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실타래를 풀어내다 (1)
그렇게 얼마나 먹었을까.
끄윽.
뱃속이 가득 차서 더부룩해질 때쯤, 유운의 정신이 돌아왔다.
“허어. 어쩐지 속이 부대끼더라니. 내가 이걸 다 먹었단 말이더냐?”
서탁 위에는 월병을 감쌌던 포장지가 가득했다.
“어찌나 잘 드시는지, 보는 저도 흐뭇했어요.”
“네가 고생하였구나. 고맙다.”
“뭘요. 맛은 있으셨어요?”
뒤늦게 입안 가득한 향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달콤하구나. 무엇으로 만든 것이더냐?”
“왕씨 아주머니가 정성스레 빚으신 밀가루 피예요. 속은 제가 직접 밤을 졸여서 만들었어요. 땅콩과 호두도 조금 갈아서 넣었구요.”
“단맛이 과하지 않고 딱 적당하구나. 맛있게 잘 먹었다.”
소화가 만들었다고 해서 단맛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단맛이 적고 담백해서 입맛에 맞았다.
“벌써부터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니. 기특하구나.”
유운이 소화의 머리를 쓰다듬자, 소화가 코를 벌름거리며 히히 웃었다.
“그런데 그림이 그렇게 재밌어요? 매일 그것만 보시고.”
“하하하. 재미? 그래. 그리 말할 수도 있지.”
유운은 크게 웃으며 그림에서 눈을 돌렸다.
하도 많이 봤더니,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저도 봐도 돼요?”
“물론이다.”
연 가주의 마음이 열렸음을 아니,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 예쁘다!”
소화가 탄성을 터트렸다.
“무엇이 말이더냐? 아…. 그렇지. 보기 드문 미인이지.”
유운의 눈길이 뒤늦게 버드나무 아래 여인에게로 향했다.
계속 두 사내의 몸과 검만 보느라,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부럽네요, 이토록 애틋한 사랑이라니.”
소화가 꿈꾸듯 미소 짓자, 유운은 어리둥절해졌다.
“대체 무엇이 말이더냐?”
나쁘게 보면 영웅이 색마를 벌하는 광경이고, 좋게 보아도 두 사내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광경이었다.
어디에도 낭만적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었다.
“이거 연애소설을 옮긴 것 아니에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딱 봐도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잖아요.”
“무엇을 봐서 말이더냐?”
심지어 소화가 가리킨 사람은 백의인도 아니고 흑의인이었다.
유운이 도통 이해하지 못하자, 소화가 답답하다는 듯 여인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이게 안 보이세요?”
“옥패가 아니더냐?”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조그마한 옥패였다.
“여기는요?”
소화가 이번에는 사내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작은 주머니 사이로, 못생긴 과일이 보였다.
“모과로구나. 이게 왜?”
유운의 머릿속으로 얼핏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이상하기는 하구나.’
보통 여행할 때는 마른 곡물이나 훈연한 고기 등을 챙긴다.
과일은 비상식량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아이, 참. 이걸 보고도 몰라요? 서로 주고받은 선물이잖아요.”
“선물이라고? 설마…!”
유운이 뒤늦게 탄성을 터트렸다.
고전 문학에서 본 이야기를 떠올렸다.
“과거에는 사내가 연모하는 여인에게 사랑의 증표로서 옥패를 건네고, 여인 역시 탐스러운 과일을 선물하며 화답하는 풍습이 있다 들었다. 설마 그걸 말하는 것이더냐?”
“맞아요. 참 낭만적이지 않아요?”
“하나 고작 옥패와 모과일 뿐이다. 어찌 이것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확신하겠느냐?”
“이걸 어떻게 몰라요?”
소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인의 얼굴을 가리켰다.
손끝에는 여인의 눈동자가 보였다.
“표정만 봐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겠는걸요.”
“아낀다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떠는 눈빛이라 생각했었는데.
소화의 말 덕분인지,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흑의 사내를 엿보는 눈빛에서 달콤한 기운이 느껴졌다.
“서로를 아끼는 게 눈에 보이잖아요. 얼마나 애틋한 사랑 이야기예요?”
“사랑 이야기라. 네 눈에는 그리 보이느냐?”
“당연하지요. 두 사람이 서로를 강하게 원하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유운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당연히 생사의 비무를 표현한 그림이라 생각했는데, 소화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성현께서는 남녀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였거늘. 나조차 눈이 어두웠구나!’
이론과 현실은 달랐다.
천하의 중심은 언제나 사내였다. 특히 중년의 사내들이었다.
‘연가의 선조든, 학사든, 화공이든 모두 마찬가지겠지.’
그림을 여자, 특히 어린 여자아이에게 보인 적은 거의 없을 터였다.
사내들이 중점적으로 본 부분은 뻔하다.
‘두 사내의 자세. 그리고 검이겠지.’
검의 재질은 무엇인가?
검 끝이 그릴 수 있는 변화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사내들이 취한 자세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가?
당연히 방향을 그리 정하고 연구했을 터였다.
“네가 나를, 아니 우리를 깨우쳐주는구나!”
유운은 감탄하며 소화의 손을 꼭 잡았다.
큰 것만큼이나 작은 것도 중요하고, 이성만큼이나 감정 역시 중요하다.
진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기분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제가 한 건 한 거죠?”
“하하하, 한 건이다 뿐이겠느냐. 참으로 잘하였다.”
“히히히. 소화 최고다! 한 번만 해주세요.”
“이를 말이냐? 소화야말로 최고지. 만서각은 물론 서촌, 아니 백리세가에서 제일이고 말고!”
“와아아! 공자님께 칭찬받았다고 자랑해야지!”
소화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밖으로 나갔다.
‘생각이 바뀌니, 보이는 것도 달라지는구나!’
유운은 더이상 검이나 자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였다.
‘이 둘은 연인임이 분명하고….’
여인과 흑의 사내 사이에는 분홍빛 기운이 확연히 흐르니, 그동안 몰라봤던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이 둘 역시 적이 아님이 분명해.’
흑의 사내와 백의 사내의 검은 서로를 벨 듯했지만, 눈빛만은 달랐다.
적의 없는 눈에는 탄탄한 신뢰가 엿보였다.
뿐만 아니었다.
‘유록화홍(柳綠花紅)이라. 검만 보느라 보고도 지나쳤구나!’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으니, 그림 속은 따스한 봄날이었다.
악적을 벌하는 장면이라면, 생사결이라면 이런 배경을 쓸 리 없었다.
유운은 배경을 더욱 자세히 살폈다.
여인의 뒤편, 버드나무가 조금 이상했다.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얽혀있었다.
‘연리지(連理枝)였구나!’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가 되어 자라나는 모양새를 일컫는 말로, 정이 깊은 연인이나 부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뒤늦게 백리사기의 또 다른 기록이 떠올랐다.
가주에게는 배다른 누이가 있었다. 날 때부터 몸이 약하고, 나이 차이 또한 많이 나서 딸처럼 귀히 여기며 아꼈다. 성권제 십구 년, 칠석날에 가장 아끼는 친우에게 시집을 보냈다.
누이의 이름도 친우의 이름도 없지만, 누구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동생의 연인을, 매제가 될 사람을 죽일 리 없지.’
생사결일 리 없다.
오히려 동생을 잘 지켜달라며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리라.
그렇게 보니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오직 한 부분만을 제외하고.
‘어색해. 그림의 맥락과 어울리지 않아.’
훈훈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부분이 있었다.
뭉게뭉게.
검은 구름이 흑의인의 검을 휘감았다.
검은 검에는 소름 끼치는 살기가 가득했다.
모두가 흑의인, 연자후를 마두라고 확신한 이유였다.
‘검은 구름에 휩싸인 검이라.’
백리사기 어디에도 이와 같은 흑운검(黑雲劍)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림의 핵심이야.’
흑운이야말로 그림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
유운은 확신을 갖고 오직 흑운에 집중했다.
[명안명심법]
콰르르르…!
한 줄기 청명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눈에 이르는 순간.
‘뜨거워!’
불이라도 난 듯 눈이 달아올랐다.
머리 역시 깨어질 듯 아팠다.
순간 검은 구름 사이로 무언가 보이는 듯했다.
‘조금 더, 조금 더!’
세상을 바르게 보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시간은 언제나 찰나에 불과했다.
잘해야 모래알 두어 개 떨어질 시간.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다.
유운의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생각해 보거라. 연가의 시조가 왜 이러한 그림을 남겼는지.
- 그림에는 한 가지 뜻이 담겨있다.
순간 스승의 가르침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림의 담긴 뜻이라. 내가 연자후 대협이라면….’
연 가주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보잘것없는 낭인 출신.
무공에 재능이 뛰어났으나 고작 삼류 무공밖에 접하지 못했음.
백리가주에게 가르침을 받아 놀라운 무공을 성취.
거기에 몇 가지 사실과 추측이 더 덧붙여졌다.
가주가 아끼는 여동생과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
신분의 벽에도 불구하고, 가주의 지지를 받아 사랑의 결실을 맺음.
연자후가 아름다운 연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지키겠다. 목숨을 바쳐서 저 여인을 지키겠다. 그리 생각하겠지.’
연자후가 백리선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가르침을 베푼 스승이자 평생을 모실 주군.
거기에 은혜까지 베풀어서 가족으로 맞아주었으니….
‘너무나 감사하겠지. 평생을 바쳐서 보답하고 싶겠지.’
두 사내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다.
백리선휘는 유림의 자손으로, 부유하지는 않아도 안정된 삶을 살다가 무공에 눈을 뜬 경우였다.
반대로 연자후는 비천하게 바닥을 구르며, 인생의 고난이란 고난은 다 겪은 사람일 터.
그런 사람이 백리선휘조차 인정할 성취를 이루었다.
‘마땅히 후대에까지 이름이 전해졌어야 하거늘.’
그런 천하 강자의 이름을 대체 누가 지울 수 있단 말인가?
전반적인 그림의 구도를 살펴보았다.
칠흑처럼 어두운 구름.
악당처럼 묘사한 본인의 얼굴.
반면 백리선휘는 누가 보아도 영웅처럼 그려냈다.
‘스스로 어둠 속으로 숨기를 선택한 것이로구나!’
유운은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사내의 충의(忠義).
일생의 영광과 명성을 버리고 선택한 보은(報恩)이었다.
연자후의 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번쩍!
촤아아!
그림 속 먹구름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허공에 검은 구름이 솟아올랐다.
“맙소사! 어찌 그림이 이런 힘을?”
그림 속이 아닌, 현실에서 벌어진 일.
유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솨아아아…!
검은 구름이 쪼개지고 뭉치면서 글자를 만들어내더니, 이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까마득히 오래전에 심어놓은 힘이 이런 이적을 발휘하다니. 실로 놀라운 경지로구나!”
책 하나를 너끈히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글자.
유운의 눈길이 첫 번째 문단으로 향했다.
<평원현에서 연 모가 남긴다.>
마침내 수백 년 동안 숨겨져 있던 비밀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