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백호문의 초대 (2)
“진정하십시오, 어르신. 마지막 글자를 보시면 무슨 말인지 아실 겁니다.”
유운이 일으켜 세우더니 마저 시조를 풀이했다.
백여 줄에 달하는 시조의 마지막 다섯 줄을 가리켰다.
망(亡), 구(口), 월(月), 녀(女), 범(凡).
대부분은 다섯 글자를 보고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낙방 서생 봉경문은 달랐다.
“고, 공자님. 설마 이 시조는….”
“봉 학사께서 짐작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조를 가리키더니, 다급히 엎드려 절을 했다.
“영(嬴)!”
“무슨 말인가, 봉 학사?”
“다섯 글자를 합치면 영자이니, 이는 맹주가의 성씨입니다.”
“뭐, 뭐라고?”
“맹주님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반면 노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천하백가가 아니면서 천하백가를 멸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
바로 맹주, 영씨 일족이었다.
“이, 이건 우리 가문의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결코 역적이 아닙니다! 고, 공자.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협의로 일어선 가문답게 맹의 행사는 대부분 관대한 편이었다.
단 하나, 맹의 패권을 위협하는 적에게는 가차 없었으니.
이 소식이 맹에 닿기도 전에 주변의 무림인에게 잡혀서 죽을 터였다.
“휴우. 아닙니다, 어르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운이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더니, 설명해주었다.
“이것은 무공비급도, 예술품도 아니나 오히려 그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공자께서 온종일 고생하셨으니. 여기서부터는 제가 대신 풀이해드리겠습니다.”
유운을 대신해 봉 학사가 대신 나섰다.
“시조의 전체 내용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길고 긴 시조 속에 숨겨진 말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했다.
정 씨가 나의 목숨을 한 번 구했으니, 내 이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성륜제 이십오 년, 영씨의 다섯째가 적노라.
봉 학사의 설명에 역사에 밝은 자들 몇몇이 눈을 번쩍 떴다.
“성륜제!”
“형제지난!”
봉 학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백이십 년 전, 당대 맹주이신 성륜제께서 붕어하시고 남은 형제간에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봉 학사가 돌려 말했으나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다.
후계전!
살아있는 절대 권력에 관한 일이니, 감히 말을 덧붙이는 이가 없었다.
“정씨 가문은 그중 다섯째 아들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다른 천하백가의 공격에 결국 멸문했지요.”
“……!”
“대란에서 살아남아 맹주가 되신 것은 다섯째 아드님이셨으니. 지금 맹주가의 혈통은 그분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숨도 쉬지 않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분은 서예에 조예가 깊어 용처럼 굽이친 필체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평소 수수께끼 같은 시조를 남기길 즐기셨으니….”
사람들은 그제야 봉 학사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아아…!”
“감축드립니다, 어르신!”
“이런 대운을 얻으시다니!”
무려 당대 맹주의 직계 선조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람들이 흥분해서 노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 이게 정말입니까? 저희 선조께서 정말로?”
“전해지는 야사에 따르면 그분께서 맹주가 되신 후 남기신 말이 있다고 합니다.”
“……!”
“함께 꿈을 꾸었으나, 정작 꿈을 이루고 나니, 벗은 떠나고 없구나. 그리 말씀하시면서 크게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아아아…!”
그제야 노인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백여 년 전의 인연에 불과하다.
하지만 맹주. 천하의 주인이었다.
‘겨우 몇 마디 칭찬으로 끝날까?’
무인들은 속으로 묻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천하백가가 종가를 이끌 듯, 맹은 천하백가를 이끌었다.
충성을 다하다 멸문한 천하백가를 어찌 소홀히 여기겠는가?
천하에 보이기 위해서라도 크게 보상할 것이 분명했다.
‘돈 따위가 문제가 아니로구나!’
‘정가에 진정한 대박이 터졌어!’
오늘은 무공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촌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음 달에는 감히 얼굴조차 볼 수조차 없는 귀한 신분이 될 터였다.
“어르신, 저는 작게나마 을주현에서 상단을 이끄는 상인이온데….”
“어르신, 불민하나마 소도문을 이끌고 있는 자이옵니다. 비록 백여 명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방파로 감히 정가에 비할 수는 없으나….”
사람들이 노인을 향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벌써부터 재물을 바친다, 어린 손자에게 딸을 소개한다 난리였다.
“이, 이게 대체.”
노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유운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아니었으면 어찌 이런 행운이 있었겠는가?
“흑흑흑, 공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또 절을 했다.
“선조께서 쌓았던 복이 후손에 닿았을 뿐입니다. 어찌 저의 덕이겠습니까?”
유운은 그저 겸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날부터였다.
- 서촌에 하늘에 닿는 지혜를 가진 학사가 산다더라!
- 무로서 문을 지키고, 문으로서 무를 보듬는다더라!
인근 현뿐 아니라, 천하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잊힌 무공은 되찾고, 부족한 무공은 채워주니.
무학사(武學士).
오래전 잊힌 이름이 다시 살아났다.
* * *
“휴우.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저희가 무슨 고생을 했겠습니까? 공자님께서 제일 고생하셨지요.”
“맞습니다, 제일 일찍 일어나셔서 업무를 보시고, 밤늦게까지 사람들의 청을 들으셨잖습니까.”
“주군 덕분에 본가의 명성이 드높아졌다고 합니다!”
유운의 말에 장노와 봉 학사, 설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 같이 이뤄낸 일이지, 어찌 저 혼자 이뤄낸 일이겠습니까?”
유운이 빙그레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백리의 이름으로 제가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와, 회식이다!”
“이날만 기다렸습니다, 껄껄!”
“역시 저희를 챙기는 사람은 공자님밖에 없습니다, 으하하!”
서촌을 찾는 사람이 많아 모두의 업무가 늘었다.
그래서 유운은 매달 말일만큼은, 모두가 함께 좋은 음식을 먹고, 푹 쉬도록 했다.
만서각 식구 전원이 다 함께 거리로 향했다.
“와, 또 새로운 객잔이랑 주루가 생겼어요.”
“사람이 몰리는 곳에 돈이 몰리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소화의 말에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서촌의 중심가에 상점과 주루가 가득하니, 어지간한 향 못지않게 번화했다.
“원하는 음식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그거야 당연히 고기 아니겠습니까?”
“맨날 고기예요, 지겹게? 오늘은 다른 것 좀 먹어봐요.”
“단 거, 단 거 먹어요!”
호각대원도, 살림살이를 도와주는 아주머니도, 소화도 각자 의견을 이야기했다.
“저 주루의 숙수가 면을 그렇게 쫄깃하게 한다던데?”
“저 식당은 어떤가? 깔끔하니 좋구만.”
“저는요, 제 생각은요! 새로운 거, 새로운 거요!”
덩치 큰 남방인들 사이.
소화가 조그마한 키로 폴짝폴짝 뛰면서 신나게 이야기했다.
- 허허허, 꼬맹이가 귀엽구만.
- 당돌한 녀석이야, 흐흐.
매화검선과 종남일패가 흐뭇하게 지켜볼 때였다.
“킁킁. 이거 냄새가 나요. 아주 달콤한 냄새! 공자님, 우리 저기로 가봐요.”
소화가 코를 벌름거리더니, 유운의 손을 잡아끌었다.
- 원 녀석도. 어지간히 먹을 것을 좋아하는구나, 허허.
매화검선이 길게 늘어진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식당의 이름을 본 순간, 눈을 번쩍 떴다.
- 저, 저것은!
[ 화산루 ]
참으로 익숙하고 그리운 이름이 아닌가?
- 운아야, 저리로 가자, 저리로!
매화검선이 흥분해서 닦달했고.
“공자님, 우리 저리로 가면 안 돼요? 제발, 제발…!”
소화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졸랐다.
- 저리로!
“저리로!”
간만에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니,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한번 가보자꾸나.”
유운 일행이 화산루 안으로 들어섰다.
“아, 달콤해. 냄새 너무 좋아.”
- 허허. 이렇게 운치 있는 이름을 짓는 주루라. 맛은 볼 것도 없이 최고겠구나!
소화도 매화검선도 벌써 흥분한 상태였다.
유운 일행이 이 층에 자리를 잡자, 주인이 직접 인사를 왔다.
“손님이 이리 많다니. 장사가 잘되시는 듯하여 다행입니다.”
유운의 말에 주인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모두 공자님 덕분입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숙수의 음식 솜씨 덕분이겠지요.”
“아닙니다.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이 주루는 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진즉에 망해서 바닥에 나앉았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은 이전에 다른 지역에서 주루를 연 적이 있습니다만. 텃세가 심해서 망하기 일쑤였습니다.”
“텃세라니요?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영업하려면 먼저 지역 상조회에 상당한 금액을 내야 하고, 상조회에 등록된 업체의 재료만 공급받아야 하며….”
주루 주인의 사연을 들은 사람들이 분개했다.
“말만 상조회지, 결국 돈 내놓으라는 소리잖아요?”
“주인인데도 재료도 마음대로 못 정한다고요?”
상조회의 주인은 기존 주루와 객잔의 주인.
결국 상조회는 그들의 이익을 위한 기구였다.
“맹의 법이 지엄하거늘….”
“아무리 맹이라 한들, 보이지 않는 욕심까지 막지는 못하지요.”
장노의 말에 주인장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이 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없는 말을 지어내서 손님에게 험담하고, 재료의 납품까지 거부하니.
어지간한 사람은 포기하고 떠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습니다.”
“……!”
토박이 상인은 물론 운연상단에서도 어떠한 텃세를 부리지 않으니.
오직 음식 맛으로,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었다.
“이곳저곳 옮겨가며 장사를 하였으나, 서촌처럼 공정하게 운용되는 곳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요, 우리 서촌만 한 곳이 없어요, 히히. 다 누구 덕분인데요.”
주인의 말에 소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말하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구운 고기와 조린 생선, 야채 볶음 사이로 처음 보는 요리가 보였다.
“이것은 무슨 요리인지요?”
유운이 흥미로운 눈으로 물었다.
처음 보는 붉은 과일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고, 위에는 눈과 같은 하얀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견문이 넓으신 공자께서도 처음 보는 요리일 것입니다. 저희 고향에서 만들어낸 요리니까요.”
주인이 불그스름한 과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번가(番茄, 토마토)라는 과일입니다. 서역에서 들여온 귀한 녀석이지요.”
손으로 일일이 칼집을 내서 바깥은 꽃 모양, 안쪽은 산 모양으로 장식했으니, 상당한 정성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이 하얀 가루는….”
“설탕, 설탕,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설탕이지요!”
소화가 흥분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이 요리의 이름은….”
“이름은?”
“화산표설(火山飄雪)이라 합니다.”
“불타는 산에 하얀 눈이 나부낀다라.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유운이 빙그레 웃을 때였다.
- 화산표설이라. 허허허, 그래. 겨울의 화산이 그리 아름다웠지.
매화검선은 음식을 보며 아련한 미소를 지었고.
“꼴깍. 먹어봐요, 먹어봐요. 어서, 어서!”
신선한 과일 향과, 달콤한 당분의 냄새.
소화의 동그란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