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82화 (59/114)

제82화

백호문의 초대 (4)

“맹호출동!”

“하압!”

“일보 전진!”

“차아!”

“이 열, 반보 옆으로!”

쿵!

설영이 외침에 따라 호각대원들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모두가 빳빳하게 다림질된 검은 무복을 입으니, 마치 검은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옷이 바뀌니 보기가 참 좋습니다, 공자.”

“무복은 원래 해지기 쉽거늘, 저리 튼튼하니. 우 대인이 신경을 많이 썼나 봅니다.”

유운이 장노의 말을 받았다.

워낙 험하게 몸을 굴리는 게 남방인이다.

덕분에 백리세가에서 보급해준 무복은 찢어진 오래.

각자 알아서 적당히 색깔만 맞춰서 입어왔는데, 오늘만은 달랐다.

“한 시진을 투덕거렸는데도 안 찢어진다고? 과연 명인이 만든 옷은 다르네.”

“키아. 옷이 바뀌니 훈련도 더 잘돼, 하하!”

통일된 복식 덕분에 만서각에 대한 소속감도 더욱 강해졌다.

우근이 넉넉하게 공급한 덕에, 여벌 옷도 많으니 부담도 없었다.

“노야, 옷은 편하십니까?”

“이를 말씀입니까. 공자님 덕분에 말년에 호강합니다.”

장노가 빙그레 웃으며 가슴팍을 쓸었다.

겉보기로는 박달나무 껍질로 만든 평범한 삼베옷 같았다.

하지만 같은 재료라도 어디서 키웠느냐가 중요한 법.

영지(靈地).

천하의 영험한 기운이 모인 땅에서 키운 박달나무로 만든 옷이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옷 자체가 영기를 품고 있으니.

기운을 북돋아 잔병치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노화를 늦추는 효과까지 있었다.

“입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니, 도무지 벗을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허허허.”

대부호나 고관대작들도 구하지 못하는 귀한 옷이다.

본래라면 거절함이 마땅하나, 장노가 유운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리 말씀하시니 저 또한 기쁩니다.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장 노야.”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같이 울고 웃으며 보내온 한평생이었으니.

넉넉하게 웃는 모습이 참으로 비슷했다.

“그나저나, 소화 이 녀석은 어디 갔습니까? 지금이면 한창 만서각을 돌아다닐 시간인데….”

“허허허,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장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 *

눈물을 흘리고, 방방 뛰고, 조잘거리고.

소화가 어찌나 기뻐하고 흥분하던지, 탈진할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후후후.”

“……?”

“후후후.”

소화가 동경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환하게 웃었다.

“구경은 충분히 하지 않았느냐? 귀한 옷이니 그만 넣어두는 것이 어떻겠느냐?”

장노는 평생 세가에서 지급한 옷만 입었을 뿐, 개인적으로 사본 적은 없다.

당연히 소화 또한 아낄 것이라고 여겼다.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소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선물이니까 더욱 드러내고 보여줘야지요. 그래야 선물한 사람도 기분이 좋지 않겠어요?”

“그 말도 맞다. 네가 나를 일깨워주는구나, 허허허.

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어요!”

소화가 음흉하게 웃으며 날개옷을 몸에 걸쳤다.

“복수라니?”

“후후후. 소화 님이 간다! 히히히!”

소화의 귀에는 이미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소화가 쏜살같이 서촌을 향해 날아갔다.

휘익!

소화는 떠들고 있는 한 무리의 아이들 한가운데로,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으윽, 뭐야, 누구야?”

“저리 비키…어? 이건?”

생전 처음 느끼는 보드라움.

화려한 연꽃과 공작.

첫눈처럼 새하얀 날개.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한 옷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아아!”

“이거 뭐야? 뭐야”

“소화? 네 거야?”

“우와, 대박이다, 대박이야!”

비싼 옷, 그것도 무지무지 비싼 옷!

촌에 사는 아이들조차 알 수 있었다.

“후후후. 내 옷 예쁘지?”

“엄청 엄청!”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옷 처음 봐.”

여아 아이들은 물론 사내아이들까지 몰려들었다.

“내가 입으니까 더?”

“물론이지, 소화가 제일 예쁘지.”

박석호가 주저 없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봐라, 빛도 난다?”

소화가 한 바퀴 돌자, 보석들이 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어지간해야 경쟁이 되는 법.

자기만의 보물을 자랑하던 아이들이 소화에게 달라붙었다.

“진짜 예쁘다. 이거 만져봐도 돼?”

홍아가 눈치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물론이지. 우리는 친구잖아.”

잠깐 시샘한 적은 있지만, 근본적으로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와, 여기 푸른 보석 좀 봐. 설마 청옥일까?”

“황금빛 수실은 어떻고. 이거 진짜 금 같은데?”

“다 진짜야, 귀한 거라고.”

그렇다고 자랑을 안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소화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도 만지게 해주면 안 돼?”

“나도.”

“나도.”

아이들이 몰려올수록 소화의 어깨가 올라갔다.

“진짜 예쁘지? 칭찬 한 번에, 한 번씩 만지는 거야.”

대놓고 자랑을 하니, 밉지가 않았다.

“원, 녀석들하고는. 좋을 때다.”

멀리서 지켜보던 옷감 상인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낙엽이 떨어져도 까르르 웃고, 조그마한 인형에도 하늘을 가진 양 기뻐하는 나이다.

“아빠, 보셨어요? 소화 옷, 진짜 예뻐요.”

“그래. 너희들 눈에는 그리 보이겠지. 기뻐할 만하지.”

상인은 넉넉하게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골에서 옷감은 귀한 재물과 같다.

가장 값이 싼 베로 만든 옷일 테지만, 저리 기뻐하는 것이 당연했다.

“막 보석도 있고, 황금도 있고, 선녀처럼 날개도 있고.”

“하하하, 그래, 그래.”

“진짜라니까요, 참. 어디 한번 보시라구요.”

상인은 못 이긴 척 딸아이의 손에 이끌려갔다.

시골 아이들 옷이 좋아 봐야 얼마나 좋겠는가?

적당히 칭찬 한마디 던지고 오려고 했는데…

“허어어어억!”

경악한 나머지 상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 미친. 여, 영물? 게다가 초, 촉조라니!”

소화를 가리키는 손이 벌벌 떨렸다.

마물과 달리 영물은 오로지 사람을 이롭게 했다.

영물로 만든 옷은 마물 가죽이나 뼈로 만든 갑옷보다 훨씬 더 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행운을 부르기로 유명한 촉조의 깃털로 만들었다?

보의(寶衣)!

소화의 옷은 금덩어리보다 더 큰 보물이었다.

“저, 저 귀한 것을…꿀꺽.”

큰 욕심 없이 살았던 자신조차 마음이 흔들린다.

그런데 만약 욕심 많은 자가 본다면?

상인이 흠칫 몸을 떨 때였다.

소매 한쪽 끝. 뜻밖의 표식이 보였다.

백리(百里).

가문을 나타내는 두 글자, 그리고 가문의 상징인 책과 검이 수 놓여있었다.

노련한 상인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마, 맙소사! 기명문양(記名文樣)라니!”

가문의 이름과 문양을 새겨, 정식으로 가문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표식.

가문의 직계 혈족이나, 그의 심복만이 가질 수 있는 징표였다.

천하백가, 백리세가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니, 감히 누가 이를 침범하겠는가?

기명문양만으로 어지간한 잡배들과 마인들은 도망치고 말 터였다.

그런데….

“예쁘지? 엄청 예쁘지?”

“으응, 그렇긴 한데.”

아이들이 주춤하며 물러섰다.

옷도 예쁘고, 소화도 귀엽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질리기 마련이다.

“여기 봐라, 이쪽으로 하늘에 비치면 보라색으로 반짝이는데….”

“가까이 와서 만져봐, 더 만져도 돼.”

“좋지? 어떻게 좋아? 자세히 얘기해줘.”

소화가 자랑하고 또 자랑하니, 귀청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심지어 박석호조차 질린 표정.

조금씩, 조금씩 아이들이 물러났다.

“이 옷이 어떤 옷이냐면…!”

소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랑을 이어갔다.

이곳저곳, 마을 곳곳을 누비면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그, 그렇구나. 예쁘구나, 예뻐.”

“그런데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구나.”

부럽고 신기한 것도 정도가 있다.

온종일 자랑을 들으니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저기요, 잠시만요. 아직 제 얘기 안 끝났거든요?”

모두 소화의 그림자만 보고도 도망치니, 더 이상 자랑할 곳이 없었다.

“칫, 아직도 말할 게 남았는데. 그래도 내일이 있으니까.”

소화는 한결 개운한 표정으로, 만서각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데.”

내심 그렇게 아쉬워할 때였다.

“백호문이….”

“초청이라….”

“쉽지 않습니다….”

유운의 서재에서 뜻밖의 단어가 들려왔다.

소화도 들어본 적 있었다.

저 강 건너, 청수현에 있는 커다란 문파.

번화한 성읍 한가운데 있고, 사람들도 많은 문파였다.

“백호문이라.”

꼬마 선녀의 눈이 반짝였다.

* * *

서탁 위, 고급스러운 종이봉투에 적힌 유려한 필체.

해원검 친전(親展)

백호문주 황일동이 보내온 편지였다.

…불민한 저의 손자와 흑호방주의 여식이 연이 닿아 혼인하여, 결실을 맺었으니.

얼마 전 어여쁜 아이가 태어났소이다.

백호문과 흑호방이 오랜 은원을 청산하고 하나 되었음을 보여주는 귀한 아이라 아니할 수 없소.

다가오는 추분(9월 22일)은 아이의 백일이 되는 날.

강호 동도들을 모시고 아이의 탄생을 축하함과 동시에, 두 문파가 하나 됨을 널리 알리려 하오니.

해원검께서도 부디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길 바라오.

같이 편지를 읽은 장노의 표정의 어딘가 어색했다.

“원한을 잊고 한 가족이 되었다라.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만….”

유운과 두 문주는 나이를 떠나 친교를 나눈 사이.

평상시라면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 축하할 터였다.

“천하가 혼란하고, 시절 또한 수상하니.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유운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곱씹을수록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두 문파가 하나가 되었다.

강호에 이를 널리 알리려 한다.

스치듯 지나간 문구.

그러나 유운이 그 안에 담긴 뜻을 모를 리 없었다.

“화해할 줄은 알았지만, 아예 하나의 문파가 될 줄이야! 강호에 파장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장노가 무거운 얼굴로 혀를 찼다.

청수현을 반분하고 있는 두 문파가 하나가 된다는 선언!

사실상 백일잔치를 빙자한 ‘개파대전(開派大典)’이었다.

“두 문파가 하나가 되면 청수현을 완전히 지배하고도 남을 것이니. 어지간한 종가보다도 세력이 더 커지겠군요.”

청수향(鄕)은 본래부터 부유하고 물자가 풍부했다.

세력들이 서로 뜯어먹겠다고 할퀴어서 그렇지, 하나가 된다면 ‘현(縣)’이 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서촌 바로 앞에 향급 문파라….”

십여 개의 현을 지배하는 백리세가만 해도 천하백가 중 상위권으로 분류되었다.

다른 백가 중에는 서너 개의 현만을 지배하는 가문도 있었다.

그런데 현 하나를 온전히 지배하는 독립 문파라니?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공자님. 백리오혁 공자의 일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간의 사건은 대부분 백리오혁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발생한 일.

게다가 본가에서는 크게 관심이 없는 변두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 중요도가 비교할 수 없이 컸다.

“공자께서 참석하시면, 온갖 말들이 나올 터. 어렵더라도 이번 청은 거절하시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장노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순수한 마음으로 참석한다 한들, 그렇게 해석하지 않겠지요.”

백리오혁 같은 망나니야 이제 두렵지 않다.

하지만 다른 세력은 다르다.

무파를 이끄는 첫째 공자 백리무혁은 오만한 사자로, 도전자를 거침없이 짓밟는 자.

금파를 이끄는 둘째 공자 백리은혁은 냉혹한 승냥이로, 모든 살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물어뜯는 자이다.

그런 이들이 자신들 외의 도전자를 가만 놔둘까?

“아쉽더라도 거절해야겠지요. 그리하겠습니다, 장 노야.”

자칫하면 후계에 도전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

유운이 한숨을 쉬더니 붓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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