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실타래를 풀어내다 (5)
연씨 일가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객잔의 창문 너머로 흥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꽃 배로 엽하를 한 바퀴 돌고, 비무대에서 비무를 구경하고, 추억을 그림으로 남기는 게 두 분의 추억을 그림으로 남기세요! 멋들어진 시조와 이야기꾼의 만담까지 포함하여 단돈 열 냥!”
“말린 단감에 돼지고기, 그리고 특제 양념을 발라 만든 간식입니다. 오직 서촌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입니다!”
새로운 볼거리에 연백경이 몸을 들썩였다.
“엽하가 그렇게 예쁘다던데. 와, 저건 맛일지 궁금하지 않아, 누나?”
서촌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구경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했다.
연백경은 튀어 나가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누나, 저 화공 좀 봐, 손이 안 보여. 와, 어떻게 한 거지? 누나, 방금 봤어? 검이 입안으로 사라지는데….”
“어찌 한시도 입을 쉬지 않는 것이더냐? 골이 울릴 지경이로구나.”
연백경의 말에 연백련이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연백경은 히죽 웃으면서 검집을 가리켰다.
“진짜 싫었으면 진작에 내 머리통에 불이 났겠지. 누나도 사실은 간만의 외유가 좋은 거지? 후후.”
“휴우. 언제 철이 들려는지.”
“내 몫까지 누나가 들면 되지. 나는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 거라고.”
“연가의 법도는 그러하지 않다. 장손으로서 어찌….”
두 오누이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에 연제승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들은 수다스럽고 경망 되고, 딸은 진중하고 과묵하니 이는 천하의 법도에 어긋납니다.”
“엄격한 훈육으로 이 둘의 성품을 바꾸어야 합니다, 가주.”
가문 내에서 그리 주장하는 원로도 있었다.
하지만 연제승은 그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란 뒤에서 조용히 보살피는 자이지, 앞에서 억지로 잡아끄는 자가 아니오.”
“본인같이 불민한 자가 어찌 아이들의 창창한 미래를 막겠소?”
연제승은 지금 모습 그대로 둘을 사랑했다.
그랬기에,
연가쌍보(延家雙寶).
두 아이는 연가의, 그리고 연제승의 보물로 불렸다.
그렇게 구경하고 수다를 떠는 것도 잠시.
“으아! 나가고 싶은데 못 나가고. 심심해 죽겠네.”
툴툴거리던 연백경이 탁자 위에 쌓인 잔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휘리릭. 탁!
한번 손을 놀릴 때마다 잔들은 높다란 탑이 되기도 했고, 네모난 마차가 되기도 했다.
어찌나 변화가 빠른지, 사기도박을 하는 도수처럼 손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린 친구가 손재간이 제법이구만!”
곁눈질하던 주변 사람들이 조그맣게 감탄하던 때였다.
연백경은 잔으로 조그마한 비무대를 만들더니, 양손에 젓가락을 하나씩 잡아들었다.
“아, 심심해. 심심하다고!”
채쟁, 챙챙!
두 개의 젓가락이 마치 살아있는 검인 양 자유롭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오…! 한 손으로 횡천소군을, 다른 손으로 태산압정을?”
“양손이 서로 각기 다른 초식을 쓴다니! 참으로 놀랍구나!”
지켜보던 무인 몇몇이 진심으로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대단한 초식도 아니거늘. 저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오?”
“못 믿겠으면 자네도 한 번 해보게.”
못마땅한 듯 보던 상인이 시도해보았지만, 처음부터 손가락이 꼬여버렸다.
“보, 보기보다 쉽지 않구려.”
“사람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니, 오죽 어렵겠는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일세. 특별한 심공을 익혔거나….”
“익혔거나?”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소리지. 그것도 천하에 보기 드문.”
“……!
무인은 탁자를 가리키며 눈을 빛냈다.
연백경의 두 손은 각기 다른 무공을 익힌 검객이 되어 살아 움직였다.
사람들이 조금씩 탁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호오. 저 검술은 어딘가 눈에 익은데?”
“유운 공자와 적 대주의 무공이로구만!”
사람들의 관심에 연백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허어. 봐도 봐도 놀랍구만. 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소협?”
“마음을 둘로 나눈다는 전설의 무공이라도 배운 것인가?”
“후후후.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뭘.”
당연히 분심공 따위 배운 바도 없다.
“몸으로 하는 건 다 그냥 돼요.”
“그냥 된다고?”
“네. 될 거 같다는 느낌이 들면, 되더라구요.”
“아아…! 실로 놀라운 자질이로구나.”
지켜보던 늙은 무인이 길게 탄식했다.
마음 가는 데로 움직이는 몸, 어떤 무공이든 빠르게 흡수하는 육체.
평생 갖길 원했던 재능이었다.
한창 연백경이 재주를 뽐내고 있을 때였다.
탁.
하얀 손가락이 젓가락 사이에 끼어들었다.
“연가의 혈통이 어찌 이리 경망스럽단 말이냐?”
고운 손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오오…! 미인도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미녀로구나!”
“내 생전 저 소저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보네!”
“근래 찾아온 명가의 여식들은 비교도 안 되는구만.”
뒤늦게 연백련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입술은 단아하면서 붉고, 얼굴은 창백한듯하면서도 하얗니, 실로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두 사람 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심심풀이도 되고 무공 수련도 되고. 일석이조 아니야?”
연백경이 히죽 웃자, 연백련이 눈살을 찌푸리며 젓가락 하나를 들었다.
“이왕 수련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정도면 잘 하지 않았어? 시장통에서 본 그림대로 한 건데.”
연백경의 말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수군거렸다.
“허어, 고작 그림을 본 것만으로 무공의 특징을 흉내 낼 수 있단 말인가?”
“실로 놀라운 재능이로구나.”
하지만 연백련은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족하다.”
“어디가?”
“비무를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전해진 이야기를 통해 짐작건대…두 사람의 무공은 이러할 것이다.”
휘리릭.
연백련이 젓가락을 허공에 두 번 휘둘렀다.
한번은 부드러운 연꽃, 한번은 성난 늑대와 같았다.
“확실히 이게 더 어울리네. 역시 누나야!”
누나의 지적에 동생이 곧바로 손을 놀렸다.
스르르…!
파앙…!
두 젓가락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담백했던 이전과 달리 각각 독특한 기세를 드러냈다.
“나아졌으나 아직 부족하다.”
“이번엔 뭐가?”
“적 대주의 신장이 훨씬 더 크고, 병기 역시 기다란 대도. 사정거리와 성향을 고려하면, 필시 이런 식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두 남매가 즉석에서 토론하면서, 보지도 못한 비무를 재현했다.
젓가락의 움직임이 어찌나 교묘한지, 유운과 적인걸이 치열하게 겨루는 것만 같았다.
“젊은 친구들의 실력이 실로 뛰어나네, 그려.”
“내가 비무를 본 적 있는데, 느낌이 놀랍도록 비슷해.”
“선남선녀가 검무를 추니, 실로 볼만한 구경거리일세, 껄껄껄!”
상인들은 기분 좋은 얼굴로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무인들은 달랐다.
“아아아…겨우 나무젓가락으로 검의(劍意)를 드러내다니.”
“실로 놀라운 자질과 오성이로구나.”
남매를 훔쳐보는 시선에는 선망과 질투가 뒤섞여있었다.
연제승은 그 광경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나는 늦었지만, 너희들만은…!’
연백경은 무슨 무공이든 재현할 수 있는 육체를, 연백련은 무공의 참뜻을 이해하는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그가 자존심을 버리고 무공을 구하기 위해 천하를 전전하는 이유였다.
“다 망한 연가에 보물이 두 개 있다더니 저들이었군.”
“연씨의 가세가 기울어 앞날이 어둡다더니,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
감탄도 잠시, 무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하지만 아쉽구나. 하필이면 연가라니.”
“이를 말인가. 연가가 아닌 다른 명가에서 태어났다면….”
남매가 펼치는 무공은 결국 삼류 무공 혹은 흉내 내기.
진정한 상승 무공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지켜보던 연제승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못난 아비라 미안하구나.’
연가의 상승 무공은 물론 쓸만한 무공조차 다 사라지고, 기초 무공만 남았다.
물론 연가 수련검은 뛰어난 기초 무공이었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선조시여, 땅을 잘 고르고 다지라는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땅에 심을 꽃씨와 묘목입니다!’
아무리 수련해도 검강은커녕 검기조차 이끌어내지 못했다.
검기 없이는 기껏해야 삼류, 잘해야 이류 고수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만약 선조의 검술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연제승은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비류연검은 환검술의 정화이니, 천하의 고수들도 그 검로를 쫓지 못하며.
대성하면 강을 이루어 무엇이든 부술 수 있으니.
천하의 어떤 검법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강기지경이라니…!’
연제승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강기라면 정식으로 백리세가의 종가가 되고도 남는다.
‘제일 종가도 꿈이 아니지. 어쩌면 그 이상까지도…!’
명가를 넘어선 명가.
천하백가(天下百家)!
천하육주를 지배하는 절대 가문이니.
이름과 달리 채 서른 개도 되지 않는 영광된 이름이었다.
‘아서라, 아서. 날기는커녕 걷지도 못하는 자가 어찌….’
연제승은 망념을 떨쳐내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드시 비류연검이 아니라도 좋아. 그 아래의 무공만 되어도….’
이름만 전해지는 다른 상승무공만 있어도 충분하다.
‘검기지경까지 가는 길만 열어도, 그 이상을 해낼 테니.’
결코 자식이라서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보았기에 누구보다 그들의 재능을 확신했다.
그랬기에 더욱 목이 말랐다.
‘유운 공자…!’
재물, 권력, 명예 때문에?
아니었다.
그의 바람은 오직 하나.
아이들의 밝은 미래!
이를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유운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연제승은 간절한 눈으로 만서각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버님, 또 공자에 대해 생각을 하시는군요.”
대련을 끝낸 연백련이 고운 눈썹을 살포시 찌푸렸다.
“가문의 부흥을 어찌 외인에게 맡기십니까?”
“백리의 종가인 우리가 어찌 외인이겠느냐? 누구보다 깊은 인연으로 맺어졌거늘.”
연백련이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연이라. 그런 듣기 좋은 말을 하던 자들은 대체 어디 갔습니까?”
연백련의 말에 연제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때 인연을 운운하며 그의 곁에 남아있던 자들이 있었다.
얼마 안 남은 땅과 재물까지 잃자, 모두 냉정하게 등 돌리고 떠나갔다.
‘쌓아온 세월과 정이 있거늘.’
연제승이 한숨을 쉬자, 연백련이 단호하게 말했다.
“작은 이익과 권력 앞에서 돌변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연씨 외 누구도 믿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백리세가는 천하의 명문이다. 결코,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명문이라. 직접 겪으신 명문이 과연 그러했습니까?”
“그, 그것은….”
연제승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