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74화 (51/114)

제74화

실타래를 풀어내다 (7)

망한 후에도 또다시 못된 짓을 하려고 했으니, 탁귀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봤어요? 이게 연가의 보물! 바로 우리 누나라구요. 후후후!”

연백경이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성질은 더럽지만, 실력만은 남부럽지 않은….”

따악!

“아악, 내 머리!”

연백경이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뒤를 노려보았다.

검집을 든 연백련이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연가의 핏줄이 어찌 이리 경망 되단 말이냐.”

“칭찬해줘도 난리야. 이러다 머리 나빠지면 누나가 책임질 거야?”

“더 나빠질 머리가 있느냐?”

“이익. 이게…!”

“말은 무겁게, 행동은 신중하게!”

따악!

“아악! 이잇, 나도 못 참아!”

우당탕!

아웅다웅하는 남매를 보며 연제승이 흐뭇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개와 고양이 저리 가라로구나.”

“천생 오누이가 맞구만 맞아.”

사람들 역시 크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가슴이 뻥 뚫리는 광경이었네.”

“술안주가 따로 필요 없네 그려, 하하하”

“돈 주고도 못 볼 통쾌한 장면이었지!”

그 와중에 몇몇 사람이 눈을 빛냈다.

“가만. 돈 주고도 못 본다고? 돈을 주면 볼 수 있어야지.”

화공 몇몇이 화구를 꺼내 들더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무림 여협이 휘두르는 검에 기어서 도망치는 악당이라. 이거 갑자기 영감이 샘솟는구만!”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몇몇 학사는 식탁보에 글을 써 내려갔다.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오고 가는 술잔.

주루는 순식간에 잔칫날이 되었다.

무림인들은 특히 연백련의 무공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가죽 갑옷을 저리 베다니. 검기임이 분명하네.”

“저토록 어린 나이에 검기라니. 명가에도 드물거늘!”

몇몇 젊은 무인이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그러자 늙은 무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진정한 검기는 아니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사? 분명 가죽을…”

“응집한 진기가 옅고 흐릿하니, 바싹 근접했을지언정 완전한 검기는 아닐세. 그랬기에 베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지.”

“아….”

노인의 단호한 말에 젊은이들이 실망의 탄식을 토해냈다.

“그랬기에 더욱 대단한 걸세.”

“……?”

의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본디 무공이 가진 한계는 명확한 법. 게다가 저토록 어린 나이에 저런 경지라니.”

“……!”

“명문대파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면, 천하에 이름을 날린 고수가 되었을 터인데.”

노인이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저 소저의 재능이 그 정도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고말고. 천하육주(天下六州)의 이름난 기재들과 비교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네. 아니 넘치지.”

표사 시절, 천하 각지 안 가본 곳이 없는 사내다.

노인의 말에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육주의 기재들이라.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껄껄. 직접보다 뿐인가?”

“어서 이야기해주십시오, 노사.”

노인은 은근슬쩍 술잔을 만지작거리자, 젊은이들이 재빨리 잔을 채웠다.

백리팔수부터 신흥백대무인, 칠룡삼봉까지.

천하를 울리는 또래의 이야기에 젊은이들 또한 들뜬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기재라….”

호기심 많은 젊은이가 눈을 반짝였다.

가까운 곳에도 그가 아는 기재가 하나 있었다.

“유운 공자와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

“……!”

갑자기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생각보다 큰 파문에 움찔한 것도 잠시.

젊은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연 소저와 비교해서. 아니 천하육주의 최고 기재들과 비교해서 말입니다.”

젊은이의 질문에 노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노사께서 기분이 상하신 걸까?”

“쯧쯧. 너무 무례한 질문이었어.”

사람들이 나지막이 속삭일 때였다.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들이 적 대주를 일컬어 굶주린 늑대라 칭하고는 했지.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네.”

“……?”

“강기지경의 고수를 어찌 고작 늑대라 부르겠나?”

강철 갑옷도 방패도 강기를 막을 수 없다.

오죽하면 무적지경이라 불릴까?

“그는 늑대의 탈을 쓴 호랑이. 그것도 비할 바 없이 흉포함을 숨기고 있는, 대호였네.”

“……!”

“그런데 약관, 아니 그조차 되지 않은 공자께서 그런 무인을 베어냈으니.”

“……!”

“한낱 개미가 어찌 용이 어디까지 오를지 가늠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제야 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들어본 적도, 짐작할 수도 없는 재능이니.

측량 불가!

감히 평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아아…!”

“실로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노사.”

사람들은 참아왔던 감탄사를 터트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재능을 어디에 쓰는가가 아니겠는가?”

“그렇지요.”

“옳습니다!”

노인의 말에 여기저기서 호응해왔다.

“자네들 그거 아는가? 바쁘신 와중에도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신다네.”

“아이들뿐인가. 까막눈인 나도 공자 덕분에 글을 깨우쳤다네.”

“공자께서야 작은 일이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그게 어찌 작은 일이겠나?”

촌구석 무지렁이가 번듯한 학사가 될 수도 있으니.

누군가에게는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기회였다.

“공자께서 호각대원들과 함께 무너진 집수리 해주신 거 아나?”

“한번은 말일세 우리 아이가 아팠는데….”

사람들이 앞다투어 유운과 관련된 이야기를 쏟아냈다.

“공자께서 의원만 못하다고 겸손해하시지만, 그분의 실력을 어찌 평범한 의원 따위가 따라오겠는가?”

“어? 자네도 치료를 받았나? 그런데 왜 나는 몰랐지?”

“그, 그게 다소 부끄러운 병이라.”

친구의 물음에 뚱뚱한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뭔데?”

“옻이 옮았네.”

“쯧쯧. 그러게 옻나무 있다고 조심하라 하지 않았나. 근데 어디에 옮았기에 그러나?”

“어, 엉덩이에.”

“엉덩이?”

“으하하!”

사람들은 처음에는 재밌다는 듯 웃었지만,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만. 옻이면 진물 오르고 지저분할 터인데.”

“게다가 옮을 수도 있거늘….”

“아아아…!”

명문의 자손이자 고고한 학사이거늘.

오물을 마다치 않고 직접 치료하다니?

사람들이 감동한 표정으로 만서각 방향을 우러러보았다.

“나도 할 말이 있다네.”

비쩍 마른 사내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무리해서 일하다 허리를 다치고, 아이들이 굶주리는 ‘평범한’ 이야기.

하지만 결말이 조금 달랐다.

“유운 공자님께서 쌀을 주시고, 상단에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셨단 말인가?

“과연 공자님일세!”

“그런데 왜 우리는 몰랐지?”

사람들의 질문에 사내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리지 말라 하셨네.”

“왜?”

“그러고 보니 곽 씨네 아이가 넷이 아닌가.”

“아아…!”

“혹여 아이들의 마음이 다칠까 배려하신 게로구먼!”

“어린 나이에 마음 씀씀이가 이리 깊으시다니….”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탄식했다.

그리고 그런 사연은 끊임없이 나왔다.

“허어. 없는 일도 지어내서 알리고, 작은 일은 크게 부풀려 자랑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거늘.”

“그리 도움을 주고도 드러내지 않으시다니.”

닳고 닳은 상인들의 목소리조차 젖어 들었다.

명가의 자손은 물론 자신들조차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진정한 서촌이 보물이 여기 있었군그래.”

“그렇고말고. 으허허!”

끝을 알 수 없는 재능보다 더 가치 있는 보물.

바로 유운의 마음이었다.

주르륵.

탁!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술잔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유운 공자님을 위하여!”

“유운 공자님을 위하여!”

“으하하하!”

흥겨운 웃음소리와 함께 이야기꽃이 피었다.

“조그마한 서촌에 이런 인물이 나오다니.”

“공자께서 어디까지 뻗어 나가실지 기대되지 않나?”

“이를 말인가!”

사람들은 흥분해서 유운의 일을 자기 일처럼 떠들었다.

무표정한 연백련의 얼굴에 한줄기 이채가 어렸다.

‘참으로 신기한 풍경이로구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권력자나 지배층에 거부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무림세가라면 말할 것도 없다.

겉으로는 충성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미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서촌만은 달랐다.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하는 주인이라니?

실로 낯선 풍경이었다.

‘백리유운이라….’

연백련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 * *

어둑해진 늦은 저녁.

북적거리는 주루의 영업도 끝나갔다.

“이제 그만하고 일어나지 그러나?”

“딱 한 잔만 더 하세나. 아직 못 다 푼 보따리가 있다네.”

취객들이 흥겨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 자네도 보았는가?”

“뭘 말일세.”

“지난밤에 말이야, 만서각 쪽에서 커다란 빛을 보았다네.”

“빛이라니?”

“내 생전에 그토록 상서로운 빛은 처음이었네.”

“글쎄. 나는 못 보았는데….”

“혹시 공자께서는 하늘의 신선이 잠시 내려오신 게 아닐까?

“에끼 이 사람아. 아무리 좋아도 적당히 해야지. 과한 칭찬은 공자께 오히려 해가 될 것일세.”

“그런 게 아닌데. 진짜 봤는데…음냐.”

“취했네, 취했어.”

마지막 취객이 친구에 등에 업혀 떠나갔다.

그렇게 조용해질 무렵.

똑똑.

누군가 은밀히 다가와서 객실 문을 두들겼다.

“누구십…허엇. 장 노야가 아니십니까?”

연제승이 놀라서 물었다.

“허허.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연 가주님?”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왜?”

“쉬잇.”

장노가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조용히 나오십시오.”

“……?”

연제승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탄식했다.

‘아…! 공자께서 실패하셨구나.’

연제승 역시 작지만 한 가문의 주인.

전후 사정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세간에 알려지면 큰 망신이겠지.’

연제승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유운이 아니라면 누가 연가에 관심이나 주었겠는가?’

결코 실망감을 내색하지 말자 다짐했다.

‘아쉽게도 이번에 마지막이 되겠구나.’

결심을 마친 연제승이 물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노야.”

“무엇입니까?”

“혹시 저희 아이들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

“인연이 다했으니. 언제 백리의 적통을 다시 만나겠습니까?”

연제승은 장노의 마음이 상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연 가주.”

“감사합니다.”

장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지만, 연제승은 생각에 빠져 보지 못했다.

“어서 가자꾸나, 공자께서 기다리실라.”

“진짜 만서각이라니! 이야기에서 나오는 사람 처음 봐요.”

연백경은 상기된 표정으로 신나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연백련의 표정은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늦은 저녁,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다? 어쩐지 수상하구나.’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혹여라도 섣부른 짓을 한다면?

연백련은 품 넓은 장포 속에 검집을 감추고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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