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실타래를 풀어내다 (8)
두 시진 전, 만서각.
“여쭙기 송구하오나…, 공자님, 정말 족자 안에 일류 무공이 담겨있었습니까?”
장노의 물음에 유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 가주께서는 잘못 알고 계셨습니다.”
“역시 없었군요. 연 가주의 실망이 참으로 크겠습니다.”
장노가 아쉬운 얼굴로 탄식할 때였다.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일류 무공 따위가 아닙니다.”
“…네?”
“족자 안에 담긴 것은 하나의 큰 뜻. 어찌 일류 무공 따위에 비하겠습니까?”
여느 때와 같이 담담한 어조라, 이해가 한 박자 늦었다.
“그, 그 말씀은….”
“연씨의 시조께서 남기신 무공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으니. 감히 하늘을 넘볼 만한 무공이었습니다.”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연가에 큰 복이 내렸군요! 어서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장노가 기뻐서 목소리를 높이자, 유운은 오히려 말을 낮추었다.
“하나 그것이 문제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고로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 하였습니다.”
“……!”
“족자 안에 담긴 무공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으니. 이것이 알려지면, 연씨 일가가 큰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법이지요.”
본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장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유운이 홀로 이익을 취할 사람도 아니다.
장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보물을 전한다 한들,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면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밤낮으로 고생하셨거늘. 힘들게 얻은 결과를 숨긴다는 말씀이십니까?”
“저의 명예 따위가 어찌 한 가족의 안전보다 중요하겠습니까?
“…휴. 그것이 우리 공자님이지요. 알겠습니다, 공자님. 해가 지면 그들을 몰래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장노가 길게 탄식하였다.
“장 노야, 너무 섭섭해 마십시오. 연가에서 오랫동안 찾아오던 무공입니다. 연 가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긴. 그 기쁨이 얼마나 클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 * *
“오늘 행사는 길(吉)보다 흉(凶)이 많을 듯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장노와의 거리가 조금 벌어지자, 연백련이 속삭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연제승이 흠칫하며 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축하드립니다, 연 가주.”
“자, 장 노야! 서, 설마. 그 말씀은?”
연제승의 물음에 장노가 빙그레 웃었다.
“우와, 진짜예요? 우리 가문에도 제대로 된 상승 무공이 생기는 거예요?”
“그럼, 그렇고말고. 하하하, 너희에게 걸맞은 진짜 무공이 생길 거란다!”
그렇게 기쁜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하지만 환호하는 아버지와 동생과 달리 연백련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 말을 진정 믿으십니까? 상승 무공을 그냥 넘겨준다는 말을?”
연제승을 어찌 이리 순진하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쯧쯧, 또 의심병이 도졌네. 호의를 호의로 받을 줄도 알아야지, 누나.”
연백경이 의젓하게 말하며 혀를 찼다.
“그동안 내 말이 틀린 적 있느냐?”
“그건….”
연백경은 멈칫했다.
얼마 안 남은 연가의 재산조차 뜯어먹으려는 사기꾼 천지였다. 누나 덕분에 모두 피해갔다.
“그건 아니지만…유운 공자는 명문의 사람이잖아.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라도 그럴 리가 없어.”
연백경의 말에 연백련이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들의 눈은 지금 어디 있느냐?”
그제야 흠칫하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엉. 부엉.
해는 저문 지 오래.
한적한 밤길에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굳이 늦은 밤에 우리를 불러냈습니다. 그 속셈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네 말이라 하여도 믿기 어렵구나. 유운 공자께서 그러실 리 없다.”
“누나, 그 대단한 백리의 후손이잖아. 솔직히 선조의 무공이 뛰어나봤자, 백리의 무공에 비하겠어?”
유운에 대한 연제승과 연백경의 믿음은 굳건했다.
그렇게 한 식경 후. 연씨 일가가 만서각에 도착했다.
“오래 기다리게 하여 죄송합니다, 가주님.”
“아닙니다, 저희 때문에 고생하셨다 들었습니다.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유운과 연제승이 서로 겸양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우와, 진짜 명가의 핏줄은 생긴 것부터 다르네. 안 그래 누나?”
연백경은 유운을 보며 감탄했다.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학사복은 작은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다.
유운은 그저 빙그레 웃은 후, 연씨 일가를 내부로 안내했다.
연제승이 접객실로 향한 사이, 두 남매는 만서각 내부를 구경했다.
“이렇게 책 많은 곳은 처음 봐. 학사 출신이라더니, 뭔가 운치 있지 않아?”
묵향 가득한 서가와 종이 먹인 창문, 그 사이사이 자리 잡은 분재.
고풍스러운 내부에 연백경이 감탄할 때, 연백련의 시선은 오히려 창밖을 향했다.
“백리유운.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자로구나.”
연백련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나, 아직도 그 소리야?”
“잘 보거라.”
타닥타닥.
희미한 달빛 아래, 화톳불이 연무장을 밝혔다.
갑옷을 입은 수련 인형들이 호위하듯 둘러서 있었다.
팔도 다리도 빛을 먹어 치운 듯 검었다.
“뭘 보라고? 설마 저게 무서운 거야? 큭큭. 누나도 여자….”
“갑옷.”
“갑옷? 그게 뭐…어엇? 저거 설마?”
“묵철이다.”
“……!”
묵철(墨鐵).
소수의 광산에서만 나는 검은 쇠.
일반 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가 높았고, 가격 역시 엄청났다.
아무리 백리세가라도, 한직에 있는 막내 공자가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저 귀한 묵철로 갑옷을 해 입혔다고? 고작 수련 인형에게?”
“고작 인형에 저 정도를 쓴다면, 진짜 무인에게는 무엇을 쥐여주었겠느냐?”
연백경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검소하고, 다툼을 싫어하며, 온화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는 소문과는 다른 자다.”
“하지만 유운 공자는….”
연백경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달리 조금 흔들렸다.
이윽고 대화를 마친 유운과 연제승이 나왔다.
“공자께서 직접 무공을 보여주신다니, 과합니다. 그저 몇 마디 알려주시기만 해도 족하거늘.”
“아닙니다, 백번 설명해도 한번 본 것만 못하지요.”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일행을 연무장으로 안내했다.
널따란 연무장 한복판.
연씨 일가가 보는 가운데, 유운이 검을 들었다.
“연자후 대협께서는 두 가지 무공을 남기셨습니다. 저의 배움이 부족하여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아련히 허공을 보던 유운이 눈을 감았다.
- 녀석, 겸손하기는.
- 네가 아니면 누가 이어받을 수 있었겠느냐?
두루마리 속 두 스승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족자에 담긴 ‘염(念)’만으로 그 경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절대 고수!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연자후는 천하를 논하고도 남을 고수였다.
족자에는 그런 고수의 모든 깨달음이 담겨있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궁리해도 일초반식조차 재현해내지 못하리라.
오직 유운이었기에 이어받을 수 있는 깨달음이었다.
“부족하나마 고인의 무공을 재현하고자 하니….”
유운이 수련검을 들어 올렸다.
“얼마나 얻을지는 오직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꿀꺽.
모두가 마른침을 삼킨 채 유운을 주목했다.
그것은 두루마리 너머의 두 스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 사백 년 전의 손꼽히는 강자라. 기대가 되지 않나?
- 이를 말인가. 오랜만에 눈이 호강하겠어.
두 세상은 신화나 언어, 풍습 등 비슷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역사만은 달랐다.
한 뿌리에서 난 두 그루의 나무처럼, 서로 다르게 흘러갔다.
그렇다면 무공은?
무공은 대체 어떻게 변했단 말인가?
두 신선의 궁금증이 절정에 달할 때.
마침내 유운의 검이 움직였다.
스르륵.
검 끝이 부드럽게 허공을 수놓았다.
미풍(微風).
솜털이나 간질일 수 있을까 싶은 미약한 바람이 일었다.
유운의 검 끝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스르륵.
화공이 붓질하듯 유려하고 매끄러운 움직임.
그 순간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다.
솨아아…!
막 태어난 바람은 자유롭게 세상을 노닐었다.
그러다 하늘거리는 버드나무를 만났다.
키득키득.
장난기라도 돈 것일까.
봄바람이 간지럼을 태우듯 나뭇가지를 스친다.
때로는 장난꾸러기처럼 거침없이.
때로는 여인의 손짓처럼 부드럽게.
차라라…
나뭇가지는 간지럽다는 듯 몸을 흔든다.
나뭇잎은 재밌다는 듯 손뼉을 부딪친다.
그 모습에 봄바람도 더욱 신이 났다.
차라라라…!
차라라라…!
나뭇가지와 나뭇가지가 몸을 부빈다.
나뭇잎과 나뭇잎이 환호성을 지른다.
자유롭게 노니는 바람을 따라, 버드나무가 춤을 춘다.
그것은 한 폭의 산수화.
유운의 검이 그린, 살아있는 자연이었다.
- 무공이 이리도 현묘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 그랬기에 우리가 무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아니겠나, 허허허.
두 신선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운의 비류연검이 이어졌다.
솨아아…!
솨아아…!
나뭇가지와 나뭇잎, 바람이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버드나무가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무한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 허어. 이토록 자유롭고, 무한한 변초라니!
- 실로 깊고도 깊구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숨은 검의(劍意)에 두 신선이 감탄했다.
- 화려한 변화는 본 파의 매화를 닮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은 무당의 태극과 닮았으니…
-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구나!
화산과 종남을 대표하는 두 무인은 한동안 말조차 잊고 무공을 감상했다.
하지만 시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툭.
낭창낭창 휘어지는 버드나무 위.
꽃잎이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
분홍빛 연꽃이 색을 더하니, 산수화가 한층 다채롭게 빛났다.
- 유운, 이 녀석…!
매화검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버드나무를 품은 그림 위에 연꽃을 덧그린다?
매화검선이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연꽃을 그리는 자만이 매화에 이르리니.
연꽃이야말로 육합검법이 품은 진정한 검의로다!
화산의 무인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니 유운의 비류연검에는 육합검법 또한 녹아있다는 뜻이었다.
- 또 다른 화산이 여기에 있구나!
매화검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솨아아…!
유운은 비류연검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몸은 끓는 물에 들어간 듯 뜨거운데, 머리는 도원경에 있는 듯 황홀했다.
‘이것이 진짜 비류연검이로구나! 이것이 조화무궁이로구나!’
유운이 압도적인 고양감에 몸을 떨 때였다.
꿈틀. 꿈틀…
몸속 깊은 곳에서 흔들리더니.
툭!
마침내 새로운 싹을 틔웠다.
‘설마…명문혈(命門穴)?’
배꼽 맞은 편, 척추의 한가운데.
싱그러운 새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번째 단전이 명문일 줄이야.’
본래부터 신장을 이롭게 하고 양기를 북돋는 요혈로, 기가 가장 왕성하게 드나드는 혈 자리였다.
오죽하면 명문, 즉 생명의 문이라 불리겠는가?
그곳에 자리한 단전이 깨어났으니….
‘맙소사. 끝이 없구나!’
대자연의 기가 명문을 타고 끊임없이 안으로 밀려들어 오니.
마치 옭아매던 줄을 끊어낸 야생마가 된 기분이었다.
단지 기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화아악!
유운의 검 위로 뿌연 검기가 어렸다.
얼핏 보면 흐리고 하야니 삼단공, 심백검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들판의 흙탕물과 산속의 샘물을 비교할 수는 없는 법.
유운의 검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맑았다.
- 껄껄껄. 약관도 안된 나이에 검기지경의 끝에 이르다니! 진짜 내 제자지만 말도 안 되는 녀석이로구나!
매화검선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고작 씨앗 두 개를 싹 틔웠을 때도 사단공, 아니 오단공에 견줄만했다.
그런데 세 개라니? 이미 검기지경에서는 적수가 없을 터였다.
- 크하하! 우리 제자가 고작 그뿐이겠나? 실전에서는 강기지경을 찜쪄먹고도 남을걸세!
종남일패가 손가락으로 유운의 검을 가리켰다.
겉으로 보기에는 뿌연 흰색.
하지만 자세히 보면 찬란한 무지갯빛이 어려있으니.
검연(劍緣)!
유운만의 깨달음이 함께 빛나고 있었다.
- 서로 어우러져 더 큰 힘을 낸다라. 볼수록 신기한 묘리일세.
- 흐흐흐. 그러니 높다란 천장을 뛰어넘은 게지. 첫 번째 천장은 물론 어쩌면 두 번째 천장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라!
종남일패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층위(一層位).
검기라는 첫 번째 층을 넘어서, 강기지경에 첫발을 들인 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 언젠가는 그러할 터이나. 아직은 섣부른 말일세.
매화검선은 그리 말하면서도 흐뭇하게 웃었다.
검연이 어둠을 사르고 선명하게 빛나니.
이제 적인걸 정도의 고수도 수월하게 제압할 터였다.
휘리릭. 휘릭!
유운의 검이 산을 그리고, 강을 그린다.
흐드러지게 핀 버드나무가 숲이 된다.
매화를 닮은 연꽃이 피고, 나뭇가지에 내려앉는다.
은은한 무지갯빛이 어린다.
무아지경!
나를 잊고 오직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니.
신비로운 풍경 속에서 오직 유운의 검만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