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백호문의 초대 (5)
“마음이 혼탁하니, 글 또한 어지럽구나.”
유운은 기껏 쓴 서찰을 구긴 후 탄식했다.
“화해를 권해놓고, 정작 결실을 보았을 때는 보러 가지도 못하니. 두 분에게 면목이 없구나.”
백호문주든 흑호방주든 유운을 이용하겠다는 마음일 리 없다.
친교를 나누고 싶다는 순수한 호의 일터.
하지만 자신은 정치적 부담과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휴우.”
창문을 활짝 열고, 서재를 서성일 때였다.
소화가 조용히 들어오더니.
스윽스윽.
먼지 하나 없는 서가를 먼지떨이로 털고.
북북.
먹물 한점 튀지 않은 탁자를 마른걸레로 훔친다.
꽃을 탐하는 벌처럼 주변을 맴도니, 유운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소화야,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음. 그게 아니고. 제 생각에는 오히려 공자님이 하시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말이냐?”
“네. 꼭 고민 있는 사람 같이 보이거든요.”
“고민이라.”
“뭐든지 이야기해보세요. 이 소화가 들어드릴 테니까요.”
당찬 아이의 말에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네게도 그리 보일 정도였다니.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내 잘못이다. 미안하구나.”
“아이참, 공자님 그러면 안 돼요.”
소화가 양 옆구리에 손을 올리더니 볼을 부풀렸다.
“무슨 말이냐?”
“공자님께서 잘못한 것이 없으면 사과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내 분명 그리 말했지.”
유운이 그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고민하시는 게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무언가 하고 싶은데 못하시는 거잖아요. 맞죠?”
“그래,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지.”
“감히 제가 한 말씀 드리면요. 너무 많이 양보하면, 결국 아무것도 못 얻더라고요.”
“……!”
백리세가의 가풍은 매우 엄격했다.
어린 소화가 드센 시비들 사이에서 겪은 어려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유운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화의 말을 경청했다.
“끝까지 양보해서, 자기 것을 지킬 수 있으면 상관없어요. 그런데 제 경험상, 한 개를 양보하면 결국 마지막 한 개까지 다 뺏기더라고요.”
“……!”
어리지만 명문세가의 그늘에서 온갖 풍파를 겪은 아이다.
유운은 곰곰이 소화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몸을 낮추고 끝까지 기다린다면….’
결국 후계는 첫째와 둘째, 둘 중 하나로 결정이 날 것이다.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나야겠지. 만서각도, 서촌도….’
후계자와 같은 항렬의 사내들은 모조리 직을 내놓는 것이 관례였다.
예외는 백리순명처럼, 모든 것을 놓고 충성을 맹세한 경우뿐이었다.
‘만약 첫째 형님께서 소가주가 되신다면….’
오직 칼을 든 자만을 사람으로 여기니, 만서각이든 서촌이든 무인 양성소가 되고 말 터였다.
‘둘째 형님이라면….’
오직 금전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니, 백성을 거침없이 쥐어짤 터였다.
유운과 성향이 너무나 다르니, 거짓 충성을 맹세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너는 어찌하였느냐?”
“싸웠죠.”
“……!”
“내 간식, 내 이불, 내 인형을 위해서 싸웠어요. 그리고 지켰죠.”
그 순간, 조그마한 소화가 크게 보였다.
“싸워야 지킬 수 있다라. 네가 나를 깨우쳐주는구나.”
유운이 빙그레 웃으면서 소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럼요. 소화는 만서각에서 제일 똑똑하니까요. 후후후. 물론 공자님은 빼고요.”
“덕분에 결심이 섰구나. 고맙다.”
“아자, 칭찬받았다!”
소화는 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어린 줄만 알았더니. 소화가 저렇게 컸군요.”
장노가 들어오더니 감탄했다.
“어찌 보이는 것이 전부이겠습니까? 참으로 속이 깊은 아이입니다.”
유운이 따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자님께서는….”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장 노야.”
유운이 붓을 들어 서찰을 다시 썼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내용일 터였다.
이를 본 장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실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오랫동안이요.’
오랫동안 땅에 얽매였던 대붕(大鵬)이 하늘로 날아오르리라!
모두 조그마한 아이에게서 비롯된 일이었다.
* * *
“히히, 성공이야!”
소화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신나게 외쳤다.
청수향!
숨 막히는 본가도 아니고, 더 볼 것도 없는 서촌도 아닌 새로운 땅!
분명 새로운 먹거리, 새로운 볼거리, 새로운 친구가 가득할 터였다.
“같이 놀고, 자랑도 하고. 후후후.”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할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났다.
신나게 달려갈 때, 익숙한 신형이 보였다.
“빙 사부!”
소화가 호다닥 달려들자, 설영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뭐, 뭐냐. 가까이 오지 마!”
자기 별호로 온갖 해괴한 노래를 만들지 않나, 귀가 뚫릴 정도로 옷 자랑을 하지 않나.
소화가 다가오기만 해도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간 놀린 거 미안해서 빙 사부에게만 알려주려던 건데. 흥, 됐어요.”
말을 하다가 안 하면 듣고 싶은 법이다.
“알면서도 매번 속는 내가 바보지. 그래, 무슨 일인데?”
설영은 한숨을 쉬면서도 허리를 숙였다.
소화가 설영의 귀에 무언가를 속닥였다.
“무엇이라고? 공자께서 바깥 행차를 하신다고! 헙!”
크게 외친 설영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꿀꺽. 주군의 성격상 많은 이들을 데려가실 리 없다!’
평소 번잡함을 싫어하시니 일행은 많아야 너덧 명 일터.
설영의 눈이 일생일대의 적수를 만난 듯 불타올랐다.
“주군의 첫 여정에 내가 빠질 수는 없지!”
처음 영웅의 곁을 지킨 이들이 끝까지 함께 하는 법!
분명 협객전에서도 그러했다.
“반드시 간다, 반드시!”
설영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몸을 날렸다.
* * *
“단출하게 가겠습니다.”
유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비록 세상에 나설 결심은 하였으나, 과하게 이목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금 대인에게 조용히 준비해달라 부탁해놓았습니다.”
“상단의 일만으로도 바쁘신 분인데. 번번이 신세를 지는군요.”
다음날, 금만보가 마차를 끌고 나타났다.
“허허, 역시 금 대인이십니다.”
장노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문 운운하며 사치스러운 마차를 가져왔으면, 분명 유운이 거절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초라한 마차에 태울 수는 없는 법.
화려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마차였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말이 두 필 뿐입니다. 나머지 두 필은 내일….”
“말은 필요 없소이다!”
쿵!
금만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암이 나타났다.
거암이 마차에 매인 말들을 풀어주더니, 마구와 가죽끈을 둘러맸다.
“각주님, 제가 끌겠습니다!”
“무, 무슨, 아무리 대주라도 무리…헙!”
금만보가 황당하다는 듯 말릴 때였다.
그으응. 쿵!
커다란 마차가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남방인이 신력을 타고났다더니…과연 명성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대인. 저희도 저런 건 못합니다. 워낙 대주가 미친…크흠. 훌륭한 분이라.”
금만보의 말에 다른 대원들이 헛기침했다.
그때였다.
휘릭!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늘씬한 신형이 나타났다.
“쯧쯧. 돌로 수련하더니, 머리까지 돌이 되어버렸구나. 사람이 어찌 하루종일 마차를 끌겠느냐?”
검은 암행복을 입은 설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등에 진 봇짐을 펼쳤다.
단검, 표창, 독질려, 수리검, 자모환….
수많은 암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무기들이로구만.”
“알아채기도 전에 몸에 박히겠어!”
“과연 설 사부일세. 살수 출신답구만.”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설영은 흔들림이 없었다.
“밝음 속에서 영광을 함께할 생각을 버려라. 수하라면 무릇 어둠 속에서 주군을 보필해야 하는 법!”
휘릭!
설영은 단 한 번의 발 구름으로 마차까지 뛰어오르더니, 몸을 숨겼다.
밤을 닮은 새까만 암행복!
눈 외에는 모두 가려진 두건!
얼핏 보면 완벽한 살수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서, 설 사부.”
“저런 빙…어휴.”
호각대원들과 거암이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은신술을 쓴다 한들 벌건 대낮.
어린아이조차 불룩한 신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빙….”
소화는 입이 간지러워 죽겠지만, 참아냈다. 하지만…
“…신.”
거암이 코웃음을 치며 못을 박았다.
그렇게 한낮의 소동이 끝이 났다.
“이것도 챙기시지요, 공자님.”
“그리 멀지 않은 여정이거늘. 알겠습니다, 장 노야.”
지도상으로 보면 바로 맞닿은 옆 동네였다.
하지만 천하는 넓으니, 준마로 달려도 며칠, 마차로는 몇 주는 걸릴 여정이었다.
툭툭.
유운이 가슴팍을 더듬었다.
품이 넓은 두루마기 안쪽으로 새하얀 학사복이 보였다.
봉려익의(鳳麗翼衣).
봉려의 깃털로 만든 보의로, 도검조차 튕겨내는 보물이었다.
‘장 노야의 걱정을 덜 수만 있다면야.’
채앵!
검집에서 나온 검의 자태가 범상치 않았다.
담로검(澹露劍).
백리순명이 하사한 천하백대보검이었다.
‘운철로 벼린 듯 날카롭구나!’
검기를 싣지 않았음에도 가죽도, 무른 쇠도 무 가르듯 갈라버리니.
감히 사람을 상대로 휘둘러 보지는 못했다.
“공자님, 이것도 챙기시지요.”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서가진미의 주인, 왕포삼이 작은 보퉁이를 내밀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저희 소가주께서 준비하신 선물 이온데….”
“서문 소저께서…!”
서가진미가 서문 세가와 관련이 있음은 짐작은 했으나, 이렇게 내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이리 철저하게 준비해주실 줄이야. 감사합니다.”
유운은 보퉁이를 풀더니 감탄했다.
비상시에 쓸 금창약, 내상약은 물론 해독단에 벽곡단, 심지어 조명탄까지.
어지간한 상황은 다 대비할 수 있도록, 알뜰하게 채워져 있었다.
“내 생각이 짧았구나. 아무리 가깝다 해도 첫 무림행이거늘.”
옆에서 본 금만보가 아쉬워했다.
식량, 의복 같은 물자만 챙기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렇게 질 수는 없지. 다음에는 반드시!”
선의의 경쟁 역시 승부의 일종.
금만보는 불타는 눈으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노야.”
“뭐든 물어 보거라, 허허허.”
소화가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제가 듣기로 그 두 분이, 석 달 전에 혼인했다고 들었거든요?”
“그렇지. 백호처럼 의젓한 청년이고, 흑호처럼 늘씬한 처자이니, 누가 봐도 잘 어울린다고 하더구나.”
“노야는 안 이상하세요? 두 달 전에 아이를 낳았다잖아요.”
“…크흠!”
장노가 흠칫하며 헛기침했다.
“아기가 뱃속에 열 달은 있어야 나온다고 배웠는데. 어떻게 한 달 만에 나와요? 아무리 쑥쑥 커도 말이 안 되는데.”
소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설영이 몸을 움찔했다.
“공자님, 어떻게 된 일일까요? 무림인이라 무슨 특별한 수법이 있는 걸까요?”
“…….”
유운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공자님?”
“…으, 음양은 서로 어우러지고, 하늘의 도리는 합일을 바라며….”
“……?”
유운이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했다.
“으하하하! 각주께서 당황하는 모습은 내 생전 처음 보는구만!”
거암이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아하! 대주님은 아시는구나! 그 특별한 수법이 뭐예요? 나도 좀 알려줘요!”
소화가 다가오는 순간, 거암이 슬슬 뒤로 물러났다.
휘리릭!
설영은 대놓고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뭐예요, 나도 알려줘요. 알려줘! 알려달라고!”
소화가 소리치면서 쫓아갔다.
“하하하, 거암 대주도, 설 사부도 당해내지 못하니. 소화야말로 만서각 최강자였군요.”
“허허허, 맞는 말씀이십니다, 공자님.”
늦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새벽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던 어느 날.
두두두…!
유운, 그리고 인연으로 하나 된 이들이 서촌을 떠났다.
세상 밖으로.
좁은 연못을 벗어나서 넓은 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