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76화 (53/114)

제76화

실타래를 풀어내다 (9)

“검술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연제승이 감탄했다.

진정한 도는 경지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모두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하였다.

유운의 검술이 그랬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세필을 놀리는 화공의 손길처럼 정교했으니.

검희(劍姬)의 검무.

유운의 검은 아름다운 여인의 춤사위와 같았다.

“버드나무 가지는 산들바람에도 순응하고, 잎은 시냇물조차 거스르지 않으니….”

연백경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아니 고작 서너 줄만 남은 비류연검의 구결이었다.

휘이잉…!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검 끝이 바람을 타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산수화를 그려냈다.

모든 곳이 자연스럽고, 어느 곳에도 억지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비류연검임이 분명해요!”

“맞다, 맞아. 하하하! 본가에 드리운 어둠이 드디어 걷히는구나!”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연백경.

환희에 찬 얼굴로 외치는 연제승.

비록 들리지는 않으나, 술에 취한 듯 들뜬 두 신선.

모두가 크게 기뻐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의 얼굴만이 어두웠다.

‘좋지 않구나. 매우 좋지 않아….’

무림에서는 보물을 가진 것이 죄가 되는 법.

연백련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말을 삼켰다.

* * *

- 좋구나, 매우 좋아!

유운이 무아지경에서 빠져나올 때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로는 처음 듣는, 그러나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건 설마…연 대협?’

바로 연자후가 남긴 마지막 ‘영혼의 조각’이었다.

비록 작은 조각이지만 생전의 기억과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연자후가 흥분하여 외쳤다.

육합의 묘리, 조화무궁의 묘리, 검연의 묘리.

유운이 펼친 검술은 비류연검이 아니라, 차라리 새로운 검술이라 불러 마땅했다.

- 무인으로서 경탄하고, 또 경탄하노라.

하지만 연자후의 본질은 투사(鬪士).

끊임없이 싸우는 자이니.

죽음 후에도 호승심을 버리지 못했다.

- 너의 무공은 잘 보았다. 이번에는 나의 무공을 보거라!

연자후의 영혼이 유운의 몸을 통해 무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르르…!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가 지워진다.

신비롭던 무지갯빛 역시 사라졌다.

대신 한 떨기 꽃이 버드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이것은…연 대협의 검의(劍意)로구나!’

피처럼 붉은 장미.

그것이야말로 연자후가 품은 검의 심상이었다.

- 마침 나의 후손들이 이 자리에 있다니 하늘이 도우셨구나!

- 남은 혼을 소모해서라도 진실된 비류연검을 보여주리라!

연자후가 아낌없이 힘을 쏟아냈다.

그 순간 연자후는 유운이고, 유운은 연자후였으니.

‘아아아…!’

생전의 깨달음. 경험. 감각.

유운은 그의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연무장 끝, 수련 인형에게로 향했다.

철컹, 철컹.

바람이 불 때마다 거친 금속음이 들렸다.

남방인들의 수련을 위해 특별 제작한 갑옷!

호각대원의 무수한 공격에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음은 물론, 거암조차 움푹 파인 것이 고작인 묵철 갑옷이었다.

그런 불패의 장군 앞에서, 유운이, 연자후가 검을 들어 올렸다.

하늘거리는 검 위로 반투명한 기운이 어렸다.

그 순간,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서, 설마?”

연백련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아닐 거예요, 진짜 아닐 거야.”

그리 말하면서도, 연제승과 연백경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달아올랐다.

얼핏 보면 장미처럼 연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하지만 용암을 처음 본다 하여 그 두려움을 어찌 모르겠는가?

화르르…!

닿기만 하면 모조리 녹여버릴 불꽃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아니, 단지 느낌만이 아니었다.

검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스팟!

유운의 검이 묵철 갑옷을 갈랐다.

“…어?”

“……!”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랐다.

마땅히 들려야 할 충돌음도, 금속성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이내 연씨 일가 모두가 눈을 비볐다.

“어, 없어?”

“아아아…!”

“맙소사…!”

세 사람 모두 입을 떡 벌렸다.

갑옷 한가운데가 아예 사라졌다.

마치 한여름을 만난 눈처럼 녹아내렸다.

쨍그렁…!

뒤늦게 남은 갑옷이 바닥에 부딪히며 굉음을 냈다.

하지만 팔만 남은 그것을 갑옷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토시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마치 이상한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머리가 돌아갔고,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우와아아! 강기예요, 강기! 제가 제대로 본 거 맞죠?”

“그럼 그럼. 으하하하! 선조 님의 무공이 하늘에 닿았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연백경과 연제승이 뛸 듯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연백련의 얼굴은 시체처럼 파리해졌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비류연검은 고작 상승 무공 따위가 아니었다.

변화와 속도, 거기에 파괴력까지 갖춘 최상승 무공.

거기에 강기라니?

“선조시여, 과합니다. 너무 과해요.”

연백련은 불길한 예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가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일까?

달도 가려져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때마침 돌풍까지 불어닥쳤다.

휘이잉…!

화륵.

연무장을 비추던 횃불들이 모두 꺼져버렸다.

빛이 도망치듯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설마. 설마…?’

유운이 검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릴 때, 연백련은 보았다.

새까맣게 변한 눈동자!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쿵!

연백련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 * *

- 과하구나.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하였거늘….

매화검선이 탄식했다.

한층 더 선명해진 검연을 볼 때만 해도 기쁜 마음뿐이었다.

연자후의 강기를 본 순간까지도 그러했다.

강기지경이 대단해봤자 결국 인간계의 무공.

꼬마의 재롱을 보듯 기꺼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유운의 기세가 변했다.

아름다운 버드나무 잎에 포악한 살기가 깃들었다.

실바람도 거스르지 않던 이전과는 달랐다.

콰드득. 콰드득.

유운이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연무장의 연석이 바스라졌다.

고오오…!

유운이 품은 기세조차 달라졌다.

유운의 영혼이 상승 기류를 탄 연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 아니겠지, 아닐 거야.

매화검선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 운이 녀석이 단번에 하늘 높이 날아갈까 봐 그런가? 껄껄. 괜한 걱정을 하는구먼. 자네 또한 잘 알지 않나?

종남일패가 느긋하게 말했다.

강기지경이라고 부르나, 사실 그 안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하나하나가 태산과 같이 높으니.

한 층, 아니 그 십 분의 일을 오르는 일만 해도, 검기지경에서 계단 다섯을 오르는 일보다 더 힘들다.

그런 강지지경을 한 번에 넘어선다?

- 참으로 신선한 개소리로구나, 껄껄!

무림인이라면, 아니 신선이라면 누구나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짓이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다.

콰르르…!

심상 세계 속.

유운의 영혼이 꿈틀거리니, 폭포를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거침없이 하늘을 오른다.

유운이 두 손이 휘두르니, 빛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사위를 덮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높고도 높았다.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지만…

- 오늘 도를 얻으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나니!

무인 연자후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욕망을 위해, 마지막 영혼 조각을 불태웠다.

본래라면 아무리 그리해도 오를 수 없는 길.

하지만 유운의 재능이 뒷받침되었다.

거기에 무엇이든 수용하는 조화무궁선법까지 더해지니.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솨아아아!

땅에서 하늘로.

거꾸로 내리는 비가 막힌 벽을 뚫기 시작했다.

- 위험하다, 위험해!

- 운아, 그만하거라! 이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두 신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것은 몸을 단련시킨다며 쇠몽둥이로 어린아이를 두들기는 짓이었다.

아니, 아예 영혼이라는 집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네!

- 말려야 해!

말로 끝나지 않았다.

우웅. 우웅!

두루마리가 거세게 진동했다.

하지만 이미 유운은 깊게 몰입한 상태.

어떠한 외부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 이이익. 닿지 않아, 젠장!

- 안된다, 얘야. 안 돼!

만약 강기지경이었다면 이리 걱정하지 않았으리라.

유운의 재능과 성품이라면, 어떠한 벽도, 어떠한 고난도 극복해낼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심검지경만은 달랐다.

- 안될 거야. 안될 거야.

- 아무리 운이라도 이것만은…

두 신선은 처음으로 유운의 실패를 바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하지만 하늘은 두 신선의 바람을 외면했다.

쿠르르릉…!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진동!

심상 세계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유운의 영혼이 하늘을 거스르고, 거스르니.

마침내 끝에 도달한 순간.

- 맙소사!

- 이런 미친!

두 신선이 입을 떡 벌렸다.

유운의 영혼이 심상 세계를 가득 채웠다.

심검지경!

달리 무상지경이라 불리는 지고한 경지.

생전의 연자후조차 겨우 발끝만 걸쳤던 경지에 유운이 발을 들였다.

- 아아아…!

우연과 재능, 의지가 뒤얽혀서 만들어낸, 말 그대로 기적!

문제는 연자후가 품은 심상(心象)이었다.

붉다. 시뻘겋다. 뜨겁다.

유운의 시야가, 연자후의 시야가 붉게 물든다.

그것은 연자후조차 차마 글로도 남기지 못한 그 시대의 어둠과 고통.

콰드득.

퍼엉!

손이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을 터트린다.

철철철.

피가 쏟아지고 또 쏟아지니, 무릎까지 차고 넘쳤다.

마수가 사람을, 사람이 사람을, 짐승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였다.

먹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먹이 묻지 않았을 리 없다.

서걱!

서걱!

사람을 벨 때마다 연자후의 영혼에 흉터가 생겼다.

자신도 모르게 어둠 차곡차곡 쌓였다.

끊임없는 죽음과 고통 속에서, 녀석이 나타났다.

심마(心魔)!

생전의 연자후가 극복했다 믿었으나, 사실은 깊은 곳에 숨어있던 녀석.

마침내 그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광, 콰과광!

콰과과광!

심상 세계가 뒤집힌다.

하늘과 땅이 뒤바뀐다.

고작 마음속의 일만은 아니었다.

콰드득.

유운이 걸을 때마다 연무장이 부서져 내렸다.

아니,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강기처럼 부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분해되고, 소멸했다.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덜그럭, 덜그럭.

부스러진 갑옷 조각이 뭉치더니 육신을 빚어냈다.

가루가 되었던 투구가 뭉치더니 검이 되었다.

죽은 자, 아니 애초에 산 적이 없었던 자가 몸을 일으켰다.

태댕, 탱!

우웅, 우웅…!

소름 끼치는 금속성과 함께, 모든 병장기가 허공에 떠올랐다.

이 모든 불가해 뒤에는 단 하나의 의지가 있었다.

암흑 천하를 살아갔던 사내가 남긴, 단 하나의 의지.

[ 필살(必殺) ]

반드시 죽이리라!

하늘을 뒤덮는 해일처럼, 성을 집어삼키는 지진처럼.

그것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앙.

산 자는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의식조차 점점 사라져갔다.

산 자를 죽이리라!

그것은 증오이자 뒤틀림.

그것은 산자의 고통을 즐기는 사악한 마음.

그것은 마(魔)였다.

콰드득. 콰직!

영혼의 끄트머리가 조금 물든.

하찮은 잡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마인이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다.

- 막으리라!

두루마리 너머.

매화검선의 장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지로 빚은 검이 허공에 떠올랐다.

- 가리로다!

검선의 검이 하늘을 날았다. 하지만 이내 가로막히고 말았다.

퉁!

그것은 세계를 나누는 가림막.

그것은 현상을 정의하는 절대 원칙이자 방벽.

그러나.

- 뚫으리라!

검선이 뜻을 담아 외쳤다.

그것은 반석과 같은 의지.

그것은 천년의 세월로도 꺾지 못한 부동심이었으니.

부우우욱!

마침내 검이 보이지 않는 막을 갈랐다.

그리고 검선의 검이 공간을 가르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세계’와 ‘세계’.

‘현상’과 ‘현상’.

수많은 ‘제약’을 뛰어넘어서…

마침내 화산제일검의 의지가 한 세계에 이르노니.

[ 갈(喝)! ]

천둥 같은 소리가 유운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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