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78화 (55/114)

제78화

실타래를 풀어내다 (11)

“…무언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너무 황당한 일을 당해서일까.

유운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연씨 일가는 석상이라도 된 양,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무공을 시연하다 잠시 망아(忘我)에 빠졌습니다. 덕분에 기억이 흐릿합니다. 혹여 제가 실수를 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유운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자, 연씨 일가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죽이려 했으면 이리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다만 그뿐이었다.

여전히 분위기는 차갑고, 딱딱했다.

“휴우. 빨리 가려 하면 오히려 늦는다더니. 제 설명이 부족했나 봅니다, 가주님.”

유운의 말에 연제승이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접객실에서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랜 기간 누구도 풀어내지 못한 비밀이거늘. 대체 어떻게 풀어내셨습니까, 공자?”

“그것은….”

유운이 족자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족자에 그런 사연이…. 하하하, 그랬군요, 그랬어요!”

비천한 신분에 천하제이인이 된 사내.

거기에 가주와 혈연으로 연결되기까지 하다니?

어지간한 종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연!

연제승의 입가에 저절로 자랑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그런 무공이 어째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일까요?”

“연 대협께서는 후손에 대한 걱정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잠금장치를 하신 것 같습니다.”

“……!”

세상에 나를 드러내려는 자는 결코 나의 뜻을 잇지 못하리니.

오직 겸허하게 몸을 낮추고, 백리를 따르는 자만이 진경을 얻으리라.

“사심 없이 겸손한 마음! 오직 그런 마음을 가진 자만이 열 수 있었군요.”

역대 가주 중 세상에 빛나고자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얻지 못했다.

유운이 전한 이야기에 연백경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가 백리의 숨겨진 검이라니. 우와아아! 진짜 멋져요!”

“그랬어, 그랬지. 암가(暗家)! 허허허, 연씨가 암가였어!”

연제승 또한 흥에 겨운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어둠 속에서 백리를 지키는 검.

종가를 능가하는 종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야기였다.

“그럼 이 묵철 인형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공자님?”

연백경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묵철은….”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인형의 뒷면을 보여주었다.

납품자 : 우근.

유운으로 인해 기회를 얻은 상인이었다.

“고작 수련 인형에 값비싼 묵철 갑옷이라니요? 저는 받을 수 없습니다.”

“공자께서 진심을 보여주셨으니, 저 또한 진심으로 화답할 뿐입니다. 공자께서 받지 않으신다면 엽하에 버리는 수밖에요.”

우근과의 일화에 두 사내가 감탄했다.

“상인이면 다 돈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상업에도 의가 있고 도가 있구나!”

연백경과 연제승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다만.

“흐음, 그런 이야기였군요. 알겠습니다.”

연백련은 알듯 모를듯한 미소만 띨 뿐이었다.

“오해가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유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품에 손을 넣었다.

“여기. 받으십시오, 가주님.”

“이 서책은 무엇인지요?”

정갈한 필체로 쓰인 세 권의 서책이었다.

쓰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묵향이 솔솔 났다.

“연 대협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으니, 이제 족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옮겨적었습니다.”

연제승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첫 번째 책을 살폈다.

[ 비류연검 정본 ]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본가의 무공이로구나! 크흐흑. 선조시여!”

수백 년을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무공.

연제승이 감격에 찬 표정으로 울먹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 비류연검 주해 ]

“이것은?”

“구결이 다소 추상적이라 배우기 쉽지 않을 듯하여, 제가 쉽게 풀어쓴 책입니다.”

“공자님께서 손수 풀이를 해주시다니!”

연제승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단지 비급만으로 무공을 배우는 것은 책에서나 가능한 일.

대개 스승이나 동문과 함께 연구하며 깨우치고는 했다.

하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주해서.

잘 쓰인 주해서는 진본보다도 더 귀하게 취급받았다.

“무공 용어를 이렇게 쉽게 쓴 책은 처음 봐요. 와, 그림까지 있어요!”

책을 몇 장 펼쳐본 연백경이 흥분해서 외쳤다.

“고작 며칠 사이에…! 보통 품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거늘.”

연제승의 목소리 또한 떨렸다.

두 사내가 감사와 호감이 가득한 눈으로 유운을 바라보니, 분위기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챙기십시오.”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남은 한 권을 넘겼다.

[ 흑운검 정본 ]

검은 표지, 낯선 제목.

두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것이로구나.’

‘거, 검은 눈…!’

내용을 본 적도 없음에도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공자께서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칩니다.”

“맞아요. 비류연검을 소화하는 데만도 평생이 걸릴 거예요.”

두 사내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 이 또한 연 대협이 남기신 무공입니다. 비록 저의 깨달음이 일천하여 주해서까지 적지는 못했으나, 하늘을 놀라게 할 무공임에는 분명하니….”

유운의 말에 두 사내가 더욱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무공으로 충분합니다.”

“맞아요, 그러니까 이건 나중에. 백 년쯤 후에 주세요.”

아무리 권해도 고집을 굽히지 않으니, 유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일단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원하시면 언제든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 하. 하. 물론입니다.”

연제승이 어색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 * *

다그닥, 다그닥.

마차 한 대가 서촌의 언덕을 넘고 있었다.

“선조의 무공을 이리 온전하게 전해주시다니. 유운 공자의 은덕이 하늘과 같구나. ”

“편히 돌아가라고 마차까지 빌려주시고. 공자님처럼 성품이 따듯한 분은 처음 봤어요.”

“그렇고말고. 그분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물론이죠. 이제 본가의 앞날이 밝겠죠?”

“밝다 뿐이냐. 찬란하고, 또 찬란하지. 껄껄껄!”

연제승과 연백경이 기분 좋게 떠들 때였다.

“휴우. 무림은 험난하기 짝이 없거늘. 이리들 순진하시다니.”

연백련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또 그 소리냐? 허허. 너도 주해서를 보지 않느냐? 다른 마음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그래, 누나. 유운 공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셔.”

두 사내가 적극 유운을 변호할 때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상인이 제가 손해 보면서 납품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커흠. 드문 일이다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

“하지만 매우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지요. 시조의 이야기 또한 그렇습니다.”

연백련이 차분하게, 하지만 냉소적으로 말을 이었다.

“시조께서 일생동안 어둠 속에서 백리에 충성하였다는 이야기인데. 그 정도의 고수가 진정 그리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하나 공자께서 전하신 이야기에 따르면….”

“이야기일 뿐이지요. 물증 따위는 없는, 그저 이야기.”

“……!”

“비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적랑쌍도와의 비무 말이냐? 그것은 모두가 정당하고 아름다운 승부였다고 말하는….”

“직접 보셨잖습니까, 유운 공자의 가공할 무위를. 과연 적랑쌍도가 당해낼 수 있었을까요?”

“그, 그것은….”

연제승의 얼굴이 흐려졌다.

적인걸은커녕, 그가 본 어떤 무인도 그때의 유운에 비할 수 없었다.

“그 정도의 힘을 갖춘 자가, 만인 앞에서 약한 척을 했다는 소리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설마 공자께서 힘을 숨기고 다른 마음을…!”

연백련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두 사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지요. 어쩌면 두 번도. 하지만 세 번은 필연입니다.”

“드, 듣고 보니 그 거친 남방인들이 공자를 따른다고 했지.”

“따르는 무인도 많다고 했어요!”

연백련의 말에 연제승과 연백경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가 가슴 속에 어떤 야망을 품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두렵고도 두렵습니다.”

연백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두 사내 역시 덩달아서 몸을 떨었다.

“살기 위해서는 유운 공자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봐야 합니다. 남몰래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을 말입니다.”

“어둠 속에서 힘을 키우고, 세력을 모은다라. 그렇다면 설마….”

“최소한 백리세가. 어쩌면, 아니 확실히… 천하를 노리고 있겠지요.”

“천하!”

두 사내의 눈이 부릅떠졌다.

감히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운 말이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천하는 언제나 맹의 것이었으니까.

“감히… 아니 된다. 아무리 공자라도 너무 위험하다.”

“아버님, 아직도 공자의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저희는 이미 호랑이, 아니 용의 등 위에 올라탔습니다.”

“용!”

“여기서 떨어지면 죽음뿐이니. 이제는 앞으로 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두 사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해야겠느냐?”

유난히 영특한 딸아이였다.

연제승이 의지할 곳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이미 공자께서는 답을 주셨습니다.”

“서, 설마, 시조의 일화가…!”

“우리가 살기 위한 길은 단 하나. 연가는 유운 공자의 숨겨진 검이 되어야 합니다!”

연백련의 단호한 말에 연백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숨겨진 검이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을 섬멸하고, 더러운 일도 마다치 않는 어둠 말이지?”

연백경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끝내주게 멋지잖아!”

협객전의 주요 조연으로 나오는 살수와 같지 않은가?

소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경아야, 너 또한 더는 게으른 천재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괜찮겠느냐?”

“괜찮아. 나, 오늘부터 죽어라 노력할 거야.”

“어찌 너희만 두고 보겠느냐? 나 역시 그리하겠다.”

연백경도, 연제승도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마십시오. 이제까지의 삶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합니다. 죽어라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로 죽으리라!

세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손을 마주 잡았다.

두두두…!

세 마리 말이 마차를 끌고 달렸다.

아무도 채찍질하지 않았건만, 누군가 채찍질하듯 열심히 달렸다.

* * *

- 운이는 좀 어떤가? 괜찮은가?

- 아무런 이상이 없네. 지나친 걱정이었나 보네.

- 휴우. 다행일세, 다행이야.

두 신선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유운이 겪은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자칫하면 영혼에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그랬기에 두 신선은 유운을 몰래 관찰했다.

혹시나 심마가 유운의 정신을 현혹하지는 않는지, 연자후의 잔념이 남아있지는 않은지.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 했던가.

유운의 영혼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맑고 커졌다.

- 운이야 그렇다 치고. 자네는 괜찮은가?

종남일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 허허허, 운이가 다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네.

매화검선이 느긋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자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잃어도 조금도 아쉽지 않고, 주어도 오히려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 그런데….

- 왜 그러나, 뭐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나?

세계를 뛰어넘었던 순간.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를 본 것만 같았다.

인간계에 결코 있을 리 없는 괴물들을.

- …아닐세.

하지만 매화검선은 말을 삼켰다.

‘세계’와 ‘세계’를 가르는 공간은 무한이었고, 세계를 엿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으니.

그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 어쩌면 이 세상은, 우리가 보는 모습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네.

겉모습은 생전에 보았던 세상과 비슷했다.

하지만 속살은 달랐다.

훨씬 더 붉고, 훨씬 더 어두웠다.

- 무슨 소린가?

- 세상에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다지 않나. 그런데 하늘이 내린 운(運)과 연(緣)이 모두 그 아이에게 향하니…

- ……!

- 하늘이 그 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인지….

어두컴컴한 하늘.

새하얀 은하수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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