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90화 (67/114)

제90화

백호문의 초대 (12)

히이잉…!

쿵!

충돌하기 직전에야 코앞에서 멈추었다.

구름처럼 먼지가 일었다.

“콜록, 콜록.”

장노와 소화가 동시에 기침했다.

“아무리 은가라지만. 무례하오!”

“이이익! 이건 고의예요, 고의!”

장노는 눈살을 찌푸리고, 소화는 화가 나서 방방 뛰었다.

“이놈들! 감히 주군께!”

“진정하십시오.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고 화를 내도 늦지 않습니다.”

유운 역시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이런 일로 검부터 뽑을 수는 없었다.

“어떤 이유든, 가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이놈들을…!”

거암이 이를 갈면서 앞을 노려볼 때였다.

“나는 은가의 일뢰대주 묵사웅. 정체 모를 자들은 어서 마차에서 내려서 무릎을 꿇을지어다!”

백곰 가죽을 뒤집어쓴 사내가 외쳤다.

“초면에 이 무슨 개소리냐.”

거암이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감히 은가의 행사에…. 흐음!”

외치던 묵사웅이 순간 말을 멈추었다.

어지간한 사내는 자신의 턱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거암은 달랐다.

“대주보다 큰 사람이 있을 줄이야.”

“구릿빛 피부! 설마 남방인?”

“이곳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거암을 본 대원들이 웅성거렸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 무장을 풀고, 본 대주의 검문을 받아라.”

“못하겠다면?”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야.”

묵사웅의 얼굴에서 번개가 지지고 간 듯한 흉터가 꿈틀거렸다.

스르릉!

서늘한 소리와 함께, 희뿌연 도기가 뿜어져 나왔다.

“감히 우리 각주님 앞에서 도를 뽑아? 죽고 싶어 환장한 게로구나!”

거암 또한 진심으로 분노했다.

화아악!

거암의 몸에 새겨진 문신에서 빛이 났다.

마치 피로 그린 듯한 기이한 문양이었다.

“……!”

“……!”

금방이라도 사람을 갈기갈기 찢을 듯한 무서운 기세!

일뢰대원들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일촉즉발의 상황!

유운이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다짜고짜 악적 취급하다니. 이것이 은가가 객(客)을 대하는 방식입니까?”

“본가의 귀한 분을 모신 행차이다. 너희와 비교할 수 없는 신분이시니,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신분이 높다 하여 짓누르고, 무리가 많다 하여 무시하고. 은가를 세우신 북뢰검협께서 보셨으면 참으로 기뻐하시겠습니다.”

유운의 말에 일뢰대주가 눈을 부릅떴다.

“네, 네놈이 감히···!”

대노하였으면서도 차마 도를 뿌리지는 못했다.

은가에 속한 이들이라면 시조가 남긴 유훈을 모를 리 없다.

- 퉷, 자라 새끼들이 더럽게 거만하네. 그놈의 핏줄 빼고 아무것도 없는 놈들이. 같이 한번 뒤집어보자, 얘들아!

- 참, 너희가 나중에라도 저 새끼들처럼 변하면··· 내 손에 죽는다. 알겠지?

북뢰검협은 위대한 전사이자 타고난 반골.

신분으로 짓누르는 행위를 용납할 리 없었다.

“만약 은가가 선조의 유훈조차 무시하는 무도한 집단이라면, 저 또한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유운이 담담하게 말하며 검집에 손을 올렸다.

“노오옴! 감히!”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만 같을 때.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묵 대주.”

학사복을 입은 자가 나서더니,

“저들은 적이 아닙니다. 칼을 거두십시오.”

“정 군사, 아니 될 말이오. 어떤 흉악한 자들일지 알고 뒤를 내준단 말이오?”

군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유운 일행의 깃발을 가리켰다.

“깃발에 새겨진 표식을 잘 보십시오. 이분들은 백리세가입니다.”

“백리세가? 이 황야 한복판에 백리세가라고? 나는 믿을 수 없소!”

묵사웅이 고개를 저었다.

“그야 확인하면 될 일이지요.”

군사는 느긋하게 말하더니,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눈먼 늙은 여인이 소리 없이 유운 쪽으로 다가왔다.

“감히 저놈들이···!”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거암 대주. 주술사입니다.”

“주술사라고요?”

유운의 말에 거암이 본능적으로 멈추어 섰다.

구르는돌 일족에게 주술사란 하늘과 소통하는 지고한 신분.

같은 일족도 아니고, 외모도 다르지만, 감히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눈먼 여인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깃발을 더듬었다.

“백리세가의 기명문양이 맞습니다.”

“진짜 백리세가라고?”

기명문양에는 가문의 독특한 술식이 새겨져 있으니, 쉽게 위조할 수 없다.

주술사의 확인에 묵사웅이 주춤할 때였다.

“유주(油州)의 백리세가라. 묵 대주, 자네가 실수했네. 백리라면 응당 예를 갖추어야지.”

덜컹.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마차에서 내렸다.

“와, 설 사부만큼 잘생긴 사람 처음 봐요!”

소화가 미공자를 보며 감탄했다.

미려한 이목구비.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무엇보다 두 눈동자의 색이 서로 다르니,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웠다.

“푸른색과 은색 눈동자. 설마···.”

“은발에 청은양안. 아마도 노아께서 생각하시는 인물이 맞는 듯합니다.”

“은가의 말썽꾸…. 아니 은호풍 공자로군요.”

장노는 입 밖에 내려던 말을 삼켰다.

앞에서는 은 가주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으로 떠받음을 받으나, 뒤에서는 은가의 망나니라고 욕먹는 인물이었다.

“오만하고, 제멋대로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공자.”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 아직 판단하기에는 이릅니다.”

장노의 속삭임에 유운이 답했다.

“수하의 무례로 인해 마음이 상하셨다면,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은호풍이 정중하게 두 손을 모르며 미소 지었다.

본래 잘생긴 자가 환하게 웃으니, 그를 싫어하던 사람들조차 호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소문과는 달리 예의가 바르군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장노가 감탄하며 자책했다.

“워낙 거친 뇌주 땅에서 살아온지라, 종종 실수하고는 합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정중하면서도 예를 잃지 않으니, 실로 명문의 후손다운 태도였다.

“은 공자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과연 관대하시군요. 유주의 명가다운 태도이십니다.”

은호풍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유주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이라지요? 미남미녀 또한 많고요.”

“과한 칭찬이십니다.”

“이런 오지에서 명문의 소저를 뵙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명문의 소저라니요?”

유운의 반문에 은호풍이 너그럽게 웃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같은 천하백가이니 형제 아니겠습니까? 굳이 내외하며 숨길 필요가···, 응?”

은호풍은 멈칫하더니 유운 일행을 살폈다.

덩치가 산만한 곰탱이, 다 죽어가는 늙은이, 비실대 보이는 학사 그리고 여자가 되려면 한참 남은 꼬맹이.

어디에도 기대하던 명문가의 소녀는 없었다.

“…….”

“…….”

정적.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으하하, 이렇게 장식하지 말라고 했잖느냐, 소화 이 녀석아.”

“허허허, 마차의 장식을 보고 오해하셨나 봅니다.”

거암과 장노가 나직이 말하며 웃음 지었다.

연꽃 모양의 종.

하늘하늘 늘어진 연분홍색 주렴.

거기에 사이사이 엮인 꽃잎까지.

겉만 보면 여인이 타고 있다고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여인이… 없어?”

은호풍의 눈에서 빛이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군사가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봄바람처럼 부드럽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백리세가의 막내? 쓸모없는 학사라고?”

스치고 간 눈빛에는 멸시가 가득했다.

뇌주는 멀고도 먼 서북쪽에 있으니.

유운의 소문을 믿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시커먼 사내자식들만 가득하다니. 괜히 먼지만 마시고. 젠장, 시간만 낭비했잖아!”

은호풍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더니, 몸을 획 돌렸다.

“뭐 하느냐, 어서 나를 들어 올리지 않고.”

마차까지 걷기도 귀찮다는 듯, 가마에 올랐다.

“예이, 예이. 어서 모시거라!”

시종들이 가마를 들어 올렸다.

“미개한 땅답게 공기조차 더럽구나.”

은호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거기에 먼지가 신경 쓰이는 듯 옷을 계속 털어내니.

어지간한 여인보다도 깔끔 떠는 모양새였다.

‘뭐, 뭐야?’

‘사람이 저리 한순간에 변한다고?’

유운 일행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공자님, 이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알게 뭔가. 묵 대주가 알아서 하게.”

은호풍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돌아선 묵사웅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들었느냐? 아까와는 상황이 달라졌구나.”

“하면 은가가 백리를 핍박하기라도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묵사웅의 압박에 유운이 나섰다.

“핍박이라니. 그저 일반적인 검문일 뿐이다.”

“이미 가문의 문양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문양은 진짜였지. 그러나 사람 또한 진짜일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모를 일이지. 적마단 같은 무도한 무리가 백리세가의 혈육을 해하고, 백리세가 행사를 하고 있을지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묵사영의 말에 어지간한 장노조차 화를 냈다.

“모처럼 만의 은가 행사이거늘. 무기를 든 자들을 뒤에 달고 갈 수는 없는 법이지.”

묵사영이 나직이 말하더니 뒤돌아섰다.

“거리낄 것이 없다면 보여주면, 우리처럼 보여주면 될 일 아닌가. 자, 보거라.”

묵사영이 거침없이 마차 문을 열었다.

안에는 검을 든 사내들이 가득했다.

“협박하는 거냐? 크흐흐. 이거 참, 손을 근질거리게 하는구나.”

“어찌 본가에 이리 무례하단 말이오!”

거암과 장노가 각각의 방법으로 화를 냈다.

“뭘 그리 화를 내시오? 숨길 것이 없다면, 이렇게 보여주면 될 일 아니오.”

은가의 군사가 옆에서 거들었다.

“설마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무언가라도 있다는 말이냐?”

묵사웅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다가왔다.

뇌주의 패자답게 은가에게는 적이 많았다.

그중에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암습했던 자들 또한 적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공자님?”

“대충 해, 대충.”

유운의 마차는 긴 주렴이 늘어져 있어서,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은호풍은 하품하며 푹신한 보료에 몸을 묻었다.

“공자, 제 생각에는···.”

묵사웅이 뒤를 돌아보는 척하더니,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이놈이!”

워낙 가까워서, 거암이 반응할 틈도 없었다.

벌컥.

묵사웅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마차 내부가 드러났다.

마차 안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

“……!”

은호풍은 입을 벌린 상태로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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