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69화 (46/114)

제69화

실타래를 풀어내다 (2)

<나는 광검제(光劍帝) 이십칠 년,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비록 촌(村)의 이름조차 받지 못한 벽지였으나, 행복했다.

봄이면 버드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이면 밭마다 알곡이 무르익으니, 넘치지는 않아도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유운의 얼굴은 어두웠다.

‘참으로 가혹한 시기에 태어나셨구나.’

폭군 광검제가 급사한 후, 그 혈육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니, 무림사에 손꼽히는 암흑기였다.

<…행복한 세월은 그리 길지 않았다.

천하 만민을 위해 몸을 일으킨 초대 맹주의 뜻은 잊힌 지 오래.

영씨들이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고 서로 다투니 천하가 도탄에 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까지 찾아왔다.

힘들게 키운 조와 수수가 말라비틀어졌다.

처음에는 서로를 도우며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서로의 눈을 피했다.

혹시라도 얼굴에 살이 붙어있음을 들키면, 그 집에는 도둑이 들었다.>

‘성현께서도 굶주림 앞에서는 인의를 지키기 어렵다 하셨지.’

유운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닭과 염소는 물론 개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내년 심을 종자 따위, 진즉에 먹어 치웠다.

어느샌가 나무껍질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매일 사람이 굶어 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집에서 각기 아이가 사라졌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를 찾지 않았다.

남은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배불리 먹었다…>

‘아아아…!’

유운은 길게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맹수보다 굶주림이 무섭고, 굶주림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맹은 조세 대신 무쇠솥과 괭이를 빼앗아 갔고, 세가는 몇 안 남은 장정들까지 끌고 갔다.

어린 사내아이를 돌보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곧 괴물인 세상.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살기로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패잔병에게 배운 이름 없는 검법뿐.

거기에 버드나무 가지의 흔들림을 섞어서 나만의 검법을 만들었다.

내가 짐승처럼 굴수록 명성이 올라갔고,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았다.>

차마 묘사할 수 없는 잔혹한 일들이 적혀있었다.

<…그러다 백리의 성을 쓰는 한 학사를 만났다.

그는 검을 들지도 않고 나의 검을 베었다.

난생처음 보는 드높은 경지의 무공!

나는 기꺼이 허리를 굽혔다.

언젠가 그의 등 뒤에 칼을 꽂으리라 결심하면서…>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천하의 혼란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니, 관도에서조차 도적이 횡횡했다.

“주군, 저희를 노린 간악한 도적들입니다. 왜 목을 베지 않으십니까?”

“보거라. 칼끝이 흔들리지 않느냐. 정말로 사람을 벨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허름한 차림, 쟁기를 녹여 만든 듯한 조잡한 도(刀).

아마도 마을을 잃은 농민이었으리라.

“하지만 저희를 노리지 않았습니까? 응당 목을 베어 백리의 위엄을 보이셔야 합니다.”

“저들의 칼에 위협을 느꼈느냐?”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물에 빠진 자는 무엇이든 움켜쥐기 마련이다. 돕는 이의 목을 조른다고, 어찌 살인자라 부르겠느냐.”

“주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도적과 물에 빠진 사람이 어찌 같겠는가?

실로 말 같지도 않은 논리.

나는 겉으로는 수긍했지만, 속으로는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주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주, 주군. 뭐 하시는 겁니까?”

“얼굴이 검고, 팔다리조차 부러질 듯 가느다라니. 지금 먹이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

마침 우리가 가진 식량도 떨어진 상황.

그는 자신이 타던 말을 베어서 그들에게 먹였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십니까? 본가에 늦게 돌아가면 계승권을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백리가 본래 무가는 아니나, 유림의 명문으로 가진 재산과 권세가 적지 않았다.

“성현께서는 몸이 편하고 마음이 힘든 것보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편한 것이 낫다 하였다. 마침 두 다리도 튼튼하니. 경공술을 연습할 겸, 뛰면 되겠구나.”

그는 빙그레 웃으며 도적에게 국자를 건넸다.

“흑흑흑. 나으리. 이 은혜는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리를 이끌던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국을 받아먹었다.

하지만 그런 말 따위는 쌀알 하나의 가치도 없는 세상이었다.

‘어리석구나. 보기 드문 고수인 줄 알았더니 철없는 백면서생이었어.’

나는 도적의 말 따위, 하나도 믿지 않았다.

‘알량한 협객 흉내라. 흥, 한 달 가면 오래가는 거지.’

눈 뜨면 봇짐을 털어가고, 눈 감으면 코를 베어 가는 세상이다.

온정 따위,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리라.

하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사람들이 아무리 배신해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십 년.

천하에 무학사 백리선휘의 명성이 퍼져갔다.

그는 보석과 같았다.

세상이 어둡기에 더욱더 찬란했다.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용들조차 그를 흠모하고, 탐냈다.

질투하고 시기하는 자들이 없을 리가 없다.

“죽음 앞에서 착한 척하는지 보자.”

“저 더러운 위선자를 죽여라!”

깊은 밤.

여러 세가에서 동시에 습격해왔다.

그가 아무리 고수라고 하나, 나까지 겨우 둘 뿐.

상대는 삼백여 명이 넘었다.

“여기서 끝인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억울하다, 억울해!”

내가 아무리 악을 써도 소용없었다.

죽음이 확실한 상황.

절망에 물들 때였다.

푸욱.

세가들 사이에 섞여 있던 낭인대가 그들을 찔렀다.

“커헉! 네, 네놈이? 무슨 짓이더냐!”

칼에 찔린 세가주가 못 믿겠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을 사고도 남을 돈을 주었거늘. 대체 왜?”

“그저 은혜를 갚고자 함이오.”

낭인 대장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백리 공 덕분에 아들, 딸과 십 년간 행복했소. 오늘 그 은혜를 갚겠소!”

그와 내가 말릴 틈도 없었다.

삼십여 낭인대가 목숨을 걸고 길을 뚫었다.

“아아아. 나를 위해 무고한 목숨이 죽었구나.”

그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쫓기고 또 쫓겼고, 마침내 사막에 다다랐다.

운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나의 부상이 더 심각했다.

“먼저 가십시오.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없었다.

애초에 억지로 맺은 주종관계다.

당연히 나를 버릴 줄 알았다.

나를 미끼로 삼으면, 그의 생존 확률이 더 올라가리라.

분명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인데….

뚝. 뚝. 뚝…

뜨거운 핏방울이 내 입술을 적셨다.

“……!”

그가 자신의 팔뚝을 베어, 내게 피를 먹이고 있었다.

“머, 멈추십시오.”

그의 얼굴이 금세 파리해졌다.

아무리 고수라도 피를 그리 잃으면 위험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나는 가면조차 잊고 소리쳤다.

나 따위가 무엇이라고.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아무것도 없거늘.

“사람을 살리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느냐?”

“……!”

“하하하. 사실은 네가 죽으면 꿈에 나타날 것 같아서다. 인제야 말하지만, 나는 겁이 많단다.”

농담을 건네는 얼굴이 그렇게 눈부실 수가 없었다.>

이후로는 백리선휘와의 일화가 이어졌다.

연자후의 어투에 조금씩 온기가 돌았다.

<…그에게서 인이란 무엇인가, 의란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때서야 나의 삶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를 만남으로써 나는 비로소 짐승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

짐승만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고고하니.

그는 오물 속에서 피어난 꽃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주군의 누이와 사랑에 빠졌다.

비천한 낭인이, 뼈다귀나 핥던 늑대가 귀한 신분의 여인을 탐한 것이다.

당연히 벼락이 떨어질 줄 알았다.

죽음까지도 각오했다.

그런데 그분은 달랐다.

진심으로 나와 그녀를 축복해주었다.

아아아…!

그동안의 세월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왔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 은혜를 잊는다면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리라.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에게 보답하리라.>

점점 글자에 열기가 어렸다.

<…주군은 나의 형님이자, 아버지이자, 스승이시다.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완벽하신 그분에게도 약점이 있다.

군자(君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선인.

하나 이 세상은 더럽고 혼탁하니, 어찌 오물이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맹견만이, 짐승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나는 그림자 속에서 주군을 위해 살기로 했다.>

‘……!’

<…나의 요청을 주군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셨다.

함께한 세월이 이십 년.

주군의 성품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나는 밤낮으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내 몸이 해골처럼 말라가고, 의식조차 희미해질 무렵에야 주군이 길게 탄식하였다.

나는 사관에게 말하여 나에 관한 모든 기록을 지우도록 했다.

하지만 주군께서 극구 말리니.

어쩔 수 없이 첫 만남만은 기록에 남기도록 하였다.>

기나긴 사연이 끝나갔다.

<…주군께 받은 은혜는 태산과 같다.

나의 후손이라면 백리의 이름 앞에서 응당 몸을 낮추어야 하리라.

설령 후손이 더 뛰어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더는 헛된 명성을 좇지 말아라.

종가(從家), 그 영광된 이름을 버리고.

암가(暗家), 어둠 속에서 스러지는 별이 되어라.>

‘암가!’

유운조차 처음 들어보는 명칭.

그때서야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문의 유래도, 무공의 비밀도 소수에게만 전해졌을 터.

만약 후계자가 장성하기도 전에 가주가 죽는다면?

‘세월 속에 잊히겠지.’

종가 중에서도 그렇게 사라지는 경우도 많았다.

<…연가의 후손은 목숨으로서 주군께 충성해야 한다.

하나 검이 무디면 어찌 충을 다할 수 있겠는가?

내 이를 위해 후손에게 두 가지 무공을 남긴다.

…첫째는 ‘비류연검’이다.

내가 만든 검법에 주군의 깨달음을 더했다.

주군을 닮아 부드럽고 따스한 검법이다.

피치 못하게 밝은 곳에서 활동할 때 쓰면 된다.

천하를 종횡하였으나, 이 검을 막은 자는 채 스물이 되지 않았다.

후손에게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로구나, 버드나무를 닮았다는 환검술이!’

연가의 역대 가주들이 찾아 헤매던 독문 무공!

연씨가 이 무공을 대성한다면, 제일종가 역시 꿈만은 아닐 터였다.

<…둘째는 ‘흑운검’.

악적을 벌하고자 주군께서 만드신 검법에 나의 깨달음을 더했다.

일격필살의 살검이니.

오직 어둠 속에서, 죽여야 할 적에게만 사용해야 한다.

평생토록 이 검을 막는 자는 주군 외에 보지 못하였다.

그조차 나의 재능이 부족하여 대성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검을 끝까지 익힌다면, 천하에 베지 못할 자가 없으리라.>

‘…맙소사!’

흘린 피의 무게만큼 무공 또한 깊어지는 법.

육룡쟁주(六龍爭珠).

여섯 용이 천하를 여섯으로 나누어 다스리며 서로의 목을 노리고.

천하백가(天下百家).

백 개의 명문세가가 산과 들을 움켜쥐고, 세를 키웠으며.

천호만랑(千虎萬狼).

호랑이의 위엄을 가진 초절정 고수가 천이오, 늑대같이 두려운 절정 고수가 일만이니.

사백 년 전은 역설적으로 무림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천하에 고수가 넘쳐났던 시절이거늘. 설마…!’

유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시대에도 적수가 드물었다고 한다.

거기에 시간을 초월하며 ‘의지’를 남기는 경지까지.

유운은 연자후가 남긴 무공의 정체를 깨달았다.

심검지경(心劍之境).

마음의 검으로 천하 만물을 베어내니.

강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설상의 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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