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실타래를 풀어내다 (3)
심검지경을 달리 부르는 말도 있다.
무상지경(無上之境).
‘무상’은 더 할 수 없이 높다는 뜻.
사람들의 상상 너머, 무공의 끝이라는 소리였다.
‘전설인 줄로만 알았거늘.’
이전의 유운조차 반신반의할 정도였다.
대놓고 이를 부정하는 이들도 많았다.
“마음의 검으로 모든 것을 벤다? 허무맹랑한 소리!”
“암, 무공에 대해 일초반식도 모르는 자나 할 수 있는 말이지.”
“맹과 세가가 제 선조를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임이 틀림없네.”
무학의 이론에 해박한 자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
내공을 쌓은 사람은 눈에 띄게 달라진다.
이전에 들지 못했던 바위를 들고, 상상도 못 했던 속도로 달릴 수 있다.
‘검기 또한 마찬가지이지.’
몸 안의 내기를 유형화하는 경지이니.
흐릿하지만 분명히 눈에 보였다.
‘검강은 말할 것도 없고.’
검강은 검기를 극도로 압축하고 정련한 힘!
용암, 북풍, 대해, 대지….
사람에 따라 느낌은 다를지언정 매우 뚜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심검은 다르지.’
몇 안 되는 기록에서 공통으로 말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있음을 모두가 느꼈다.”
“보이지 않는 검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공은 실재적인 힘!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일수록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천하십대고수가 손도 대지 않고 상대를 쓰러뜨렸다고? 쯧쯧. 이리 견문이 짧아서야.”
“어찌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오? 내기를 흘려보내 상대의 내부를 진탕 시킨 것임이 분명하오.”
“부디 망념에 사로잡히지 마시게.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게.”
학자는 과장된 표현일수록 잘 믿지 않는 습성이 있다.
예전이었다면 유운조차 그리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두루마리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신선이 구름 위를 노니는 세상도 있거늘. 어찌 마음으로 베는 경지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열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훨씬 더 넓고, 높았다.
연자후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촤르르…!
허공에 수많은 문자가 펼쳐졌다.
‘연 대협이 남긴 무공 구결이로구나!’
유운은 눈을 빛내며 문자를 살폈다.
‘허어. 이토록 방대한 양이라니!’
촤르르…!
무공 구결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문자의 폭포!
놀라운 점은 양뿐만이 아니었다.
<초식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니, 세상에 완벽한 초식은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결국 파해가 되고 말리라. 하지만 그게 답이 없다는 뜻일까?>
‘……!’
<공간도, 시간도 무한하다. 하지만 너를 노리는 검은, 네 목을 노리는 적의 살기는 유한하다. 극히 짧은 시간, 극히 작은 공간! 그 안에는 분명 답이 있다.>
‘스승님의 가르침과 닮았구나!’
산을 오르는 길은 많으나, 높은 곳에 이르면 결국 만나게 되는 법.
연자후가 논하는 이론은 종남일패와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상대 역시 이름난 고수일 터. 굳건한 방어를 뚫기 위해서는 상대의 눈뿐 아니라 마음을 속여야 한다. 이에 버드나무의 흔들거림을 흉내 내, 나만의 검법을 만들어내니 이를 비류연검이라 한다.>
이어서 길고 긴 구결이 이어졌다.
읽어가는 유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런 검법이 있을 줄이야!’
상승 검법일수록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여 여러 초식을 준비하기 마련이다.
백리 무공의 기초인 백리팔검은 여덟 초식, 그 상위 무공인 웅풍십이검은 열두 초식으로 쾌, 중, 환을 균형 있게 풀어냈다.
반면 비류연검은 달랐다.
오직 하나!
단 하나의 ‘변초(變招)’만으로 이루어진 극단적인 검법이었다.
실전의 변화무쌍함을 대비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당연했으나….
‘맙소사. 고작 하나의 초식이 어찌 이리 많은 변화를 품고 있단 말인가?’
보통 하나의 검초마다 각기 서너 가지 변화를 숨기고 있다. 아무리 복잡한 검법이라 해도 열을 넘지는 못했다.
하지만 비류연검은 달랐다.
검초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끝없이 흔들리며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내니.
‘적어도 수천… 어쩌면 수만에 이르는 변화를 품고 있겠구나!’
족자 속 연자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따사로운 봄날, 검 끝이 자유롭게 흔들리니.
필시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검술일 터였다.
<천하에는 괴물이 많으니. 언젠가는 뚫을 수 없는 벽을 만나리라.>
무상지경, 혹은 조화지경이라 불리는 절대강자들!
그들에게는 어떠한 눈속임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뚫을 수 없는 벽이라고 포기할 것인가? 네 뒤에 사랑하는 가족이, 존경하는 주군이 있는데 훗날을 도모하며 도망칠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연자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뚫을 수 없는 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무상의 힘이 필요한 법. 이를 위해 하나의 무공을 남기니, 이를 흑운검이라 한다.>
‘……!’
마침내 연자후 최후의 무공이 드러났다.
하지만 절대 무공에 이르는 길이 평탄할 리 없다.
<마음으로서 상대를 베기 위해서는 먼저 천하 만물을 알아야 한다.>
무공 이야기는 잠깐, 이어지는 것은 깊고도 깊은 의학 이론이었다.
<다들 사람 몸에는 삼백여 개의 혈도와 십이 개의 경락만 있다고 알고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 예컨대….>
문자 사이로 정교한 인체도가 떠올랐다.
‘지독하게도 세밀하구나!’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혈도들의 상호 작용과 존재조차 몰랐던 비밀 혈도까지.
어지간한 의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한 내용이었다.
의학뿐만이 아니었다.
<대저, 힘이란 무엇인가? 고수라면 사물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아야 하는 법.>
‘……!’
<무거운 검일수록, 빠른 검일수록 위력이 강하니. 나는 이를 무게와 속력으로 체계화하였다. 특히 무게보다 속력이 더욱 중요하며…>
‘고작 무공 구결이라 부를 것이 아니로구나!’
단순히 칼 휘두르는 법이 적힌 책이 아니었다.
물리 현상에 대한 분석부터, 하늘과 땅에 대한 고찰은 물론 별의 움직임까지.
심지어 인간에 대한 철학까지 담겨있으니.
말 그대로 무학(武學)!
심오한 학문 체계였다.
놀라운 점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르르…!
문장을 읽는 사이, 앞의 단락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미처 다 읽지도 못했는데, 없어진다고?’
‘천하의 보물을 눈앞에서 잃다니!’
‘선조시여, 어찌 저희에게! 크흐흑. 이럴 수는 없습니다!’
연가의 후손이 보았다면, 절망에 차서 외쳤으리라.
하지만 이는 단순히 심술이 아니었다.
-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 지은 집은 쉽게 허물어지는 법! 아래층을 다지기 전에는 결코 위층에 이르지 못하리라.
유운은 연자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자격을 갖춘 자만이 진결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로구나.’
천하를 논하는 절대 무공이다.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접근했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져서 몸을 헤치고 말 터였다.
<내가 남긴 지식을 수습하는데, 아득히 오랜 세월이 걸리리라. 분명 고통스러울 것이다.>
연자후가 안쓰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약속한다. 그 열매는 달콤할 것이니. 후인은 부디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차근차근 익히고 배워야 할 것이다.>
구결에서 연자후의 의지가 느껴졌다.
앞의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뒤로 가지 못하리라!
이는 연자후의 배려이자 시험이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방대한 이론을 익히는 데만 십수 년이 걸릴 테니.
유운은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의선께서 남기신 가르침이 헛되지 않았구나.’
이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족히 이십 년은 걸릴 것이다!
만수신의가 그리 장담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불꽃 같은 일주일이었지.’
먹을 것도 잠도 잊었다 하지만 고작 일주일.
그 짧은 시간에 방대한 지식을 수습했다.
거기에 명안명심법까지 더욱 익숙해졌으니.
촤르르…!
글자가 강물처럼 흘러내려 왔지만, 유운은 능숙한 사공이 되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하지만 아무리 강이 길어도 끝이 있기 마련.
유운은 어느덧 구결의 마지막에 다다랐다.
<…이에 내 최후 심득을 남기니, 바로 ‘검으로 세상을 베는 법’이다.>
‘심검지경을 논하시려는 거구나!’
유운의 눈이 번쩍 떠졌다.
<가르침에 목마른 후학이여, 내가 묻노니 대답해 보거라. 나는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나도, 세상도 정말로 있다고 확신하는가?>
‘……!’
<고대의 깨달은 자가 말하길, 세상 만물은 마음이 만들어낸다(一切唯心造)고 하였다. 나의 깨달음 역시 그와 같으니. 마음이 없다면, 세상 역시 없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다.
‘나도…세상도 없다고?’
나는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는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자후는 달랐다.
오직 인간을 중심으로, 정확히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의식을 움직일 수 있다면, 세상 역시 움직일 수 있으니…>
유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실로 심오한 깨달음이로구나!’
깊은 바닷속, 어두컴컴한 해구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자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까마득한 이치였다.
하지만 유운은 달랐다.
명안명심법이 활성화되면서, 생각의 강물이 더욱 빠르고 크게 흘렀다.
거기에 본래 가진 바 재능조차 깨어나는 순간.
고오오…!
정수리의 백회혈을 통해 하늘의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유운의 의식이 깊어지고, 영혼이 확장했다.
‘이것이로구나. 이것이 무공이구나!’
그동안 배웠던 초식과 이론이 회오리쳤다.
머릿속에 수많은 촛불이 동시에 켜졌다.
유운의 얼굴에 서기가 감돌았다.
- 천문(天門)이 열렸구나!
종남일패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일생에 한 번 오기도 쉽지 않다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십 년간 정체되어있던 경지가 갑자기 오르기도 하고,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무공을 창시하기도 했다.
- 쉿. 조용히 하게!
매화검선의 말에 종남일패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유운의 상태는 부서지기 직전의 유리와 같았다.
오색 빛을 뿜으며 찬란하게 빛나지만….
와장창!
아주 작은 자극에도 부서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숨조차 쉬지 않고 유운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