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87화 (64/114)

제87화

백호문의 초대 (9)

두 신선이 기다리던 밤이 되었다.

- 이토록 어린 나이에 강기막을 만든 녀석을 본 적이 있나?

- 없지, 없고말고. 들은 적도 없네.

두 스승이 뿌듯한 얼굴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강기지경의 고수 중에서도 소수만이 이룬 성취였다.

- 어지간한 문파의 장로들 따위는 찜쩌먹겠구만.

- 흐흐흐, 이 녀석이 우리의 제자야, 제자라고!

- 이걸 제자 자랑하던 무당의 말코놈이 봤어야 하는데.

- 아무렴. 콧대 높은 그놈도 운이를 보면 뒤집힐걸세.

무공의 고하는 단순히 힘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강기를 단지 잘 드는 칼로만 쓰는 자가, 자유롭게 형태를 변경하는 자를 당해낼 리 없다.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스승님.”

유운이 겸손하게 말하며 기의 막을 펼쳤다.

솨아아…!

반투명한 막이 하늘하늘 드리우니.

마치 여인의 얼굴을 가리는 면사와 같았다.

- 허어. 자연스럽게 흩날리는 형태라. 생각해보지도 못했구나.

기특한 제자는, 놀라운 성취를 이룬 날조차 쉬지 않고 무공을 연구하고 있었다.

- 조금은 천천히 가도 되거늘. 이토록 몰아붙이다니.

매화검선은 혹시나 너무 빠른 성취로 인해, 마(魔)에 빠질까 걱정했다.

- 이 친구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운이의 얼굴이나 보게나.

- …과연!

눈동자는 고요하고, 입매는 부드럽게 휘어졌으니.

그 누구보다도 안정돼 보였다.

그래도 노파심을 지울 수 없었다.

- 너의 성취는 네 또래는 물론, 그 위 배분에도 비할 자가 없을 것이다. 천천히 가도 되는데, 왜 이리 서두르느냐?

스승의 엄한 목소리 속에 숨겨진 걱정을 모를 리 없었다.

“되찾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 무엇을?

“함께 뛰어놀고, 함께 웃었던 그 시절을요.”

유운의 눈이 아련한 과거를 되짚었다.

격의 없이 어울리던 형제들은, 각자의 욕망과 신분, 목적을 갖게 되었고.

갈가리 찢어져 서로의 적이 되었다.

- 힘을 가진 자는 응당 쓰고 싶은 법. 더 많은 것을 원하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요. 작은할아버지조차 해내지 못한 일이었으니까요.”

유운이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제가 큰 나무가 된다면. 본가 모두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무가 된다면. 그런 날이 다시 오지 않겠습니까?”

- 선재로다, 선재야!

매화검선이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 모습은 유운에게서 무언가를 깨달은 백리순명과도 같았다.

“더욱 열심히, 죽어라 노력해야겠지요.”

사람의 욕망과 다툼에는 끝이 없으니.

세가의 최고수인 백리순명조차 막지 못했다.

- 얼마나?

“송구하오나 그분의 힘으로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니 더욱 높은 분의 발자취를 따라야겠지요.”

유운은 자신이 아는 강한 자를 떠올렸다.

- 더욱 높은 분? 누구를 말하는 게냐?

종남일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나올 말이 두려운지, 매화검선이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 크흠. 네 마음은 알겠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 사람이 말을 했으면 끝을 내야지, 무슨!

종남일패의 말에 유운이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위대한 선인의 뒤를 쫓고자 합니다.”

- 누구를 말이냐?

“바로 화산제일검이십니다.”

- ……!

종남일패가 입 떡 벌렸다.

‘뭐, 뭐야 이건? 자네, 설마?’

‘아니야, 아닐세. 오해라고!’

매화검선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종적을 알 길이 없다는 말은,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 분명 세상의 끝에서 고된 수련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수백 년간, 한시도 쉬지 않고.”

- …커헙!

매화검선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니었다.

도원경 구경도 하고, 영물들이랑 놀기도 하고, 가끔은 여자 신선도 쫓아다녔다.

- 펴, 평생 수련만 했으니, 조금 쉴 수도 있지. 아, 안 그런가?

- 큭큭큭, 크흡!

매화검선의 속삭임에 종남일패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욕칠정조차 버리고, 더 높은 경지를 위해 경주하고 계시겠지요.”

- 크흡. 크으으흡…!

웃음을 참느라, 종남일패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 속세를 벗어난 후, 체면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기는 했지. 큭큭. 하선고한테 몇 번 차였더라?

- 이, 이놈아! 목소리가 커!

매화검선이 다급하게 종남일패의 입을 막았다.

“지금도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고행을 하고 계시겠지요.”

아니었다.

직접 담근 매화주도 마시고, 진귀한 요리도 즐겼다.

게다가 어렵게 구한 천도복숭아를 입에 막 넣은 터였다.

선과(仙果)!

영혼을 맑게 하고, 영기를 축적하니 세상에 비할 바 없는 보물이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과일이거늘.

오늘은 그렇게 쓸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분의 위엄 넘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세상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다는 당당한 모습이. 승천하는 용과 같은 모습이 말입니다.”

유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무거웠다.

- 위엄, 당당…용. 끅윽. 끅끅!

종남일패는 숨넘어갈 듯 웃었다.

- 그게 아닌…컥, 컥컥!

매화검선은 목에 복숭아가 걸렸다.

“지금 제 모습을 보면 실망하실 터. 그러니 제가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 …시, 실망. 너를 보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승님. 결코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을 터이니.”

피이…!

유운이 청죽단소를 불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 흐흐흐, 신선으로 모자라서 용이란다, 용! 크하하하!

- 흐흡. 으으…!

제자는 마음의 평온을 얻었지만.

정작 스승은 가슴이 꽉 막혀버렸다.

* * *

마차가 달린 지 사흘째.

푸르렀던 숲은 어느새 헐벗은 민둥산이 되었고, 맑았던 강물은 누런 흙탕물이 되었다.

드문드문 마주치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으으. 듬성듬성 구멍 난 게 꼭 대머리 아저씨 같아요. 여기는 왜 이래요, 공자님?”

소화가 진저리치며 물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이기에 그렇다.”

“조씨 아저씨가 땅을 쉬게 하면 더 건강해진다고 그랬는데.”

“분명 자연은 그러하다. 문제는 사람이지.”

유운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천하는 넓고도 넓으니.

천하백가라 해도 힘이 닿지 않는 지역이 있었다.

힘의 공백이 생기는 부분이.

얼핏 보면 못된 관리도, 세금도 없는 낙원.

하지만 이곳은 무림이었다.

“주인이 없는 땅은 보호자가 없는 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간악한 자들이 어찌 행동하였겠느냐?”

마차의 천장 위. 설영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아….”

그 결과는 어린 소화조차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 없는 쓰레기통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벌레가 꼬였으니까.

“부끄럽게도 여기에는 백성을 지켜줄 자가 없으니. 이런 곳을 일컬어 공백지(空白地)라고 한단다.”

유운이 씁쓸하게 말하며 소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차는 주인 없는 땅을 질주했다.

까악까악.

황폐한 땅, 생기 없는 하늘.

까마귀들이 기분 나쁘게 울었다.

“도주…아니 피난의 흔적입니다, 주군.”

설영이 재빠르게 살핀 후 보고했다.

언덕 아래로 형편없이 부서진 마차가 보였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단 말입니까? 설마 마수입니까?”

“마차 안의 재물만 쏙 빼어갔으니, 마수는 아닌 듯 합니다.”

설영의 말을 장노가 받았다.

“요즘 사교(邪敎)가 득세한다고 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일 것입니다.”

“사교라니요? 어떤 무리들입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땅의 기운은 쇠했고, 하늘의 기운은 어지러우니. 이번 천하는 끝이 나야 마땅하다.”

“……!”

장노의 말이 모두가 숨을 죽였다.

“세상을 정화할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 억압받는 자들을 구원하고, 오만한 귀족들을 벌할 것이니. 붉은 눈을 한 미륵이 세상을 정화하리라!”

“으으…, 왠지 무서워요.”

불길한 울림에 소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화라.”

유운이 긴 한숨을 쉬었다.

누가 누구를 정화한다는 말인가?

그 대상은 누가 결정한다는 말인가?

고작 한 단어.

하지만 그 안에는 음모와 피 냄새가 가득했다.

“붉은 눈의 미륵이라 함은….”

“적안미륵교, 보통 적미교라고 하는 사교도입니다.”

“……!”

“명가의 권역 바깥. 맹의 손길이 닿지 않는 변경에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맹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사교도를 추종하는 마적단이 곳곳에 창궐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지 않군요.”

유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천하의 중심은 어지러운데, 바깥은 사교도와 마적이 들끓는 풍경.

역사서에서 많이 보지 않았던가?

“천하에 난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걱정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천하대란이라….”

아직은 맹의 힘이 강성하다.

그러나 곳곳에 균열이 조짐이 보였다.

“남은 여정, 각별히 조심하셔야 할 듯합니다, 주군.”

설영이 굳은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해야겠지요. 이곳은 누구의 땅도 아니니.”

유운 일행은 무거운 마음으로 여정을 이어갔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일행은 버려진 마을에 도착했다.

“이건….”

유운이 뼛조각을 만지자, 뼈가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확실히 마수로군요. 죽기 전에 이미 모든 생기를 빨렸습니다. ”

설영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마, 마수요?”

소화가 바들바들 떨었다.

사람 잡아먹는 괴물.

어렸을 때 머리맡에서 종종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설영이 마을을 살피고 말했다.

“사교도에 마적에 마수까지. 천하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장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걱정하십시오. 아무리 내부가 혼란스럽다 한들, 맹이 두고만 볼 리 없습니다.”

유운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것은 맹에 대한 믿음이자, 바람이었다.

“부디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바깥은 허허벌판.

일행은 마을 어귀에 자리 잡고, 야영을 준비했다.

유운이 허물어져 가는 마을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유운은 빛바랜 유골을 보며 탄식했다.

한 사내가 기어가던 자세로 죽어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운 듯 움츠린 와중에도, 무언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찢긴 옷가지 사이로 고풍스러운 일곱 개의 현이 보였다.

칠현금(七絃琴).

불운한 악사는 죽어가면서도 금을 놓지 않았다.

휘이잉…!

바람이 불자 해골이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이름 모를 악사는 무엇을 쫓아 변경까지 왔을까.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이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유운은 서글픈 표정으로 악기를 집어 들었다.

티잉…!

낡았지만 소리가 맑으니, 잘 관리된 물건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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