겠지요. 그 정도만 되어도 한 성읍을 다스리기에 차고 넘칩니다.”
운만 따르면 칼을 잘 쓰는 일반인도 삼류 고수를 이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류 고수만 되어도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氣).
자연의 힘을 몸에 품으면, 역설적으로 자연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기를 다루기만 해도 몸이 강건해지고, 비할 데 없이 빨라지니 승부는 일방적이게 된다.
일류고수는 말할 것도 없다.
검기지경(劍氣之境).
몸 안의 기를 유형화하여 바깥으로 내뿜는 경지!
경지가 깊은 자는 무른 쇠조차 가를 정도이니.
같은 일류 고수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검기지경이라. 분명 놀라운 경지이나….’
유운은 속으로 수많은 무공의 이름을 떠올렸다.
고작 검기를 얻겠다고 연씨의 선조들이 그 고생을 했을 리 없다.
“흔적을 보아하니 적지 않게 펼쳐보신 듯하군요.”
유운의 말에 연제승이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습니다. 이 나이 먹도록 욕심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가문의 무공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어찌 욕심이겠습니까? 하물며 그 무공이 강기를 논할 정도라면 말할 것도 없지요.”
“강기지경이라 하셨습니까, 공자?”
유운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검기를 극도로 압축하고 정련하여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힘!
천하에 베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절정 고수를 하늘로 여기는 데에는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본가에도 강기지경의 무공이 몇 없거늘. 하물며 종가에서 말입니까?”
설영이 놀란 눈으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백리세가 정도의 대가문이 아니라면 구하기 극히 어려운 경지의 무공이다.
그랬으니 적인걸의 신위에 모두가 놀란 것이다.
“귀한 가전 무공이거늘, 저희가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주인도 모르는 보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연제승이 스스로를 비웃으며 한탄했다.
“가문 대대로 족자의 비밀을 연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조들께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일초 반식조차 말입니다.”
“……!”
무공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많고도 많았으나 모두 실패했다.
오죽하면 한때 탐내던 도둑들조차 비웃으며 돌아갈 정도였다.
“그래서 저는 다른 방법을 썼습니다.”
“다른 방법이요?”
“안에서 답을 못 찾으면 밖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법이지요. 뒤늦게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만….”
“결과가 안 좋았나 보군요.”
유운의 말에 연제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본가의 남은 재산을 다 털어서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름난 학자, 화공, 심지어 무인까지. 하지만 누구에게서도 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좋지 못한 이름만 얻고 말았지요.”
“아아. 그래서 액운자라는 이름이….”
사람들이 사정을 알고 탄식했다.
“솔직히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과연 족자 안에 무공이 있기나 한지. 없더라도 좋으니, 진실이 속 시원하게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연제승은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운을 찾아왔다.
“그나마도 근래에는 돈을 주어도 연구조차 하려고 하지 않더군요.”
“왜입니까?”
“그림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촤라락.
연제승이 다탁 위에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실로 대단한 그림입니다. 진품이 틀림없겠군요.”
“그러합니다, 공자님. 저 같은 까막눈이 보아도 알겠습니다.”
보자마자 설영과 장노가 감탄을 토했다.
하얀 백지 위에 신들린 듯한 붓질이 이어지니.
인세에 보지 못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화공들 역시 생전 처음 보는 정교한 그림이라고 극찬하고는 했지요. 그러니 더욱더 거짓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선조들께서 목을 맨 것입니다.”
연제승의 말에는 깊은 한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다 같이 그림을 관찰했다.
푸르른 시냇가에서는 두 사내가 검을 겨뤘고, 버드나무 아래서는 한 여인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림 속의 얼굴이 어쩐지 눈에 익은데…. 설마.”
사람들의 시선이 오른쪽 사내에게로 향했다.
비무와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학사복.
한 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든 자세.
무엇보다 백옥처럼 하얀 얼굴을 모를 수가 없었다.
“시조님을 뵈옵니다!”
“시조님을 뵈옵니다!”
“시조님을 뵈옵니다!”
백리세가에 속한 모두가 순간 무릎을 꿇었다.
느낌은 다르지만, 분명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얼굴이었다.
백리선휘.
바로 백리세가를 일으킨 무학사였다.
사백여 년 전, 천하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유림의 학사 하나가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문(文)을 통해 무(武)의 근본을 이해하고, 무(武)를 통해 문(文)의 끝에 다다르리니.”
“나의 문과 무로써 천하를 구하리라!”
처음에는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평생 글만 파던 책벌레가 어찌 무림의 흉험함을 감당하겠는가?”
“연구를 통해 무의 궁극에 다다른다? 책상물림이나 할법한 소리로구나!”
백리선휘가 천하 각파의 문을 두드렸으나, 대부분은 비웃으며 그를 쫓아냈다.
하지만 보인 정성이 갸륵해서일까.
몇몇 문파에서 기초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십 년.
수많은 기초 무공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문 무공을 만들어내었고, 비무에 나섰다.
그 결과는?
백전백승!
혼자 힘으로 자신을 증명해내니, 모두가 그를 ‘상승검존’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무공의 정체였다.
“천하에 모르는 무공이 없다고 자부하건만. 저건 생전 처음 보는 무공이 맞네.”
“맙소사. 학사가 어찌 저런 무공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천하 무림이 경탄하며 새로운 별호를 붙여주었다.
무학사(武學士).
무공을 이론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사이자, 학문을 깊게 닦은 최초의 무인이었다.
백 번의 비무가 남긴 것은 명성뿐만이 아니었다.
“백 번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이를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적에게 배운 무공을 개량하여 적에게 돌려주니.
원한을 품었던 적들조차 감탄하며 그를 칭송했다.
백병무자(百兵武子).
백 가지 무공과 백 가지 병기를 다루었던 당대의 기인.
사후에는 무신으로 추앙받기까지 했던 절대 강자였다.
그랬기에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다른 이들이 연구조차 하려 하지 않았는지 알겠군요.”
“이 구도는 마치….”
새하얀 옷에 잘생긴 얼굴, 맑은 눈빛.
거기에 여인까지 등지고 있으니.
백리선휘는 누가 보아도 여인을 지키는 정도의 영웅이었다.
반면 연자후로 짐작되는 사내는 허름한 검은 옷에, 어두운 표정으로 가득했다.
결정적인 부분은 그의 검에 어린 기운이었다.
쿠르르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르니, 그림 너머로도 그가 품은 살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이래서야 여인을 노리는 음적과 같지 않은가?’
누가 보아도 영웅이 악적을 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연인을 두고 두 사내가 겨루는 구도로군요.”
혹시나 험한 말이 나올까 봐 유운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이해가 안 됩니다, 주군. 세세한 붓질 하나하나마다 깊은 현기가 어려있으니, 결코 그림이 가짜일 리는 없겠사오나….”
설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님. 도저히 백리사기에서 말하는 형제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장노도 의문에 가득 찬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의 분위기와 아까의 이야기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혹 답을 찾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백리의 후손께서 그림을 인정해주신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연제승의 얼굴에 부처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두루마리는 그저 잘 그린 그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혹시 나의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닐까?’
절망 끝에 자신을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백리세가의 적손이 인정해주었다.
최소한 선조들의 바람이 거짓은 아니었다는 소리였다.
“아닙니다. 형제가 도움을 요청하였거늘 어찌 외면하겠습니까?”
“본가가 백리의 형제라니. 허허허.”
연제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본래도 보잘것없는 가문이며, 지금은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버린 상황.
그런데도 자신에게 저리 정중하게 예를 갖추다니?
“저는 괜찮습니다. 공자께서 보여주신 마음만으로도 이곳에 온 보람이 있습니다. 백리에서 저희를 잊지 않았다니….”
“아니오, 부족합니다.”
“……!”
“말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법. 종가로 맞이했다는 말은, 이끌 권리뿐만이 아니라 돌봐야 하는 책임 역시 같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아니, 이게 더 먼저지요.”
“고, 공자!”
“백리의 혈손으로서 어찌 종가의 어려움을 외면하겠습니까? 오랜 기간 홀로 고생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성심을 다해 연 가주를 돕겠습니다.”
“크흐흐흑.”
연제승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터졌다.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 당신이 겪은 고통을 모두 이해한다.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돕겠다.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하물며 자신은 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유운은 개의치 않았다.
“과연 공자님이십니다.”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 역시 벅차올랐다.
권한보다 책임이 먼저라니?
비정한 무림에서, 어느 가문이 이리 말한단 말인가?
“공자님만…. 공자님만 믿겠습니다.”
연제승은 간신히 한 마디를 꺼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평생의 한이 풀렸으니, 결과가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떠나가는 연제승의 얼굴은 후련하고 편안해 보였다.
* * *
연제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다.
하지만 전후 상황을 아는 자라면, 연제승의 표정만 보아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운 공자께서 액운자의 의뢰를 받기로 하셨다지?”
“쯧쯧. 하필이면 재수 없는 자와 엮이시다니. 그러다가 액운이 백리세가에 옮겨붙으면 어쩌려고.”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소문이 구체화하였다.
“족자 안에 숨은 무공을 찾아낸다? 될 리가 없지.”
“당연한 말이지. 그동안 연구했던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과거 연가에는 적지 않은 가산이 있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리는 법.
한때는 많은 이들이 진지하게 연구하기도 했다.
“무언가 있는 듯한데, 알아볼 수가 없구나.”
“천하의 난제로다!”
그래서 초기에는 답이 있으나 풀 수 없는 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실패가 계속되자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림이 아무리 정교하면 뭐 하나. 알맹이가 없는데.”
“고작 그림 하나로 무공을 전한다니.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말이었어.”
그랬기에 유운의 도전 역시 폄하되었다.
“아무리 유운 공자라도 이건 아닌 듯 허이.”
“내 말이. 모래에서 기름을 얻어내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번만은 공자께서 실수하신 듯하네.”
“이게 어찌 실수겠나? 작은 성공에 취해 오만해진 게지.”
일부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고, 일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운을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