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몰려드는 사람들 (9)
이런 사정을 알기에 장노의 걱정 역시 컸다.
“주군께서는 아직도 서재에 계십니까?”
설영의 물음에 장노가 한숨을 쉬었다.
“휴우. 끼니도 거르고 그림만 보고 계십니다. 설 사부가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과연 무공이 숨겨져 있는 게 맞습니까?”
“무언가 있는 듯한데. 도저히 제가 헤아릴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설영조차 반나절 만에 포기했다.
그림 하나만 보고 절세 고수가 되는 일은, 협객전에나 나오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유운은 포기하지 않았다.
‘연 가주께서 잠을 잊고 기다리실 터인데, 어찌 포기하겠는가.’
신령한 산맥과 청명한 물줄기를 배경으로, 사연을 품은 듯한 세 사람이 서 있으니.
겉보기로는 평범한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였다.
‘하지만 고작 그것뿐일 리가 없지.’
유운을 그림을 자세히 관찰했다.
낭창낭창 휘어진 버드나무 가지 아래, 한 여인이 기대어 서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병약한 미인이었다.
비취처럼 푸른 시냇물 앞에는 두 사내가 검을 마주한 채 서로를 노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비무 혹은 생사결을 묘사한 장면이지만….
‘확실히 두 사람의 자세에는 각각 의미가 있어!’
고수는 걷는 자세만 보아도 상대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검을 들고 정신을 집중한 상태다.
두 사내의 자세에서 무언가 신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유운은 두 사람처럼 검을 들고 섰다.
‘이게 아니야. 고작 이거였다면 연가의 선조들이 금방 알아냈겠지.’
유운은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검을 내렸다.
자세를 따라 한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본래의 유운이라면 끝까지 홀로 궁리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한 가문의 운명이 달린 일.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염치 불고하고 두 분 스승님께 도움을 구하려고 합니다.”
유운이 두루마리를 향해 공손히 손을 모았다.
- 옆에서 다 들었다. 족자 속 그림 때문이더냐?
매화검선이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 클클클. 그림에 비밀이 숨겨져 있기는 하지.
종남일패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연 가주의 생각이 옳았군요!”
유운은 고생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보다, 연씨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에 더욱 기뻐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 그러나 알려줄 수는 없다.
“……!”
괜히 심술을 부릴 스승이 아니다.
유운은 반문하지 않고 공손하게 기다렸다.
- 흐흐흐. 되묻지도 않는구나. 이런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고.
- 이 친구가 성질이 되바라지긴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종남일패의 말에 매화검선이 끼어들었다.
- 뭐라고? 되바라져? 자네…!
- 허허허. 말을 끝까지 들어보게.
매화검선이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 분명 그림에는 한 가지 뜻이 담겨있다. 그러나 나 역시 말해줄 수는 없다.
“……!”
- 먼저 생각해 보거라. 연가의 시조가 왜 이러한 그림을 남겼겠느냐?
“아아…!”
유운은 탄성을 토했다.
- 알아들었구나. 그림을 그린 자가 남긴 방법이 있거늘. 신선인 우리가 어찌 이를 편법으로 깨겠느냐?
“제자가 어리석었습니다.”
유운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 하지만 작은 단서를 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그림에서 무엇이 느껴지느냐?
“뼈와 살을 가를 듯한 살기가 느껴집니다.”
- 과연 이 그림을 화공이 그렸겠느냐?
“……!”
- 그림이 스스로 살기를 품는다? 세상의 어느 화공이 그런 신기를 부릴 수 있다더냐.
유운은 무릎을 ‘탁’쳤다.
검에 살기를 담는 것도 어렵거늘, 하물며 그림이다.
“그림에 마음을 담는 경지라니….”
유운은 눈을 감고 상상했다.
강기지경의 고수라고 할 수 있을까?
적인걸이 할 수 있을까? 본가의 고수들이 할 수 있을까?
유운은 금세 답을 떠올렸다.
‘불가능해.’
하물며 수백 년이 넘은 그림이다.
그럼에도 이리 생생한 살기가 느껴진다는 말은….
부르르…!
어떤 경지의 무공인지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렸다.
- 깊이 파고들어 보아라. 분명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 네게도 가치 있는 도전이 될 것이다.
고고한 화산의 무인과 패기 넘치는 종남의 무인이 입을 모아 말했다.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습니다.”
유운이 보기 드물게 단정적으로 말했다.
- 젊은 혈기는 이래서 좋구나. 뜨겁구나, 뜨거워.
- 학사의 탈을 썼지만, 네 녀석 역시 무인이로구나. 그 정도 승부욕은 있어야지. 좋구나, 좋아!
두 스승은 껄껄 웃으며 유운을 응원했다.
* * *
유운은 그림을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오직 그림만을 노려보았다.
“공자님, 식사는 거르시더라도 잠을 거르시면 안 됩니다.”
“…에효, 공자님 아예 귀가 꽉 막히셨어요. 이럴 때는 가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장노와 소화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하룻밤을 노려보았다.
혼을 다한 노력 때문일까.
유운이 의식하기도 전에, ‘명안명심법’이 스스로 깨어났다.
우웅, 우웅…!
뼈대의 위치, 근육의 움직임은 물론, 숨소리, 터럭 하나의 움직임까지.
두 사내의 모든 것이 유운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짧은 순간, 유운은 ‘완벽’하게 두 사내가 되었다.
‘완벽’하게 같은 자세를 취하고, 내기를 일으키는 순간.
우웅…. 우웅…!
허리의 소요혈 부근에서 미약한 열기가 일더니, 옆구리의 기문혈을 거쳐 가슴팍의 옥당혈로 향했다.
‘이거로구나! 일종의 동공이야!’
유운은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림은 바닥에 앉아서 내기를 쌓는 정공이 아닌, 움직이면서 기를 쌓는 동공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도 각기 다른 두 가지의 무공을!
연씨의 역대 가주들조차 모르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분명 시작점임이 확실하나. 이것만으로 무공을 익힐 수는 없어.’
유운은 안타까운 듯 그림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취한 자세가 어떤 무공의 기초임에는 분명하다.
무공에서 기초야말로 중요하다지만….
‘반대로 말하면 기초일 뿐이지.’
가장 단순한 삼재검법조차 여러 장의 그림이 필요하고, 삼재기공조차 구결이 없이 익힐 수는 없다.
방대한 무공의 경우, 두꺼운 책 여러 권에 달하기도 했다.
아무리 현묘하다 하나, 고작 동작 두 개로 어찌 무공을 전하겠는가?
‘휴우. 난제로구나, 난제!’
유운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공자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장 노야,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먹겠습니다. 놓고 가십시오.”
“안 됩니다. 공자께서 식사하실 때까지, 절대 자리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장노답지 않게 강경한 말에, 유운이 고개를 들었다.
“벌써 며칠째입니까? 주무시지도 않고 드시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이래 봬도 무공으로 단련된 몸이니….”
“무인 또한 사람입니다.”
몸 안에 내기가 왕성하니, 사나흘 밤을 새운다 해도 큰 영향은 없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유운을 보았던 장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미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눈 밑이 거뭇거뭇합니다. 저도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휴우, 그리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엄격한 말속에 숨은 정을 어찌 모르겠는가?
유운이 한숨을 쉬며 수저를 들었다.
후르릅.
유운이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자, 그제야 장노의 얼굴이 풀어졌다.
“당분간 만서각 밖으로 나가기 힘들 듯합니다. 기다리는 분들이 있을 터인데….”
유운은 두문불출, 문자 그대로 문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장노가 그런 유운의 성품을 모를 리 없다.
“제대로 집중하시면 침식을 잊고 빠져드시니. 그럴 줄 알고 미리 사람을 보내 알렸습니다.”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장 노야.”
“다만 걱정되는 것은 사람들의 입입니다.”
“입이요?”
“어떻게 알았는지 소문이 다 퍼졌습니다.”
“사람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나름 유명한 사연 아닙니까.”
“혹여 이 일로 공자님께 안 좋은 말이 들러붙을까 봐 걱정입니다.”
사람 마음이란 간사한 법.
영웅의 탄생을 보고 싶은 마음 못지않게, 영웅의 몰락을 바라는 마음 역시 큰 법이다.
“혹여 제 명성에 타격이 있을까 봐 걱정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소인배들이 뒤에서 공자의 체면을 깎아내릴까 봐 두렵습니다.”
장노가 걱정스레 한숨을 쉬자,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저의 체면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진정 두려운 일은 연 가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하나 공자, 그것은 그저 부탁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저 또한 백리의 혈손입니다. 시조께서 한 약속 또한 제가 한 약속과 같습니다.”
“……!”
“종가의 맹약은 무겁고도 중합니다.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부끄러워서 선조의 얼굴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유운의 말에 장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실로 바르게 크셨구나!’
다들 겉으로만 의를 외치고 실제로는 이익만을 추구한다.
명문가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유운만은 달랐다.
“공자님의 마음은 알겠습니다. 말리지 않을 터이니, 부디 건강만은 챙겨주십시오.”
“노야께서 그리 걱정하시니. 알겠습니다.”
유운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밥알을 입에 넣었다.
서재에서 나온 장노는 소화를 찾았다.
“저리 말씀하시고도, 종종 식사를 잊어버리실 것이다. 네가 곁에서 주전부리라도 챙겨드리거라.”
“저만 믿으세요, 노야!”
소화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식사를 마친 유운은 다시 그림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몸에 숨겨진 비밀은 이게 끝이야.’
유운은 그림을 들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다른 비밀이 있다는 소리인데. 몸이 아니라면 설마, 검에 있는 것일까?’
유운은 두 사람이 들고 있는 검에 주목했다.
금방이라도 횡으로 휘두를 것처럼 생생했다.
특히 날카로운 검의 끄트머리가 눈길을 끌었다.
검첨(劍尖).
칼끝 혹은 검두라고도 불리는 부위.
현란한 변초를 만들 때 중요한 역할을 하고는 했다.
‘검의 변화라….’
유운은 족자뿐 아니라 그간 배운 모든 무공 떠올렸다.
휘이이잉.
파바밧!
검 끝이 휘며 새로운 검초를 그려냈다.
변화가 변화를 낳으며 수없이 늘어나니.
조그마한 검첨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에휴. 내 이럴 줄 알았어. 노야의 말대로네.”
소화가 문 사이로 빼꼼히 머리를 들이밀더니, 한숨을 쉬었다.
유운은 멍하니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으니, 가만두면 밤까지 저럴 터였다.
퉁.
소화는 소반에 주전부리를 가득 담아서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유운은 생각에 빠져서 알아채지도 못했다.
“흐흥, 모르신다 이거지? 설마 되려나?”
소화는 짓궂게 웃으며 월병 하나를 유운의 입에 물려주었다.
머리는 족자 안에 있으나, 몸은 현실에 있으니.
오물오물.
유운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후후훗. 재밌어, 재밌어!”
소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치 순한 소에게 여물을 주는 기분이었다.
오물오물.
유운은 소화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오구오구, 잘 먹네. 참 기특해요, 우리 공자님.”
소화가 히히 웃으며 등을 토닥거려도 모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