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79화 (56/114)

제79화

백호문의 초대 (1)

- 비류연검은 실로 훌륭한 무공이다. 그러나 네 무공의 근본은 화산이 되어야 하니. 오늘은 본 파의 무공 중 현천심공(玄天心功)을 배워보자꾸나.

두루마리 속.

매화검선이 진중한 표정으로 구결을 풀어냈다.

- 이 구결로 마음을 닦으면, 어두운 밤에도 능히 길을 잃지 않으니. 주화입마와 같은 위험에서 수련자를 보호하는 데 특히 큰 효용이 있으며….

“스승님, 구결 전수는 장문인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커, 커흠.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일단 배워두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유운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스승님께서 달라지신 느낌인데….’

연씨 일가의 방문 이후.

매화검선은 틈만 나면 유운에게 무공을 가르치려고 했다.

본산 무공이든, 구결이든 다 퍼주려고 하니, 유운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만은 달랐다.

“스승님, 비류연검뿐 아니라 이 무공 또한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독특한 구결이….”

유운이 검은 표지의 책, ‘흑운검’을 들어올 때였다.

- 그, 그건 아직 이르다!

매화검선이 다급한 목소리로 유운을 말렸다.

- 커험. 무공은 단계별로 익혀야 하는 법. 연 대협이 남긴 비류연검을 모두 다 이해했다고 자부하느냐?

“불민한 제자가 연 대협의 깊은 깨달음을 어찌 다 수습했겠습니까?”

- 옳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매화검선은 유운이 대성하지 못했다는 말에 오히려 더 흡족해했다.

- 너의 성취는 이미 차고 넘친다. 천천히 달리는 말이 더 멀리 가는 법. 부디 서두르지 말거라.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스승님.”

엄격한 말속에 숨어있는 진심에 가슴 속이 따듯해졌다.

매일 그렇게 새롭게 배운 무공들을 익혀나갔다.

유운의 일상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공자님, 수련을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하지만 찾아오는 손님이 너무 많은지라….”

장노가 송구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게 어찌 장 노야 탓이겠습니까?”

유운이 빙그레 웃으면서 학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기껏 몰래 모셔왔는데, 연 가주께서 그리 알릴 줄은 몰랐습니다.”

“보물을 가진 것이 죄가 될 수 있거늘. 연 가주께서 무리하셨습니다.”

장노의 말에 유운이 탄식했다.

연제승은 사람들에게 상승 무공을 얻었음을 밝혔다.

“유운 공자께서 수백 년간 아무도 못 풀었던 수수께끼를 풀었단 말인가?”

“이름 높은 무인이라고, 학사라고 자랑하던 놈들, 모두 장님이었구만, 껄껄.”

“이크, 이러다 기회를 놓칠라. 어서 빨리 백리제일학사를 뵈어야겠어!”

덕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연 가주 나름의 보은 아니겠습니까, 공자님.”

가산을 탕진하여 당장 보답할 방법이 없으니, 유운의 명성이라도 드높이려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걱정이 될 뿐입니다.”

“다행히 무공에 대해 모두 알리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비류연검이 강기지경의 무공이라는 진실은 감춰지고, 검기지경 오단공의 무공으로만 알려졌다.

흑운검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쓸모없는 족자에 오단공의 무공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혹시 우리 선조께서 남기신 물건에도?’

‘우리는 못 찾았지만, 유운 공자님이라면…!’

매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서가진미를 찾아왔다.

“공자님, 이 족자는 증조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물건으로, 북해의 상인에게 비싼 값을 주고 구했다고 합니다. 운치 있는 풍경을 보십시오,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쉽지만 그저 산수화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진품이 아닌 가품이고요.”

“저, 정말입니까?”

털썩.

중년 사내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공자님, 이건 오대째 전해 내려오는 서책으로….”

“…아쉽지만 이건 무공 비급은 아닙니다. 역사적 가치는 있으나, 비슷한 책이 많아서….”

“공자님, 이 도자기로 말할 것 같으면…!”

“…단순한 요강으로 보입니다만….”

아무런 가치 없는 물건이 대부분.

하지만 뜻밖의 대박을 터트리는 자도 있었다.

“공자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 이온데 한 번만 봐주십시오. 딱히 귀한 물건은 아니지만, 혹시나 싶어서….”

딱 봐도 삼류 낭인처럼 보이는 추레한 사내가 화로를 꺼냈다.

유운은 한참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식 상태를 보아하니, 상당히 오래된 물건이로군요. 따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습니까?”

“아쉽게도 없습니다. 화재로 가문의 기록이 다 소실되었다 들었습니다.”

“흐음. 어쩌면….”

유운은 사람들에게 시켜 숯을 가져오게 하여, 화로를 달구기 시작했다.

화르르…!

뜨겁게 달아오르자, 표면에 검은 그을음이 생겼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공자님. 제가 괜히 쓸모없는 물건을 가져와서….”

“자세히 보십시오, 단순한 그을음이 아닙니다.”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검은 부분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을음을 살폈지만, 조금의 이상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유운은 달랐다.

[명안명심법]

유운이 눈에 기를 집중하니, 손톱 크기의 그을음이 문만큼이나 커졌다.

문의 정면은 수많은 글자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유운은 곰곰이 글을 살피더니, 맑은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왕 대인.”

“서, 설마?”

“무공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훌륭한 내공심법이로군요.”

“저, 정말입니까?”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구결을 숨긴 듯합니다.”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화로에 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원수와 싸우다 큰 상처를 입었으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복수를 마쳤으니 나의 죽음은 원통하지 않으나, 어린 아들이 걱정이로구나. 남은 친척이라고는 승냥이와 같은 자들뿐이니. 하여 몰래 본가의 무공을 이곳에 남기니….

후손조차 몰랐던 이야기였다.

“크흐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변변찮은 무공 하나 없이 평생 밑바닥을 굴렀던 인생이다.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인사했다.

“공자께서 모른 척 무공을 빼돌려서도, 사실 다른 사람은 알 길이 없잖아?”

“그런데도 한 점 숨김없이 말해주니. 역시 유운 공자님이셔!”

사람들은 유운의 학식이나 식견보다 유운의 인품에 더 감탄했다.

그러한 명성이 더 많은 사람을 불러오니, 유운이 오는 날이면 서가진미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어느 날은 병든 노인이 어린 손자와 함께 찾아왔다.

“이건 선조께서 남기신 시조입니다. 대대로 보관은 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널찍한 석판에는 멋들어진 시구가 적혀 있었다.

군신가(君臣歌).

군주에 대한 신하의 충성심을 표현한, 흔해 빠진 시조였다.

문제는 재질과 필체였다.

‘단단하기로 유명한 황강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새겼구나. 거기에 용이 살아있는 듯 웅혼한 글씨라니! 범상한 물건이 아니로구나!’

유운의 눈에 맑은 기운이 감돌았다.

유운은 한참을 살피더니,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 전해져 내려온 물건입니까?”

“백이십 년 된 물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이십 년이라. 과연 그렇군요.”

유운이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혹시 어르신의 성씨가 정(鄭)씨 아니십니까?”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할아버지 대부터 전(奠) 씨로 살아왔거늘….”

노인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여기 시조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최 무슨 뜻인지….”

“시조에도 유행이 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기법은 압운법의 변형으로….”

“압운이요?”

“학사가 아니라면 굳이 자세히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운율을 잘 표현하기 위한 기법일 뿐이니.”

“……?”

“보통 짝수 줄의 끝부분의 글자를, 같은 음색이나 비슷한 의미의 글자로 맞추고는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유운이 각 문장의 끝을 가리켰다.

“두 번째 줄의 끝 글자는 전(奠). 네 번째 줄은 읍(邑). 운율 상 어울리지 않는 글자입니다.”

“그 말씀은…”

“아마도 파자(破字)인듯합니다.”

“파자요?”

더욱 어리둥절해지는 표정에,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복잡한 글자를 단순한 글자 여러 개로 깨뜨리거나, 단순한 글자 여러 개를 복잡한 글자 하나로 합치는 방법이지요.”

“아…그 말씀은?”

“처음 두 번째 줄의 끝, 전(奠)자와 네 번째 줄의 끝, 읍(邑)자를 합치면 정(鄭)이 됩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과연 공자님이로다!”

옆에서 듣던 사람들이 감탄하며 유운을 바라보았다.

백여 년 전 유행하던 시조의 기법은 물론, 글자를 가지고 노는 기법까지 통달했다는 뜻이니까.

“어르신께서도 가문에 대해 잘 모르셨나 봅니다.”

“할아버지께서 정 씨임을 숨기라는 이야기만 전해 들으셨다고 합니다.”

“황강옥은 매우 단단하여 비싸게 팔리는 광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 황강옥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어디입니까?”

“옥루현입니다. 특히 소옥산이 유명하지요.”

“소옥이라…설마?”

“소옥정가!”

“맙소사, 소옥정가라니!”

유운의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과는 연이 닿지 않았던 촌부인지라. 소옥정가가 유명한 가문입니까?”

“천하백가의 하나. 정확히는 천하백가였던 가문입니다.”

“처, 천하백가!”

유운의 말에 노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림인이 아니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천하를 지배하는 명가 중의 명가!

이름과 달리 백 개가 아니고 이십여 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털썩!

노인이 두려운 표정으로 아이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공자님! 저는 몰랐습니다, 진정 몰랐습니다!”

백가가 백 개가 아닌 이유는 단순했다.

멸문(滅門)!

기나긴 맹의 치세 속에서, 무려 칠십여 개의 가문이 멸망한 탓이다.

천하에 백가를 멸할 수 있는 세력이 누가 있겠는가?

백가.

오직 백가뿐이었다.

그리고 유운이야말로 천하백가 중 하나인 백리세가의 직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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