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84화 (61/114)

제84화

백호문의 초대 (6)

“공자님, 때아닌 비 때문에 강물이 불었다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서쪽으로 크게 돌아가야 할 듯한데, 괜찮으신지요?”

“그게 어찌 정 마부의 탓이겠습니까? 그리하시지요.”

마부의 물음에 유운이 선선히 승낙했다.

약속된 날까지 시간은 넉넉하니, 조금 돌아가도 상관없었다.

유운 일행을 태운 마차가 들판을 가로질렀다.

드르륵.

소화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손을 뻗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뺨을 토독 두들기고, 선선한 바람이 솜털을 간질인다.

거기에 무르익은 황금빛 알곡으로 가득한 밀밭까지.

“와, 좋다.”

소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딸랑, 딸랑.

바람이 스칠 때마다 옆에 매달린 종들이 조그마한 소리를 냈다.

소화의 부탁으로 달아놓은 연꽃 모양의 장식물이었다.

외부뿐만이 아니었다.

좌석은 솜을 가득 채운 보료 덕분에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벽에서는 은은한 편백 향이 났다.

“온 가족이 함께 가을 나들이 가는 기분이에요.”

소화가 행복 가득한 얼굴로 말하자, 유운과 장노 또한 빙그레 웃었다.

“함께 보고, 함께 가고. 이 또한 삶의 즐거움 아니겠느냐.”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공자님.”

“가끔 보면 공자님이 장 노야보다 더 할아버지 같아요.”

“하하하!”

“역시 우리 소화로구나!”

“솔직히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소화의 말에 모두가 함께 웃었다.

거암이나 설영이라면 모를까, 이런 여유로운 여행은 소화나 유운에게도 처음이었다.

“물이 참 맑아요. 조금 있으면 더 예뻐지겠죠?”

소화가 멀리 북쪽 강가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벌써부터 나뭇잎이 동동 떠내려오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붉은 낙엽으로 가득할 터.

“우리 그때 다시 와요. 노을빛 강물이 그렇게 예쁘대요. 저 멀리서도 보러 온다는데, 정작 우리는 못 봤잖아요.”

상상만 해도 좋은지 소화가 계속 조잘거렸다.

쾌청한 날씨, 평화로운 풍경에 거암의 표정도 느긋해졌다.

“정말 살기 좋은 곳입니다, 천하육주는.”

“그러면 육주 아닌 곳은요? 남방은 어떤 곳이에요?”

소화가 커다란 눈망울로 거암을 올려다보았다.

“남방이라. 그 넓은 땅을 어찌 한 마디로 줄일 수 있겠느냐? 굳이 말하자면, 다채로운 곳이지.”

“다채롭다고요?”

“대평원은 넓고, 밀림은 빽빽하며, 고원은 높다. 끝없이 자연만 펼쳐져 있는 듯하지만, 곳곳에 맹수와 괴이한 부족, 이상한 현상이 가득하니.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땅이다.”

거암의 이야기에 흥미가 동한 것일까.

소화가 귀를 쫑긋하면서 바싹 붙었다.

“특히 내 고향, 대수림이 그렇지. 축축한 늪지와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나무 그리고 정열 넘치는 전사들이 사는 땅이란다.”

“그곳에 태어나셨어요? 살기 힘들지는 않아요?”

“물론 쉽지 않다. 풍요로우나 척박한 땅이니까. 하지만 ‘구르는돌’ 부족의 사내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지. 내가 열 살 때 말이다, 일장이 넘는 구렁이가 나를 덮쳤는데, 그 입이 얼마나 크던지….”

열심히 들어주는 청중이 있어서일까.

오랜만에 거암의 입이 풀렸다.

“…으으, 징그러. 그런데 어떻게 했어요?”

“어떡하긴 어떻게 했겠느냐. 그놈의 입을 잡고 콱!”

“으웩. 그래도 대단하네요. 거암 아저씨도 어린아이였을 텐데.”

“껄껄껄.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 아니겠느냐? 그때 내 팔뚝이 이미 네 허리만 했지. 내가 열 한 살 때는 악어가….”

“…우와!”

“열 세 살 때는….”

“…대단해요!”

거암의 이야기가 봇물 터진 듯 터져 나왔다.

신기한 이야기에 소화도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유운과 장노가 마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이 죽이 잘 맞는군요.’

‘허허허, 하늘이 내린 단짝이로군요.’

소화와 거암은 잠시라도 멈추면 큰일 난다는 듯, 열심히 입을 놀렸다.

그 모습이 하도 열정적이라 보는 사람도 즐거웠다.

반면 한 사람만은 달랐다.

“걱정하신 일은 없을 듯합니다. 설 사부, 이만 내려오셔도 될 듯합니다.”

“아닙니다, 주군. 모두가 마음을 놓는 그때야말로 가장 위험한 법! 저는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마차의 지붕 위.

설영이 굳건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아무리 좋은 마차라 해도 불편하실 터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건만.”

유운과 장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차의 공간은 넉넉해서 너덧 명은 타고도 남았다.

거암의 덩치가 산만 하다 해도, 소화가 콩알만큼 작으니, 큰 부담은 없었다.

그런데도 설영은 계속 천장을 고집했다.

“푸하하. 웃긴 녀석일세. 각주님, 저놈 마음대로 하게 하시지요.”

거암은 그렇게 박장대소하며 마차에 올랐고, 설영은 묵묵히 천장으로 향했다.

“설 사부가 강력히 원하고. 어쨌든 본인은 만족해하는 듯하니. 이대로 가시지요.”

장노의 말에 유운도 어쩔 수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일행은 그렇게 들판을 달렸다.

“이거 엄청 맛있어요, 공자님도 한 입 하시겠어요?”

“나는 괜찮다.”

“진짜 맛있는데.”

소화는 행복한 표정으로 아주머니들이 챙겨준 약과를 먹었다.

눈이 즐거운 풍경, 귀가 즐거운 이야기, 입이 즐거운 간식까지.

행복한 여행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반복되면 질리기 마련이다.

“심심해….”

이야기도, 간식도 쉬는 시간.

소화는 눈동자를 굴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드르렁, 드르렁.

한껏 이야기를 쏟아낸 거암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낮잠에 빠졌다.

장노 또한 기력이 달리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유운은 여느 때처럼 손바닥을 보면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재밌는 거라도 있으신가. 힝…’

소화는 감히 방해하지는 못하고, 유운만 빤히 바라보았다.

“…….”

“…….”

소리 없는 감탄, 기쁨, 호기심.

유운은 홀로 두루마리 속 세계를 노니면서 즐거워했다.

이내 소화의 시선을 눈치챘다.

‘녀석, 기특하구나. 놀아달라고 칭얼거릴 만도 한데.’

심심해 죽겠다는 표정인데도, 자신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는다.

소화 나름의 배려에 가슴이 따듯해졌다.

“심심하느냐?”

“아니에요, 다 같이 나와서 참 좋은걸요.”

말과는 달리 몸을 배배 꼬는 것이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었다.

“여행이란 것이 원래 그렇다더구나. 처음에는 신기하고, 즐겁지만 비슷비슷한 풍경이 반복되니. 어디 보자….”

덜컹.

유운은 의자 밑 공간에서 보퉁이 하나를 꺼냈다.

금만보가 챙겨준 여행 물품이었다.

화섭자, 기름, 문방사우, 옷 같은 기본 물품뿐 아니라 바둑판, 투전 같은 놀잇감까지 있었다.

“뭔가 더 챙겨주신다더니. 신기한 게 많네요!”

소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마차에서 하기에는 조금 그렇고…옳지, 이게 좋겠구나.”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기다란 물건을 꺼내 들었다.

푸른 대나무, 청죽에 구멍이 송송 뚫려있고 이음새는 매끄럽게 마무리되어있으니.

보통 정성으로 만든 물건이 아니었다.

“단소잖아요? 공자님 불 줄을 아세요?”

“방법은 알지만, 연습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못한다고 타박하지 말려무나.”

“히히히. 저를 위해서 불어주시는데, 어찌 그러겠어요?”

소화가 행복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유운 또한 웃으며 단소를 입에 가져다 댔다.

‘과연 음후(音侯)께서 말씀하신 대로 될지 모르겠구나.’

그간 읽은 책 중 음악에 관한 책만 수백 권이 넘으니, 음률 이론은 어지간한 악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실제 악기를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어느 구멍을 어떤 손가락으로 어떤 모양으로 짚어야 하는지, 바람은 어떤 세기로 불어야 하는지, 곡의 느낌은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

글로서는 전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두루마리는 달랐다.

직접 보여주고, 들려줄 뿐만 아니라, 충분히 느낄 시간까지 주니, 책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 도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다양한 길을 걸어보는 것 또한 무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 친구가 간만에 옳은 말을 했구나. 맞다, 운아. 경지를 올리는 데는 ‘마음의 평온’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마음을 호수처럼 맑게 만들 거라.

음악. 시. 그림. 조각…

유운은 두 스승의 권유에 따라 다양한 예술 활동을 경험했다.

그중에서 특히 강조한 것이 음악이었다.

“스승님, 어느 분의 가르침부터 받을까요?”

- …역시 그 선배밖에 없겠지?

- 끄응. 성질은 지랄맞지만, 실력만은 최고이니.

두 스승이 앓는 소리와 함께 추천한 신선이 바로, 음후였다.

- 세상 사람들은 음악을 흥을 돋우는 놀잇감으로 여기고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

동영상 속.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여인이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 악사가 품은 심상에 따라 봄날의 해처럼 따사로울 수도 있고, 북해의 설산처럼 시릴 수도 있으니. 음악이야말로 세상과 소통하고, 만물을 움직이는 원리.

- 어리석은 자들은 귀를 열고 본 후의 가르침을 들을지어다!

오만한 선언과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커다란 연못, 다채로운 꽃과 나무로 가득한 정원.

음후가 무릎 위에 대금을 올리고, 현을 뜯기 시작했다.

아무런 내공도 실리지 않은, 그저 선율뿐인 연주였다.

그러나…

투둥. 퉁. 투웅…!

솨아아…!

피이이…!

‘…맙소사!’

그녀가 한번 현을 튕길 때마다 나무들이 가지를 흔들고, 꽃들이 노래한다.

스스스스…

연못에 파문이 일더니, 곳곳에서 동심원을 그린다.

조약돌이 스스로 움직이며 음후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마치 하늘이 붓질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속에도. 바위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속에도. 음과 률이 숨어있으니.

- 마음의 문을 연다면, 귀를 연다면 능히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음악이야말로 만물의 근원이라는 오만한 태도.

그러나 당당한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어떤 곡이 좋을까.’

수많은 곡이 있으나, 그중 특히 음후가 특히 자신하는 곡이 있었다.

희노애락(喜怒哀樂).

음후가 스스로 걸작이라 자신하는 네 개의 노래였다.

유운은 곰곰이 고민하다 미소 지었다.

‘소화에게 가장 어울리는 곡은 이거지.’

희(喜), 기쁨의 노래.

두루마리 속 음후의 손짓을 따라, 유운도 같이 단소를 불었다.

피리리…피이…

첫 소절을 듣자마자, 소화가 나지막이 탄성을 질렀다.

“와…맑아요!”

깊은 산속을 흐르는 시냇물처럼 푸르고, 청아한 소리였다.

토독, 토독.

물방울이 부딪히듯, 운율이 경쾌하게 오르내린다.

조금씩 느려지다 나른해질 무렵.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운율이 고조되고.

화아악, 눈앞이 밝아졌다.

둥둥.

운율을 따라 소화의 마음도 하늘 위로 떠 오른다.

“좋다….”

소화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음악에 귀 기울였다.

은은한 달빛, 솜사탕 같은 구름.

선녀가 되어 하늘을 노니는 기분이었다.

시원하면서도 따듯한 달빛이 심장에 스며들었다.

스르륵.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나른한 기운이 몰려왔다.

수많은 별이 까르르 웃었다.

투둥, 퉁.

피이이…이이.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음후와 유운의 음악이 어우러지니.

소화도, 거암도, 장노도 모두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백일몽(白日夢).

한낮에 꾸는 행복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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