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89화 (66/114)

제89화

백호문의 초대 (11)

설영은 눈을 감고 마차의 좌석에 앉았다.

“움찔거리면 안 돼요. 다 망가지니까.”

소화가 무언가를 가져오더니, 얼굴 위에 무언가를 칠했다.

‘뭐 하자는 거지?’

설영은 무언가 찜찜했다.

최소 간지럼, 최대 꼬집기를 예상했다.

아무리 간지러워도, 아파도 버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다니?

슥슥.

얼굴 위로 가느다란 털이 지나갔다.

‘붓?’

글씨를 쓰기 위한 붓치고는, 지나치게 얇고 가늘었다.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으니, 벌칙치고는 참으로 수월했다.

그런데….

“허업!”

마부의 숨넘어가는 소리.

“크흡. 크흐흐…!”

이를 꽉 깨문 거암이, 웃음을 참는 소리.

“얘, 얘야. 이건 너무….”

잔뜩 당황한 듯한 장노의 목소리.

슥슥.

붓이 스칠 때마다, 얼굴에 무언가 덧입혀지는 느낌이었다.

‘옳거니. 얼굴에 낙서를 하고 있는 게로구나!’

설영은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고작 이런 장난에 약속을 깰 것 같으냐? 나를 잘못 보았다.’

설영은 자신만만하게 되뇌었다.

고작 한 시진이다.

아무리 웃기게 낙서해도, 지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주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설 사부께서 서촌, 아니 백리세가 제일의 미남이라고 하더니, 과연 다르군요!”

“호오. 이건 어지간한 여인네들도 상대가 안 되겠는데?”

무언가 대화의 방향이 이상했다.

얼굴 위의 느낌도 이상했다.

물감치고는 부드럽고, 냄새가 좋았다.

마침 입술에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

“음. 해봐요. 음. 아이 잘한다!”

소화의 말대로 하니, 입술에 이상한 느낌이 났다.

“여기서부터 중요하니까, 숨도 크게 쉬면 안 돼요.”

이번에는 속눈썹에다 대고 붓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설영은 참지 못하고 실눈을 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느다랗게.

마침 맞은편에 동경이 있었다.

그리고 설영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뭐, 뭐야 이건!’

눈꽃처럼 하야면서 발그레한 피부.

곱게 내리깔린 속눈썹.

난생처음 보는 미녀가 부들거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왕 씨네 아주머니에게 열심히 배웠어요. 자신 있다고요.”

“화, 화장이 지나치게 잘 된 것이 아니온지요. 마, 마치 미인도에서 걸어 나온 듯합니다.”

마부가 설영을 마주 보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허허허. 이건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장노는 칭찬을 해야 할지, 혼을 내야 할지 난감하다는 듯 너털웃음만 지었다.

“설 사부….”

유운은 무언가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마무리는 거암이었다.

“와우. 진짜 좋은데? 너, 좀 한다?”

거암은 큭큭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재능은 키워야지.”

“……?”

“이 기회에 떼라.”

‘아아아악!’

능글맞은 목소리에, 설영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아이, 참, 움직이지 말라니깐요. 설 사부, 당당한 사내대장부가 어찌 약속을 어기나요?”

금방이라도 발작할 그것만 같던 설영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사, 사내대장부!’

사내가 되기 위해서는, 사내가 아닌 모습을 해야 한다니?

부들부들.

설영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탁.

소화가 자기 손으로 설영의 손을 쳤다.

“움직이면 안 돼요. 그럼 처음부터 다시예요.”

‘죽으면 죽었지, 이 짓을 두 번은 못 한다!’

설영은 속으로 외치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소화의 계획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화장은 이만하면 되었고. 짜잔!”

소화가 날개옷을 꺼내더니, 설영의 몸 위에 걸쳤다.

날개옷은 놀랍게도 커지더니, 몸 위에 딱 달라붙었다.

“서, 설 사부께서 선녀님이셨구나!”

마부는 과정을 뻔히 보고서도 헛소리를 했고.

“으하하하! 어이쿠,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어, 선녀가!”

거암은 대놓고 웃어 재꼈다.

설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

마음속의 분노가 점점 더 커졌다.

금방이라도 폭발해서 괴성을 지를 것만 같았다.

“휴우. 제 죄가 큽니다, 설 사부.”

유운이 아련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주군. 절대 주군의 탓이…!’

설영이 속으로 외칠 때였다.

“모두 저로 인해 비롯된 일이니,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잘 듣고, 속에서 되뇌십시오. 설 사부가 마음을 다스리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구결을 암송했다.

“세상 모든 것은 처음부터 텅 비었으니, 새롭게 생긴 것도 없어진 것도 없다. 눈, 귀, 코, 혀, 몸은 물론 의식 또한 없다. 연자가 느끼는 빛과 소리, 향기, 감촉 또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으니….”

불가의 고승이 남긴, 현묘한 구결이었다.

[ 무상무색결(無想無色訣) ]

직접 내공을 키우는 구결도, 검초를 다룬 구결도 아니었다.

오직 마음을 정갈히 하여, 더 높은 경지로 이끄는 불가의 게송(偈頌)이었디.

- 허어, 운이 녀석이 무상선사가 남긴 게송까지 얻었을 줄이야. 오직 부동심을 가진 자만이 열람할 수 있는 가르침이거늘.

-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녀석이 운이 덕에 기연을 얻었구나!

한 줌의 무력도 없었으나, 마침내 육신의 탈을 벗어 던진, 위대한 스승이 남긴 구결이었다.

- 고통도 쾌락도 오직 나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이다.

-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면, 육신의 모든 감각 또한 다스릴 수 있으리라.

유운의 입에서 길고도 긴 구결이 이어졌다.

딱 들어도 현묘한 구결이었다.

평소라면 감사하며 음미하였을 터.

하지만 바깥의 시험이 그를 괴롭혔다.

‘으으으…, 주군, 너무나 괴롭습니다.’

슥슥.

소화가 붓질을 쉬지 않으니, 잠시만 고삐를 놓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유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결을 암송했다.

느릿한, 그러나 선명한 목소리가 설영의 귀에 박혔다.

‘주군께서 허투루 전하실 리 없다.’

설영은 유운을 믿고 게송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본래는 암시와 비유가 가득한 어려운 구결.

하지만 유운이 쉽게 풀어서 설명하니, 경지에 이른 설영이 능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감각은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라. 그렇다면 바깥의 자극에 휘둘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육신을 괴롭히는 수행도, 여인의 유혹도 모두 이겨낸 자가 전하는 위대한 깨달음이었다.

설영의 마음이 조금씩 현실을 벗어났다.

간지러운 털의 느낌도, 나지막한 웃음소리도 사라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빛이 보였다.

‘아아아…. 이것이로구나!’

설영의 얼굴에 환희가 감돌았다.

설영은 처음으로 육신을 벗어나, 영혼의 세계에 들어섰다.

“지, 진짜로 무아지경이라고? 여기서? 이 상황에서?”

어찌나 황당했던지, 거암이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렇구나, 이게 진짜 너였구나. 그동안 힘들었겠어.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내 이해해보마.”

거암이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에, 순간 주화입마에 들뻔하기도 했지만.

- 설 사부, 집중하십시오!

설영의 심상 세계.

천둥과 같은 목소리가 내리치는 순간.

설영은 모든 것을 잊었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도.

세상에 대한 분노와 핏줄에 대한 원망도.

모두 잊고 온전히 자신에만 집중했다.

‘세상이 이토록 작고 하찮거늘. 망념에 사로잡혀 있었구나!’

소화의 화장 덕분에 오히려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외부의 시선에 얽매여있는지.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는지.

‘나는 자유로워진다!’

‘나는 자유롭다!’

내공이 요동치며 격렬하게 몸 안을 질주했다.

콸콸콸…!

퍼엉!

오랫동안 막혀있던 벽이 뚫렸다.

삼단공이 아닌 사단공!

설영은 그토록 바라던 경지에 올라섰다.

그 순간, 설영의 뒤편으로 은은한 빛이 일었다.

“오오…!”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구나.”

절세미인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오는 듯하니.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쳤네, 미쳤어. 화장하면서 망아에 들다니. 젠장, 이걸 누가 믿겠냐고.”

거암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 와중에도 소화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화장을 했다.

“이건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에요. 고작 이런 일로 포기할 수 없어요!”

“허허허. 녀석.”

장노는 다시 한번 너털웃음을 지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그때.

두두두…!

땅이 울리는 진동이 들려왔다.

다수의 말이 달리는 소리.

사람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거암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황량한 수평선 너머.

낯선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번쩍!

날카로운 병장기의 냉기.

엄정하고 각이 잡긴 군기.

이제껏 보지 못했던 무인 집단이었다.

“선한 사람은 오지 않고, 오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하였거늘.”

장노가 탄식했다.

불길한 기운이 마차를 가득 채웠다.

유운 일행을 본 것일까.

백여 필의 말과 십여 대의 마차가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히이이잉…!

말 울음소리에 힘이 넘쳤다.

“전마(戰馬)로군요.”

유운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전투를 위해 개량한 말로, 돈이 있다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무리를 살핀 거암의 얼굴이 굳었다.

“숙련된 무인이 적어도 오십 아니 육십. 전문적인 전투집단입니다.”

전투 인원의 비율이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독특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차 전체를 백금으로 만들다니!”

무리의 중심.

번쩍이는 하얀 마차를 본 장노가 깜짝 놀랐다.

백금은 피로를 풀어주고, 독을 해독할 뿐 아니라, 상서로운 기운을 품어 주술의 도구로도 쓰였다.

“황금보다도 귀한 금속이거늘. 돈을 처발랐다는 말도 부족하군요.”

장노가 말할 때, 유운은 깃발을 유심히 살폈다.

“백 개의 뇌전, 그리고 은(隱)이라는 표기라. 그들이 분명합니다.”

“그들이라 하심은?”

“은씨세가입니다.”

“정말로 신비은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장노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육주 중에서도 가장 크다는 뇌주(雷州)를 지배하는 군벌.

일만 무인을 거느라고, 일백 야만족을 굴복시킨 서북방의 패자였다.

“작정하고 찾아도 보기 힘든 자들이거늘.”

드넓은 뇌주 어딘가에 있다는 점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위치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뇌전을 다루는, 기원을 알 수 없는 무공까지. 그랬기에 신비은가라 불렸다.

“누가 감히 천하백가의 기명문양을 흉내 내겠습니까?”

“은가라니. 차라리 다행입니다.”

명문의 이름을 들은 장노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흉포한 소문이 많기는 했으나, 신비은가 또한 천하백가의 일원.

천하육주를 함께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었다.

“우연치고는 공교롭군요. 보아하니, 저희와 목적지가 같은 듯합니다.”

“그 말씀은?”

“백호문주와 흑호방주께서 작정을 하셨나 봅니다.”

“……!”

천하육주 중 가장 먼 곳이 뇌주다.

그런데도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다?

“정말로 천하에 알리려 하시는군요. 그것도 성대하게.”

장노가 신음할 때였다.

두두두…!

분명 이쪽을 보았을 터인데.

은가의 누구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 저!”

“위, 위험합니다!”

장노와 마부가 기겁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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