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86화 (63/114)

제86화

백호문의 초대 (8)

화아아…!

감자를 다듬는 데 쓰는 주머니칼 위로, 신비로운 기운이 일렁였다.

흐리지만 하얀 기운.

얼핏 보면 검기지경의 세 번째 단계, 심백검기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지개처럼 온갖 색깔이 소용돌이쳤다.

‘출력(出力)만이라면 밀리지 않겠지만….’

단순히 힘만 따졌을 때는 강기지경 일층위와 비슷하거나, 넘어섰을 터.

유운이 바라는 것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게 강기의 전부일까?’

유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학 이론서에서도 흔히 말하고는 했다.

강철을 녹일 힘을 얻었으니, 무적이라고 여기는가?

천만에! 이제 막 대장간에 들어선 대장장이가 된 것과 같다.

뜨거운 쇳물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는, 오직 대장장이의 솜씨에 달렸다.

깨달음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지.’

유운은 한숨을 쉬었다.

“작은 단서에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법이지. 그러니 굳이 외부인에게 알릴 필요는 없지 않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오. 강기지경의 고수는, 우리만으로도 충분하지.”

명가끼리 맺은 무언의 약속이었다.

부끄러우면서도 다행인 것이, 유운 역시 명가의 일원이었다.

무엇보다 백리순명은 가문의 아이들에게 깨달음을 나눠주길 망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강기를 그저 극도로 압축한 내공 덩어리로만 여긴다. 뜨겁고 단단한 칼날이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나가다 툭, 깨달음을 던지기도 했다.

“어찌 부수고, 녹이는 것만이 강기의 전부이겠느냐?”

“너희의 상상력을 제한하지 마라. 의지가 있는 자는, 능히 찰흙처럼 빚어낼 수 있으리니. 흙의 알갱이 하나하나를 느껴라! 그리하면….”

백리순명이 손짓하자, 머리 위에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너를 젖지 않게 하는 우산이 될 것이며.”

몸 앞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너의 몸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이고.”

바람도, 나뭇잎도, 암기도, 검도.

투명한 방패를 넘어서지 못했다.

“가문을 지키는 방벽이 될 것이다.”

‘……!’

솨아아…!

무수히 많이 쏟아지는 화살비!

세가의 모든 기관 진식이 동시에 그를 공격하였으나.

후드득.

쿠아아앙!

마치 절벽에 부딪힌 파도처럼, 모두 스러져갔다.

“본질을 이해하는 자만이 진정한 강기를 이루리라!”

우르르…!

웅혼한 외침이 가문을 울렸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빨리 어른이 되었다.

서로 아끼는 이들은, 서로를 탓하고 질투하게 되었으니.

백리세가 최고수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더는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지.’

몇 줄 안 되는 가르침. 그러나 까마득히 깊은 깨달음 담겨있었으니.

십 대 초반이었던 첫째나 둘째나 간신히 기억할까, 그 밑의 아이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유운은 모두 다 기억했다.

“온 힘을 다해 세상과 싸우려 들지 말거라. 지쳐 떨어져 나갈 테니.”

‘……!’

“제대로 강기를 다룰 때는 억지가 필요 없다. 한치도 더할 필요가 없고, 한치도 덜 필요가 없을 테니까.”

백리순명은 막대한 내공을 소모하는 강기를 ‘찰흙처럼 다루는 방법’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쓰라는 말씀이신데.’

힘의 낭비가 없으니, 지칠 일도 없으리라.

하지만 길은 안개 속에 쌓인 듯, 흐릿하게만 보였다.

‘알 것도 같은데….’

잡힐 듯 잡히지 않으니.

유운의 머릿속이 간질간질했다.

* * *

차르르.

선선한 바람에 황금빛 밀밭이 일렁인다.

너른 들판 너머로 야트막한 언덕이 굽이쳤다.

“후읍. 살 것 같아!”

소화는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백리세가는 엄격함이 지나쳐서 종종 숨이 막히고는 했다.

서촌에서 느낀 자유로움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유운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이토록 여유로운 여행이라니.

피이. 피이이…!

청아한 선율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소화는 눈을 감고, 마음을 열었다.

“좋아.”

따스한 햇살과 향기로운 음식 냄새.

소화는 어느덧 잠에 빠져들었다.

‘피곤했던 모양이로구나.’

아무리 좋은 마차라도 덜컹거림이 없을 수 없다.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무릎 베게 해주었다.

조용한 가운데, 맑은 울림이 은은하게 퍼졌다.

다그닥, 다그닥.

푸르릉…!

말들이 기분 좋은 듯이 콧김을 뿜었다.

“신기합니다, 공자님. 이쯤 되면 이 녀석들이 힘들어할 때가 되었는데, 이리 생생하니.”

마부가 유운을 돌아보며 놀란 눈을 했다.

자신 또한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솟는 것을 보니, 유운이 뭔가를 했음이 분명했다.

유운은 말없이 웃으며 청죽단소를 불었다.

- 허어. 운율로 사람과 동물의 마음을 움직이다니.

- 음후의 제자놈들도 그리 어려워하던 일을 저리 쉽게 할 줄이야.

두루마리 속.

매화검선과 종남일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탄했다.

- 이 친구야, 목소리 낮추게. 우리 때문에 운이가 이상한 녀석 되겠네.

- 끄응. 지금도 안 들릴 정도로 작게 말하고 있는데. 어찌 더 작게 하란 말인가?

종남일패는 투덜거리면서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덕분에 유운은 오직 운율에만 빠져, 심상에 잠길 수 있었다.

‘고작 다섯 가지 음만으로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니. 음악이란 실로 놀라운 기적이로구나.’

청죽단소를 불 때마다, 잔잔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유운은 마치 호숫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물결이 철썩이며 발끝을 간질였다.

‘소리 또한 움직이며, 약동한다더니. 과연 음후께서 말씀하신 대로구나.’

은은한 소리의 울림.

‘파동’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 음악은 결국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법. 그런데 정작 소리의 본질을 아는 자는 없었다.

음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 본녀는 평생 이를 고민하고, 연구해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소리의 본질은…바로 파동이라는 사실을.

‘……!’

- 소리는 떨림이고, 물결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진정 음(音)을 이해할 수 있으니!

바로 그곳이, 음후의 이론이 음악에서 무공으로 발전하는 부분이었다.

- 수면에 기를 발출하여 파문을 일으킨 후, 반대쪽에 똑같은 파문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

- 상쇄!

‘……!’

- 정확한 힘을, 정확히 반대로 작용시킨다면 서로가 서로를 무효화한다. 또한 같은 방향으로 쓸 경우, 오히려 강해지니. 이것이야말로 내 무공의 정수이니라.

음후의 가르침이 이어졌다.

이는 음악의 정수이자, 음공의 정수였다.

‘서로 간섭해서 상쇄하고, 서로 간섭해서 증폭한다라. 어쩌면….’

유운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반짝거렸다.

음공의 원리를 이용한, 새로운 무공이.

* * *

오전에는 고작 빗방울 몇 개였다.

그랬기에 식사 후, 장노와 소화, 설영과 함께 산책을 나왔는데.

투둑투둑.

투두두두…!

먹구름이 일더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상제께서 노하셨나, 비가 올 때가 아니거늘. 잠시 비를 피하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자님.”

“이를 말씀이십니까, 노야. 그리해야지요.”

문제는 장소였다.

하필이면 들판 한복판이라, 비를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우산을 들고 올 것을. 저의 불찰입니다, 주군. 송구하오나 저의 피풍의를 우산 삼아서….”

설영이 옷을 벗어서 씌우려던 때였다.

“비. 우산이라….”

유운이 눈을 감더니, 선 채로 명상에 잠겼다.

- 강기는 무엇이든 빚어낼 수 있는 찰흙과 같다. 너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여라.

백리순명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 음악은 너만의 세상을 만드는 힘. 상상력을 풀어놓아라. 운율이 스스로 길을 만들도록 하여라.

음후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무공과 음악.

서로 다른 분야의 거장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세상과 싸워서도 안 되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힘을 더해도 안 되고, 덜어내도 안 된다.

백리순명이 말하는 절묘한 균형과,

- 수면에 이는 물결을 보거라. 그저 세게 내려친다고 상쇄되겠느냐? 맞는 방향, 맞는 힘! 이를 통해서만 진정한 음공에 이를 수 있느니라.

음후가 말하는 상쇄는 결국 같았다.

‘균형이라. 방향이라….’

유운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쏟아지는 비 너머. 무언가가 일렁였다.

“설마 저건….”

“쉿!”

소화가 움찔할 때, 설영이 재빨리 입술 위에 손가락을 붙였다.

무인이라면,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정말 빚어낼 수 있을까?’

유운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명상에 빠졌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뭐든 베어내는 날카로운 검?

귀를 현혹하는 화려한 음악?

아니었다.

솨아아…!

유운의 마음속에 아련한 환영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곧잘 어울리던 장소.

그것은 나무였다.

‘커다란 그늘. 해도, 비도 모두 막아주는 그늘. 우리를 지켜주었던 그 나무처럼…!’

유운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백리순명과 음후의 가르침, 그리고 유운의 상상력이 하나가 되었다.

유운의 손가락 끝.

신기루처럼 무지개가 피어오르더니.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올랐다.

솨아아…!

투둥, 투둥!

반투명한 기의 막이, 쏟아지는 비를 막아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우산을 씌운 듯했다.

“와아…! 아름다워요!”

소화가 참지 못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커다란 나무가 자신을 지켜주는 기분이라, 안심이 되었다.

반면 설영은,

“으으…! 주, 주군. 주군!”

이를 악물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강기막!

소문으로만 들었지, 진짜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경지.

유운이 이룬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 자리에서 그만이 이해하고 있었다.

본가에 잠시 되돌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 가진 바 재능이 아까워서, 늦게라도 정신 차리길 기다렸거늘. 고작 막내 공자를 모시겠다는 말인가?

- 백리제일학사라. 말은 그럴싸하다만, 무가에서 학사 따위가 무슨 쓸모가 있겠나?

- 늙은 종놈에게 맡기는 게 아니었어. 잘못 크셨어. 하긴 한쪽 씨가 시원찮으니….

- 무학사 따위의 허튼소리도 하신다지? 쯧쯧. 어찌 본가에 이리 쓸모없는 자가 나왔는지.

본가의 늙은이들은 두 종류뿐이었다.

아닌 척 비웃거나, 대놓고 비웃거나.

그랬기에 더욱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강기막이라니! 고작 열일곱이시거늘. 크흐흑. 본가 놈들아, 보았느냐? 보란 말이다! 으하하!”

설영은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했다.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형태를 유지하면 되는 거였어.’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손짓했다.

그의 손을 따라서 우산도 같이 움직였다.

‘강기막을 저리 쉽게 다루다니.’

‘실로 절묘한 균형을 이루었구나!’

본가의 장로들이 보았다면, 눈을 번쩍 떴을 광경이었다.

고도로 압축된 내공이다.

조금이라도 힘을 더했다면, 폭발했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힘이 부족했다면, 이내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투명한 기의 막은, 꼿꼿하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음 장면은 더했다.

투둑, 투둑.

주르르르…!

빗방울이 보이지 않는 우산을 타고 흘러내렸다.

‘말도 안 돼, 빗방울 따위, 진즉에 증발해야 마땅하거늘!’

‘강기를 저리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다니? 석년의 가주조차 못했을 터인데!’

기는 모일수록 뜨겁고, 강해진다.

그랬기에 더욱 놀라운 광경이었다.

“썩 괜찮은 우산이지?”

“히히히, 최고예요, 공자님. 서촌에 돌아가면 자랑해야지!”

소화는 벌써부터 신이 났는지, 히죽 웃었다.

“공자님. 벌써 여기까지 성장하셨군요.”

장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공은 없지만, 본가의 직계를 가장 가까이서 보아왔다.

딱 한 번, 백리순명이 만든 강기막을 본 적 있다.

비록 그것보다 크기는 작지만, 훨씬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 ……!

- ……!

두루마리 속 두 스승은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 아름다운 꿈에서 깰까 봐.

혹시나 유운이 깨달음을 갈무리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