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73화 (50/114)

제73화

실타래를 풀어내다 (6)

연씨가 자리 잡은 갈림촌에도 주인이 있었다.

숭양문.

거창한 이름과 달리 백리세가의 종가, 정확히는 종가인 마씨세가의 방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갈림촌 내에서는 절대 권력자였다.

“흉년이라. 다 같이 백성을 구제해야지 않겠소?”

“쯧쯧. 제방이 낡았구려. 홍수를 막으려면 미리 고쳐야지. 수리비가 필요하지 않겠소?”

그럴싸한 명분으로 부담금을 매겨 가산을 빼앗아갔으니.

연씨가 망한 것에는 가주보다도 이들의 탓이 더 컸다.

“눈 뜨고 있는데 코 베가도 외면하는 세상입니다. 오래전 약속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네가 몰라서 그런다. 유운 공자만은 다르다. 그분만은….”

“명문이 사람으로 보는 것은 같은 명문뿐입니다. 부디 속으시면 안 됩니다, 아버님.”

“련아야….”

연제승은 냉소적으로 말하는 딸을 바로 보지 못했다.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야, 내가.’

어릴 때의 연백련은 표정이 다채롭고 풍부한 아이였다.

하지만 비상한 기억력이 문제였다.

“백성을 위하는 일이거늘 재물을 숨기다니!”

“이, 이 패물은 죽은 아내가 남긴 것이오, 장 조장. 부디…!”

“내가 알 바 아니지. 얘들아, 뭐하냐? 어서 들어 옮기지 않고!”

챙그랑!

연제승은 사내로서 가주로서 온갖 굴욕을 당했고, 어린 연백련은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저 무표정한 얼굴은, 결국 여린 마음을 지키기 위한 방패였다.

“명성 따위에 현혹되시면 안 됩니다. 유운 공자를 믿으면 안 됩니다.”

“크하하하! 말 한번 잘했다. 유운, 그 망할 녀석을 믿으면 안 되지!”

연백련의 말에 끝나자마자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휴. 이게 무슨 썩은 내야?”

“뒷간을 가도 이보다는 낫겠구만.”

지독한 악취에 사람들이 코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사내는 주변에 개의치 않고 성큼 다가왔다.

“저 악종이 다시 왔구만.”

“형 믿고 행패 부리더니 꼴 좋구만.”

“쯧쯧. 자기 형이 망한 것을 보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쥐상 상인 탁흠의 동생, 탁귀였다.

호화로운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며 처자들을 희롱하였으나, 모두 형이 몰락할 때까지의 이야기.

지금은 거지보다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공자가 무서워서 감히 만서각 주변으로는 다가가지도 못한다지?”

“그러면서도 뭐 얻어먹을 거 없나 하고 여길 떠나지도 못하니. 진드기가 따로 없구먼.”

“클클. 성실하게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탁귀는 사람들의 비웃음에 이를 악물었다.

‘네 이놈들, 반드시 복수하리라!’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했던가.

‘땅을 일구거나, 봇짐을 지라고? 그래서야 어느 세월에 성공하겠느냐?“

탁귀는 형의 성공 방법을 떠올렸다.

땅. 그리고 여자!

‘자본 없이 하기에 여자 장사만 한 것이 없지…. 옳거니!’

탁귀는 연백련을 발견하고 눈을 번뜩였다.

“흐음…나쁘지 않아. 암, 고전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지. 좋은 수요, 연 가주.”

탁귀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연제승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오?”

“나는 알아. 내 눈은 못 속이지.”

탁귀가 꼬질꼬질한 손으로 탁자 위 술잔에 손을 댔다.

“솔직히 말하게. 그림은 핑계. 진짜는 딸 팔아서 출세하려는 거 아닌가?”

탁귀의 빈정거림에 어지간한 연제승조차 화가 났다.

“말씀을 삼가시오!”

혹시나 말이 돌까 봐 일부러 공자를 보는 자리에는 데려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런 모욕이라니?

“심하기는. 다 아는 처지에. 킥킥. 어디 한 번 가격을 계산해볼까.”

“뭐, 뭐요?”

“오호라! 물건이 이 정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축하하오, 연 가주. 나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소. 크흐흐.”

탁귀가 음흉한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연가가 금덩이를 숨기고 있을 줄이야!’

탁귀는 쾌재를 부르며, 연백련의 위아래를 훑었다.

여느 여인이었다면, 질색하며 비명을 지르거나, 눈살을 찌푸렸을 터.

하지만 연백련은 차가운 눈으로 마주 볼 뿐이었다.

무표정. 그리고 무관심.

상대에게 묘한 반발심을 불러일으키는 태도였다.

‘오히려 더 좋구나.’

탁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강자, 특히 권력을 쥔 사내의 속성을 잘 안다.

이미 부와 권력, 명예까지 다 가진 자들이다.

어지간한 미녀의 교태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녀는 달랐다.

‘가질 수 없는 것일수록 더욱 귀한 법이지.’

덩치가 두 배는 되는 사내가 압박하는데도 주눅 들지 않는다.

아니 숫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고고함. 차가움. 약간의 멸시.

그것은 타고난 품성이었다.

‘꺾이지 않는 꽃이라.’

오만한 사내들이 이 여인을 보면 어찌 반응할까 생각하니, 입안에 침이 고일 지경이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기회야!’

탁흠이 유운에게 사기를 시도한 날, 탁귀의 인생은 끝장이 났다.

그런데 뜻밖의 곳에서 황금 동아줄을 발견했다.

문제는 아직 어린 나이.

‘흥, 나이 따위 알 게 뭐야.’

화장만 잘 고치면 열 살쯤 더 들어 보이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연 가주, 어서 넘기시오. 내 값은 잘 쳐 드리리다.”

“이, 이…무도한 자가 감히!”

연제승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말조차 더듬을 지경이었다.

탁귀는 피식 웃더니, 소녀와 직접 흥정했다.

“내 말을 나쁘게 생각할 것 없다. 눈 딱 한 번만 감으면 된다. 가문도 일으켜 세우고, 너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일석이조가 아니겠느냐?”

탁귀가 뻔뻔한 얼굴로 입술 입술을 핥았다.

“백주에 사람을 산다고 말하다니.”

“천하에 망조가 들었구나, 망조가!”

지켜보던 중인들이 기가 막혀서 혀를 찰 정도였으니, 가족은 어떠했겠는가?

“네, 네 이놈이…!”

연제승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질을 할 때였다.

채애앵!

“감히 누님에게 더러운 입을 놀리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연백경이 벌떡 일어서서 칼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탁귀가 누군가?

흉험한 상계에서 구를 만큼 구른 능구렁이였다.

“꼬맹이가 꼴에 무인이라고. 낄낄. 강아지 한 마리라도 죽여본 적은 있느냐?”

“무, 물론이지. 나는 연가의 후손이며, 당당한 무인이야.”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쑤셔 보거라. 내 피하지 않으마.”

탁귀는 임산부처럼 부른 배를 내밀었다.

“하라면 못할 줄 알아?”

“하아암. 자칭 무인은 어디 갔나? 지겹구나.”

“이익. 이이익!”

연백경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무가의 자손이라도 고작 열두어 살.

사람은커녕 개조차 베어본 적 없었다.

“껄껄껄. 사내라는 놈이. 검은커녕 주판조차 못 잡을 녀석이로구나.”

탁귀는 한껏 비웃은 후, 연백련을 곁눈질하다 움찔했다.

‘무슨 여인의 눈이….’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도자기 인형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대인께서 하신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요. 고래로부터 정략결혼은 세를 확장하는 주된 방법의 하나였으니.”

의외로 연백련의 입에서는 긍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호오. 네가 뭘 좀 아는구나.”

“하나 방법이 틀렸습니다. 연가를 모욕하다니요? 무림인으로서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너희에게 사과라도 하라는 말이냐? 이 탁귀가?”

탁귀는 싸구려 백주를 들이키며 비웃었다.

“사과라. 딱 하나 방법이 있긴 하지, 흐흐흐.”

탁귀가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입술을 뒤틀었다.

“내기를 하나 하자.”

“……?”

“나를 여기서 물러나게 하면 내 무릎을 꿇고 사과하마. 바로 여기를 찔러서 말이다.”

탁귀가 배를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저저저…! 염치없는 자로구나.”

“어린 여자아이에게 저리 가혹한 조건을 걸다니!”

고작 소의 목을 치는 일만 해도 벌벌 떠는 이들 천지인데, 사람을?

도저히 소녀에게 요구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배를 끝까지 찌르면 된다라. 조건은 그것뿐입니까?”

“물론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대신….”

탁귀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연백련의 몸을 훑었다.

“끝까지 나를 물러나게 못 한다면, 너를 파는 조건이다. 어떠냐?”

“좋습니다.”

스르릉.

연백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았다.

연백경과 달리 검을 잡은 손에는 한치의 떨림도 없었다.

‘크크크. 제법 독해 보인다만. 그래봤자 꼬맹이지.’

탁귀는 어서 찌르라는 듯 배를 앞으로 내밀었다.

달리 믿는 바도 있었다.

뱃속에 숨겨진 것은 살 따위가 아니었다.

가죽 갑옷, 그것도 값비싼 소가죽을 덧댄 호신갑이었다.

“가겠습니다.”

연백련이 검을 들더니 서서히 앞으로 내밀었다.

스르륵…

검은 가볍게 옷자락을 가르며 복부를 파고들었다.

잘린 옷 사이로 무두질 된 가죽이 드러났다.

“크크크. 날도 제대로 서지 않은 수련검이라니.”

탁귀는 연백련의 검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호신갑은 진검도 서너 번은 막을 수 있는 물건.

망한 와중에도 끝까지 내놓지 않는 덴 이유가 있었다.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나. 그런 싸구려 검으로는 결코 나의 호신갑을 벨 수 없는…어엇?”

탁귀가 자신만만하게 외칠 때였다.

스르륵.

놀랍게도 검이 호신갑을 가르기 시작했다.

“저, 저것 좀 보게.”

“가죽 갑옷이 베인다고?”

“어, 어떻게?”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웅성거렸다.

“자세히 보게!”

검 끝에 희미하지만 회색빛 안개가 어려있었다.

“설마 검기라고?”

“저토록 어린 나이에? 말도 안 되네.”

사람들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탁귀의 생각 역시 같았다.

‘절대 검기일 리 없어.’

무엇보다 저 아이가 검기지경의 고수였다면, 연씨 가문이 망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힘겹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검이 가죽을 갈라왔다.

“보, 보기보다 제법이구나.”

말과는 달리 탁귀의 얼굴은 창백했다.

또르륵.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느덧 가죽의 절반이 베어졌다.

‘어떻게 발견한 물건인데. 놓칠 수 없어.’

탁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차피 갈 데까지 간 인생, 더는 잃을 것도 없다.

게다가 상대는 고작 어린 소녀.

‘감히 사람을 해할 용기가 있을 리 없어.’

그렇게 되뇌며 버텼지만…

스르륵.

천처럼 얇아진 가죽 너머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배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허장성세에 속을 것 같으냐? 나 탁귀야, 탁귀. 고작 여자아이에게 밀릴 것 같아?”

탁귀가 발작하듯 외치며 노려볼 때였다.

‘무, 무슨 눈이….’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이 자신을 비춘다.

망설임. 두려움. 갈등.

그 안에는 탁귀가 기대하던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탁귀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며 눈을 돌렸다.

‘고작 어린 여자아이 때문에 긴장했다고? 이 탁귀가?’

탁귀는 본능적으로 서문요란을 떠올렸다.

여인이기 이전에 상인.

상인이기 이전에 권력자!

날 때부터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이니.

서문요란은 누구보다 오만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연백련은 그녀와는 결이 달랐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대인.”

고저 없는 낮은 목소리.

북해처럼 차갑고, 짐승처럼 흉포한 눈.

여인이기 이전에 무인.

무인이기 이전에 사냥꾼이었다.

부우욱.

마침내 호신갑이 모두 갈라지고, 살을 저미는 냉기가 느껴졌다.

‘이, 이건 진짜야!’

벼락에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면서,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주, 죽는다고? 내가? 여기서?’

검이 살가죽에 닿는 순간 깨달았다.

잃을 것이 아직 하나 남아있었다.

“아, 안돼! 목숨만은…사, 살려줘!”

탁귀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비명을 질렀다.

“죽기 싫어! 아아악!”

탁귀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다 뒤로 벌렁 자빠졌다.

주르륵.

배에 설핏 피가 흘러내렸다.

연백련이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걸음 다가왔다.

“으아아아아! 저리 가! 으아악!”

탁귀는 괴성을 지르더니 객잔 밖으로 도망쳤다.

그것도 개처럼 네발로 기어나갔으니.

“우와아아아!”

“되지도 않는 욕심을 부리더니 꼴좋구나!”

“개장수를 만난 똥개로구나, 껄껄껄!”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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