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백호문의 초대 (10)
“부디 위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유운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칠현금을 집어 들었다.
머릿속에서 음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슬픔은 마음을 좀먹는 독. 참을수록 커지고, 독해지니. 차라리 한바탕 울고 넘어가는 게 낫다.
그랬기에 유운이 이번에 고른 노래는 애(哀)였다.
- 슬픔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기쁨을, 분노를, 행복을 알겠느냐. ‘애’야말로 네 곡의 기본일지니.
유운은 음후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현 위에 손을 올렸다.
투둥. 팅. 팅.
유운의 손놀림에 따라 부드러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
“……!”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가늘게 이어지는 선율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요, 가파르게 오르다 떨어지는 선율은 홀로 남은 자의 슬픔이었으니.
뚝. 뚝.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더는 아등바등하고 싶지 않구나.’
마음이 고통스러우니, 세상조차 그대로 멈추어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애’가 진정 바라는 바는 그런 ‘절망’이 아니었다.
티이잉…!
유운이 한껏 잡아당겼던 현을 놓는 순간.
폭우가 내린 후 하늘이 맑아지듯, 답답했던 마음이 씻겨 내려갔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듯, 마음에도 따스함이 번졌다.
‘아아…. 이것이로구나.’
‘삶은 이토록 아름답구나!’
슬픔에 젖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풀어졌다.
동시에 멈추어있던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음 또한 삶의 일부! 위대한 대정령께서 여러분을 돌보아주실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나의 길을 가겠소. 흐으읍! 차! 흐으읍! 차!”
거암은 나름의 방식으로 예를 표한 후, 바위를 들어 올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럴 때일수록 몸을 보(保)해야 하지 않겠나?”
“맞습니다, 어르신. 간은 어떠십니까?”
“딱 좋군. 입맛이 도니 힘이 나네, 그려.”
마부와 장노는 더욱 신경 써서 식사를 준비했다.
“얘들아, 힘든데 미안. 조금만 도와줘.”
소화가 주인 없는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꽃잎을 땄다.
그러더니 깃발과 마차 문을 꽃잎으로 장식했다.
“훨씬 보기 좋잖아? 역시 나야. 히히.”
흑과 백뿐인 세상에, 색깔 있는 물감을 칠한 듯했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 소화가 마을을 거닐 무렵.
신중한 얼굴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설영이 보였다.
휘이잉…!
바람에 검은 옷깃이 휘날리니, 전설의 살수처럼 보였다.
‘또 저러고 있네. 내가 속을 줄 알고?’
설영이 누구를 따라 하고 있는지, 이제는 소화도 알았다.
암영(暗影).
협객전에 나오는 주인공의 그림자 살수였다.
소화는 문득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갑자기 소리 지르면 까무러치겠지?’
소화는 발꿈치를 들고 뒤로 몰래 걸어 들어갔다.
“와아악! 나는 마수…꺅!”
큰 소리를 지르며 등을 밀었지만, 무림 고수인 설영이 당할 리 없었다.
설영이 슬쩍 피하니, 소화는 제풀에 앞으로 넘어졌다.
풀썩, 콩!
“치잇…. 실패잖아.”
소화가 입술을 내밀며 이마를 문질렀다.
“너 괜찮….”
설영은 소화가 다친 줄 알고 움찔했다.
다행히 먼지만 조금 묻고, 멀쩡했다.
‘그간 많이도 놀렸겠다?’
설영은 이내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마수치고는 많이 조그맣고, 많이 통통하구나.”
“토, 통통! 소화는 통통하지 않아요! 흡!”
말과 달리 소화는 급하게 볼에 바람을 뺐다.
“흐음. 통통한 얼굴로 땅을 굴러다니는 마수라. 무시무시하구나! 이름은…옳거니, 굴렁쇠 마수가 좋겠구나.”
설영이 작정하고 놀려댔다.
“아니야! 소화는 통통하지 않아! 안 통통! 날씬! 봐요, 흐읍!”
소화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배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설영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래도?”
설영이 뺨을 잡아당기자, 살이 찹쌀떡처럼 쭈욱 늘어났다.
“이이익! 이이익! 아니야, 아니라고!”
흥분해서 외치면서도 뱃살은 두 손으로 감추었다.
“으하하, 언제까지 내가 당할 줄 알았더냐? 요 녀석, 쌤통이다!”
오랫동안 참았던 만큼, 복수는 달콤했다.
설영이 속 시원하게 웃을 때였다.
“소화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유운이 말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소화를 일으켜 세웠다.
옷을 털어주며 상처는 없는지 구석구석 살폈다.
“괜찮아요, 소화는 끄떡도 없어요.”
말과는 달리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잘못 넘어지면 다칠 수 있는데. 다행이로구나.”
유운이 부드럽게 말하더니, 설영을 돌아보았다.
“설 사부, 그간 소화가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치기는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리하시면 되겠습니까?”
보기 드물게 진중한 어투에 설영이 당황했다.
“그, 그건 소화가 제풀에 넘어진 것입니다, 주군.”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소화는 아직 어린아이, 반면 설 사부는 어른이고, 또한 무인이지 않습니까.”
소화의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의 흔적이 역력했다.
아파서 우는 것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가끔은 엇나가고 가끔은 못되게 굴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보호해야지요. 어찌 모르신단 말입니까?”
유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기로 기습해도, 점잖게 웃던 사람이다.
그런 사내가 진심으로 꾸짖으니, 설영은 가슴이 답답했다.
“주, 주군, 그게 아니오라….”
“설 사부를 좋게 보았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실 줄이야. 참으로 실망입니다.”
“시, 실망!”
유운의 말에 설영은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에 화살이 박힌 것만 같았다.
실망입니다.
실망입니다.
실망입니다.
유운의 말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반대로 소화는 신이 났다.
‘공자님이 내 편을 들어주셨어! 역시 우리 공자님. 히히!’
언제 화가 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소화는 유운의 등 뒤에 숨더니,
베에에…!
얄밉게 혀를 내밀며 놀렸다.
‘으으으. 억울하다! 억울해!’
설영은 가슴을 부여잡고 외쳤다.
“소화야, 가자꾸나. 밥이 식겠다.”
“네, 히히!”
반면 소화에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토닥였다.
소화는 유운을 따라가면서도, 설영을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베에에!
소화는 다시 한번 혀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양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누르며, 우스꽝스러운 표정까지 지으면서.
“주구우우군! 억울합니다, 주구우우우우운!”
설영은 멀어지는 등을 보며 구슬프게 외쳤다.
* * *
이후로도 소화와 설영의 냉전은 계속되었다.
“흥! 베에에!”
“이 조그마한 녀석이!”
파지직.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상처는 괜찮으냐, 소화야?”
“소화는 끄떡도 없어요.”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만졌다.
아까는 몰랐는데 조그마한 혹이 생겼다.
“다행히 흉은 지지 않겠구나.”
소화의 혹이 결정타가 되었다.
“흐으음, 졸려요.”
“마차를 탄다 한들 피곤하겠지. 이리 눕거라.”
소화가 눈을 비비자, 유운이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베에.
잠들기 전, 소화는 씨익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저, 저 꼬맹이가!’
반면 설영에는….
“주군, 위에서 사방을 경계하겠습니다.”
설영이 마차 위로 올라갈 때였다.
원래는,
- 바람이 찹니다. 어찌 홀로 고생하십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꼭 한번은 그렇게 걱정해주었는데.
“…….”
오늘만은 아무런 말이 없었으니.
‘주, 주군!’
설영은 어쩐지 서러웠다.
지켜보던 거암이 통쾌하게 웃었다.
“네가 임자를 만났구나, 푸하하! 여인을 울린 벌이니라.”
“여인은 무슨. 되바라진 꼬맹이인데….”
설영이 말을 하다 움찔했다.
낮잠을 자고 있다는 소화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큭큭큭, 바보 녀석!’
거암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여인을 한두 명 울린 게 아니니. 다 너의 업보니라.”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늘에 맹세코, 아무 일도 없었다!”
평생 여인에게 손 하나 댄 적 없다.
오히려 사내놈들과 싸우느라 바빴다.
자기들이 반했다가 상처 입고 돌아갔는데, 대체 자신 보러 어쩌란 말인가?
‘억울하다, 억울해!’
설영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한쪽은 주군의 총애를 얻은 자.
다른 쪽은 주군의 총애를 잃은 자였으니.
싸움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점심 식사 후, 휴식 시간.
“언제까지 이럴 거냐? 그냥 화해하고 끝내.”
“그 꼬맹이랑? 어떻게?”
“눈치를 보아하니,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거 같은데….”
“바라는 거라니?”
“짐작은 가지만…, 직접 물어보아라.”
거암이 씨익 웃으며 돌아섰다.
“화해라. 못할 것도 없지. 주군을 위해서라면!”
설영은 소화를 찾아가서 헛기침했다.
“꼬맹아, 아까는 미안했다. 네가 그렇게 전력으로 달려들지 몰랐어.”
“흥, 그거 말고요.”
“그럼…, 아, 설마 볼 빵빵하다고 한 거?”
“이익! 아니라고, 아니야!”
“알겠다, 알겠어.”
설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이만 화해하자.”
“말로만요?”
“그러면?”
“노야께서 말만 번드르르 한 자는 믿지 말라고 하셨어요. 반드시 대가를 받으라고 하셨어요.”
“크흠. 노야께서?”
설영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무슨 의도로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지만. 이런 상황에 쓰라고 하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저는 말 대신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대가라. 그래, 뭘 원하느냐?”
차라리 잘되었다.
설영은 느긋한 표정으로 전낭을 더듬었다.
동전 몇 개, 대략 당과 서너 개를 살 정도의 돈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한 시진 동안 앉아있으면 돼요. 쉽죠?”
소화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그냥 가만히 있기? 고작 그것뿐이냐?”
설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대신 움직이기 없기. 약속할 수 있어요?”
“나를 뭐로 보고. 나는 고독랑 설영이다!”
설영이 피식 웃더니, 당당하게 대답했다.
육체 단련을 위해 채찍질을 당할 때도.
정신 단련을 위해 어둠 속에 홀로 버려졌을 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틴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거면 돼요. 설마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니겠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약속은 지킨다. 그것이 협객의 도이니라!”
설영이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실로 사내답고 든든한 모습이었다.
“좋은 자세예요, 후후후.”
“…음?”
꼬맹이가 저리 음흉하게 웃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설영은 어쩐지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