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85화 (62/114)

제85화

백호문의 초대 (7)

“하아암. 잘 잤다. 이거 몸이 찌뿌둥…으응?”

거암이 크게 기지개를 켜다 멈칫했다.

비교적 넓다지만 마차의 공간에는 한계가 있다.

거기에 덜컹거리기까지 하니, 몸이 쑤시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몸이 왜 이리 개운하지?”

온천에서 땀을 푹 뺀 후 자고 일어난 것만 같았다.

몸뿐만이 아니었다.

“오래간만에 좋은 꿈 꿨네, 크흐.”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대주?”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고향 꿈을 꾸었습니다, 각주님. 부족의 전사들과 함께 대수림을 질주하는 꿈이었습니다.”

거암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듯 웃음 지었다.

“허어. 신기하군요. 저 또한 기분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노야께서는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손자와 함께 시골에서 행복하게 사는 꿈이었습니다.”

“노야께 손자가 있었습니까? 저 몰래 혼인이라도 하셨나 봅니다.”

유운이 짐짓 짓궂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안 했습니다만, 있습니다.”

장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소화 너는 어떠했느냐?”

“저는요,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곳에 있었어요, 히히.”

소화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무마다 빙당호로가 맺혀있고, 꽃밭에는 화산표설이 자라고 있는 곳이었어요. 하늘에는 솜사탕이 떠 있고, 시냇물에는 꿀물이 흐르고요…!”

소화가 들뜬 얼굴로 열심히 꿈 이야기를 했다.

달콤한 것으로 가득한, 소화만의 낙원에 모두가 웃음 지었다.

“거기서 진짜 많이 먹었는데. 괜찮겠죠?”

소화가 불안한 듯 자기 배를 내려다보았다.

기분 탓인지, 어제보다 볼록해진 것만 같았다.

“하하하, 꿈속에서는 많이 먹어도 괜찮단다.”

“휴, 다행이네요. 다음에도 꼭 같은 꿈을 꿀 거예요.”

소화도 유운도 기분 좋게 웃었다.

‘음후께서 하신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구나!’

고작 며칠 연습한 것이 전부였는데 이 정도 효과라니?

제대로 갈고 닦으면 어찌 될 것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두두…!

기분 좋은 낮잠을 마치고, 마차는 다시 달렸다.

해가 저물어 사이로 고개를 숙일 무렵.

일행은 야트막한 능선에 마차를 세웠다.

“뒤편은 바람을 막아줄 언덕이 있고, 시냇물도 가까우니 이곳이 좋겠군요.”

“마차도 있으니 천막은 하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주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어찌 혼자 일하도록 두겠습니까? 저도 돕겠습니다, 설 사부.”

유운의 말에 설영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편하게 대해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종 간에는 마땅히 따라야 할 법도가 있는 법! 이는 본가의 예에 어긋난 일입니다.”

“허나….”

“무엇보다 천막을 지을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이런 일은 시킬 녀석은 따로 있지요. 후후.”

설영의 뒤편.

이미 거암이 목재 뼈대와 그늘막, 지지대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보십시오, 각주님. 비리비리한 설영 따위는 못 하는 일이지요, 으랏차!”

쿠웅!

거암이 손짓할 때마다 커다란 기둥이, 무거운 쇠막대기가 땅에 박혔다.

“어찌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장노가 눈을 크게 떴다.

단순히 힘만 센 것이 아니었다.

쿵쿵.

혹시나 등이 배길까 봐 땅을 고르고.

맞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마차와 바위를 옮기고.

비가 와도 젖지 않도록 배수로까지 만들었다.

“거암 대주를 보니, 거친 들판이 오히려 더 편안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러니 대수림의 주인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만든 천막에서, 간단히 식사했다.

그리고 남은 여유 시간.

“노야, 온종일 심심하셨을 텐데. 바둑 한판 어떠십니까?”

“허허허, 자신 있으십니까, 공자님? 이래 봬도 본가 안에서만큼은 국수(國手)로 불리던 몸입니다.”

장노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바둑판으로 다가왔다.

별다른 취미가 없는 장노가 즐기는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바둑이었다.

딱. 딱.

고즈넉한 저녁.

바둑돌 놓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몇 년 만의 대국이지요?”

“이삼 년은 된 듯합니다, 노야.”

“흐음. 그동안 많이 느셨군요. 하지만 아직은 이릅니다, 일러요.”

장노가 흥이 난 듯 귀퉁이에 백돌을 놓았다.

“이거 대마가 위험에 처했군요.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다니.”

유운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흑돌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다섯 수 전에 놓았던 수는 실수가 아니라 이것을 노린 함정이었습니다.”

“과연 백리제일국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허허허.”

유운의 칭찬에 장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나이가 드셨음에도 총기가 여전하시니, 실로 다행이로구나.’

유운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야 박빙이었지,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수월하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유운은 최대한 버티다 져주었다.

“휴우. 아슬아슬하게 졌군요. 다음에는 꼭 이길 겁니다, 장 노야.”

“학문에 무공에 바쁘신 분이 어찌 바둑에까지 신경 쓰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일이니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기분 좋은 대국이 끝났다.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다.

드르렁, 쿨.

새액, 새액.

슬슬 사람들이 잠들 무렵.

유운은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은하수가 빛났다.

누가 검은 천을 뒤집기만 하면, 하얀 보석 가루가 땅으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얀 보석비라….’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와, 비다!”

“엄청 쏟아져!”

본가, 소학당 처마 아래.

일고여덟 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이얍! 본녀의 물 장풍을 받아라!”

“어림도 없지, 빗방울 따위가 어찌 본좌의 호신 강기를 뚫는다는 말이냐!”

여자아이가 빗물을 두 손 가득 받아서 뿌리고, 남자아이가 짐짓 턱을 쓰다듬더니, 재빨리 도망쳤다.

“거기서!”

“후후, 나의 보법은 천하제일이다!”

“흥, 내가 못 잡을 줄 알고!”

꼬맹이 둘이 신나게 뛰려 하자, 의젓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뛰다 옷 다 젖는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거라.”

“얌마. 젖으면 나무 태워서 잿물 만들어서 빨아야 하잖아. 그게 다 본가의 돈이라고.”

첫째는 듬직하니 동생들을 챙겼고, 둘째는 거친 말과 달리 동생들의 옷을 세심하게 털어주었다.

“운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거라.”

“걷기 성공했다고 막 뛰어다니면 자빠진다. 그럼 쓸데없이 약값 들어.”

두 사람이 막내 유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걷고 있어요. 책에서 군자는 걸을 때도 예를 잃지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두 사람은 똘망똘망한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세 살짜리가 스승님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어우. 저 애늙은이. 뱃속에 영감이 들어앉았네.”

“킥킥, 오늘부터 넌 애늙은이야!”

“운이 별명 생겼다!”

어른들의 사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시절.

괴롭힘이라고는 짓궂은 말 몇 마디가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껄껄껄. 녀석들, 참 보기 좋구나.”

등 뒤에서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작은할아버지다!”

“할아버지, 나 목말, 목말.”

“내가 먼저 할 거야.”

“흥, 무슨 소리.”

“야, 저리 안 비켜?”

“쥐방울만 한 게….”

조그마한 아이들이 동시에 떠들었다.

그 모습을 본 백리순명이 부드럽게 웃었다.

“너희가 커서도 이렇게 지내면 좋겠구나. 서로 싸우지 말고. 그럴 수 있겠느냐?”

“네!”

“네에에!”

“네이~!”

대답하면서도 킥킥대고 장난을 쳤다.

“그래. 꼭 그리하거라. 오늘의 약속을 잊지 말고, 잘 지키거라.”

백리순명의 눈이 하늘 어딘가를 더듬었다.

짧은 말속에 깊은 회한과 슬픔이 담겨있었으나, 아이들은 몰랐다.

“약속 잘 지킬 테니 선물 주세요.”

“맞아요, 예쁜 거로.”

“아니, 난 비싼 게 좋은데?”

아이들이 시끌시끌했다.

“허허. 가진 거라고는 가주께서 주신 검뿐인데, 이걸 줄 수도 없고. 대신 할애비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

“네!”

아이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같이 가자꾸나.”

“어? 비 많이 오는데요?”

“맞아요. 옷 젖으면 유모한테 혼나요.”

“설마 이 할애비를 못 믿는 게냐?”

처마 끝에서 백리순명이 짐짓 섭섭한 표정을 짓더니, 어서 오라는 듯 손짓했다.

“할아버지가 먼저 말씀하신 거니, 안 혼나겠지?”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빗속에서 놀겠어?”

“히히, 나 먼저 간다~!”

아이들은 주춤거리더니, 이내 신나서 달려갔다.

모두가 비에 흠뻑 젖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런데….

“어?”

“어어?”

“……!”

투두두두…!

쏟아지는 폭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티디디딩…!

아이들 머리 두 자 위.

투명한 막이 펼쳐지니.

빗물이 모조리 튕겨 나갔다.

“우와, 보이지 않는 우산이야!”

“대박, 대박!”

“할아버지, 나 이 우산 줘요.”

“나도, 나도!”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떠들었다.

“허허허, 너희들도 언젠가는 갖게 될 거란다. 물론 매우 열심히 수련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정말이죠? 약속했어요.”

“물론이란다.”

아이들은 다 함께 나무 밑으로 뛰었다.

모두를 뒤덮고도 남을, 커다란 나무였다.

“내가 정원사에게 들었는데, 이 나무에는 나이 든 사람만 아는 슬픈 전설이 숨겨져 있대.”

“뭔데, 뭔데?”

“무엇이냐 하면…. 확!”

“이익. 너어!”

서로 붙어있기만 해도 즐거울 나이.

아이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투둑. 투둑.

비는 끊임없이 쏟아졌고, 날도 으슬으슬해졌다.

아이들은 어느새 입을 닫고 어깨를 기댔다.

서로의 온기에 몸이 녹았다.

“좋다.”

“따듯해.”

그곳에서 아이들은 안전했다.

가슴이 아릿한 풍경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겠지.’

아련한 그리움도 잠시.

나이 들어 돌이켜본 느낌은 또 달랐다.

‘참으로 경이로운 광경이었지.’

강기의 막.

그것도 본인은 물론, 반경 한 장을 감쌀 크기라니?

‘적 대협이라면 할 수 있을까?’

유운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적인걸은 강기를 수월하게 다루는 고수였다.

‘강하긴 하지만…단순했지.’

뭐든지 녹이는 뜨거운 불덩이.

가끔 몸을 지키는 방패.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백리순명은 달랐다.

아이라고는 하지만, 일고여덟 명이 너끈히 들어가고도 남는 ‘강기막’을 만들어냈다.

‘만약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러한 방패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더 나아가 내 사람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다면.

어쩌면 그 시절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유운은 여행하면서도 고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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