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백호문의 초대 (13)
반나절 전, 은빛 마차 안.
“가도 가도 흙모래밖에 없잖아. 젠장, 내가 왜 이딴 곳에 와야 해!”
은호풍은 창문을 닫으며 짜증을 냈다.
여행 내내 본 것이라고는 거칠고 황량한 땅뿐.
여인은커녕 술과 노래조차 없었다.
“수행원도 고작 대 하나라니.”
일뢰대와 시종, 마부까지 모두 합쳐 백여 명이 전부.
은가의 직계라고는 믿기지 않는 초라한 규모였다.
“조금만 참으시지요. 청수향에 도착하면 지내실 만할 겁니다.”
장 군사가 은호풍을 달랬다.
“쳇, 진짜 누님의 명만 아니었으면.”
은호풍은 그때를 떠올렸다.
* * *
보랏빛 주렴이 드리워진 내실.
은은하게 빛나는 촛불 사이로 사향 냄새가 풍겨왔다.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 속.
나른하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아, 나의 사랑하는 동생아.”
주렴 너머로 설핏 눈동자가 보였다.
은빛 머리카락, 자신과 똑같은 청은양안.
그 안에 담긴 색은 비취보다 깊으니, 은호풍보다도 더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네, 누님.”
은호풍은 살짝 긴장하며 대전을 올려다보았다.
외모는 닮았으나, 성격은 하늘과 땅 차이.
저렇게 따듯한 말을 건넬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여기가 어디냐?”
“가주전 아닙니까?”
가벼운 한숨이 들려왔다.
“…뇌주. 뇌주이지 않느냐.”
“그, 그렇지요?”
“뇌주 사람들의 성정이 어떠하더냐?”
“지랄맞…아니 용맹하지요.”
대륙의 서북쪽 끝.
폭풍과 번개의 땅, 뇌주.
날씨도 환경도 사나우니, 사람들 또한 거칠고 대가 셌다.
“그러하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는 자들이 아니지. 오죽하면 선대 맹주께서도 학을 떼셨겠느냐?”
천하육주가 저절로 이루어졌을 리 없다.
고집 세고 흉포한 자들이 끝까지 저항하였다.
뇌주는 영씨 일족이 가장 늦게 정복한 땅이었다.
그런데도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니.
달래기 위해 딸까지 시집보냈을 정도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잊으면 안 된다.”
“알고 있습니다, 누님.”
은씨 일가 고유의 은안(銀眼)과, 맹주 일가 고유의 청안(靑眼).
두 남매는 살아있는 정략혼의 증거였다.
“우리의 핏줄은 영광인 동시에, 족쇄이기도 하다.”
“…….”
“그러니 핏줄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씀은….”
은호풍은 무슨 말인지 눈치챘다.
“무언가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런데 제가 하필 바쁜 시기라….”
은호풍이 눈치를 보며 슬쩍 몸을 뺄 때였다.
“바쁘다고 했느냐? 은가의 가주인 이 몸 앞에서 감히?”
높디높은 태사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그런 말이 아닙니다, 누님.”
은호풍이 후다닥 자세를 바로 했다.
뒤늦게 눈앞의 존재가 누구인지 깨달은 것이다.
백뢰검후 은설란.
일만 무인을 거느린 은가의 독재자이자, 거칠고 사나운 뇌주의 패자였다.
“하긴 바쁘긴 하겠구나. 열심히 아랫도리를 놀리느라 말이다.”
“누가 그런? 모두 헛소문입니다!”
은호풍은 반사적으로 부인했다.
“주색잡기에 빠져서 무공 수련도 등한시한다지?”
“오, 오해입니다, 누님. 그게 아니라….”
은설란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부와 권력, 외모와 재능. 그게 어디 네가 잘나서겠느냐? 모두 은가의 혈육이기에 받는 특권이지.”
“그, 그건 그렇지요.”
“그만큼 재미를 보았으니 직계의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무, 무엇인지요?”
“작은 심부름이란다. 금방 끝날 거야.”
은설란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은호풍의 생각은….
‘엄청 멀다!’
바로 그다음 생각은….
‘내가 왜?’
보이는 곳 모두가 은가의 영역이다.
말, 아니 눈짓만 하면 모두가 알아서 굽신거린다.
향기로운 술, 감미로운 미녀, 안락한 잠자리까지.
이토록 편하고 즐거운 곳을 두고, 생판 모르는 남쪽으로 가라니?
“하하하, 소제, 생각을 조금만 더 해보겠….”
“우리 평이, 많이 컸네? 누나의 말에 말대답도 하고.”
“그, 그게….”
“이게 부탁으로 보이니?”
은설란의 목소리는 더없이 상냥했다.
하지만 입가 한쪽이 미세하게 비틀렸다.
‘허억, 저건 진짜로 화나셨다는 뜻인데!’
은호풍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흐으응. 네 놈이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은설란이 묘한 눈빛으로 위아래를 쓸어보았다.
“네 놈이 생각이 많은 건, 대가리가 두 개나 달려있어서겠지?”
“네…네?”
워낙 상스러운 말이라, 순간 이해가 늦었다.
“어차피 쓸모없는 물건. 하나쯤은 베어버려도 상관없겠지.”
은설란이 여상한 표정으로 검을 만지작거렸다.
파지직, 파지직!
검 위로 수많은 번개가 내리친다.
백뢰(百雷)!
은가의 적을 통째로 지워버렸던, 은가의 비기였다.
까닥까닥.
검 끝이 위와 아래를 왔다 갔다 거렸다.
마치 위를 자를까, 아래를 자를까 고민하듯이.
‘미, 미친!’
위를 자르든 아래를 자르든 죽는다.
그리고 은설란은, 한다면 하는 여인이었다.
은호풍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허억, 가, 가겠습니다! 누님, 가겠습니다아아!”
은호풍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 * *
‘젠장, 또 떠올려버렸네.’
은호풍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기억을 털어버렸다.
하지만 무서운 것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정세 파악은 무슨. 얼른 얼굴만 비추고 돌아가자.’
은호풍은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속도 올려.”
“예이, 예이. 뭣들 하느냐, 어서 달리지 않고!”
“존명!”
시종의 독촉에 마부들이 말을 채찍질했다.
푸르릉. 푸르릉.
과한 질주에 일부 말들이 거품을 물었다.
“…별일은 없겠지?”
은호풍이 찜찜한 얼굴로 묵사웅에게 물었다.
누구의 땅도 아닌 공백지다.
안 좋은 소문이 조금씩 들려왔다.
“저희 일뢰대를 못 믿으십니까, 공자님? 적의 머리 위에 내리치는 첫 번째 번개입니다! 마적이든, 마두든 단칼에 베어 버리겠습니다.”
묵사웅이 가슴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사람만? 마수는?”
“마수라면, 적잖은 피해는 있겠습니다만. 저희가 누굽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야.”
은호풍은 느긋한 표정으로 다리를 뻗었다.
순간 푸른 눈동자에 광채가 돌았다.
“이쪽 방향은 좋지 않아.”
“네?”
“이 더러운 느낌은…그래, 흉(凶).”
“……!”
“어렸을 때 마수랑 마주했을 때의 그 느낌이네. 우리 땅도 아닌데 굳이 싸울 필요 없잖아?”
은호풍이 귀찮다는 듯 말했지만, 모두 눈을 번쩍 떴다.
“공자님의 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서 말을 돌려라, 돌려!”
은호풍은 무능하고, 방탕하고, 게으르다.
그럼에도 가주가 괜히 그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은호풍은 ‘감’이 좋았다.
‘감이라니.’
장 군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학문을 배운 자로서, ‘감’ 따위의 모호한 감각을 맹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호풍의 ‘감’은 진짜였다.
“이건 흉보다 작네…, 소흉. 아니 그보다 약하니. 마적단 같은 건가?”
은호풍은 갸웃하면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시커먼 마적놈들, 면상 보기도 싫다. 이쪽으로 가자.”
“예이, 예이.”
은호풍의 ‘감’은 고작 좋다(吉), 좋지 않다(凶) 정도였다.
거리도, 방향도 정확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대단하지. 대단하고말고.’
장 군사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적을 압살하는 무공도, 눈을 현혹하는 주술도 아니다.
‘하지만 미래이지 않은가!’
천하제일인도 알지 못한다는 운명이다.
단편적이나마, 미래를 엿보는 능력이니.
이능, 아니 권능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야, 저기 안 좋아. 돌아가자.”
“예이, 예이.”
똑같은 황야인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지시했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감탄했다.
“긴 여정이 이토록 조용한 적 있었던가?”
“한 번도 없었지.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턱도 없는 일이지.”
공백지는 다른 말로 하면 무법지대.
머리 빈 산적이든, 이성이 없는 마수든.
한 번쯤은 마주칠 법도 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렇게 반나절 내내 달렸을 때였다.
“오호. 느낌 좋은데?”
반쯤 졸던 은호풍이 눈을 번쩍 떴다.
“어? 이거 정말 좋은데? 길…, 아니 대길이야!”
은호풍이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누님 이후, 이렇게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저쪽으로 가자! 어서 빨리!”
“예이, 예이!”
두두두…!
은가 일행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누님 하나만 믿었고, 결국 세가의 암투에서 살아남았다.
은호풍은 그때 이상으로 확신했다.
“뭔가 있어. 아주 끝내주는 게 있다고!”
그리고 그는 운명과 조우했다.
* * *
푸른 대나무처럼 맑은 기운을 가진 사내가 은호풍을 맞이했다.
“은 공자?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은호풍은 유운을 지나쳤다.
“공자님? 왜 친히 여기까지….”
의아해하는 묵사웅도 지나쳤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덜컹.
활짝 열린 마차 문 너머.
그녀가 보였다.
“이제야 알겠구려. 그대들이 왜 이토록 숨겼는지. 암, 숨겨야지. 보물일수록 꼭꼭 숨겨야 하는 법이지.”
“……?”
유운 일행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은호풍이 자연스럽게 마차 앞에 이르렀다.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이토록 고귀한 여인을 모시고 있었으니. 조심하는 것이 당연하오. 잘하셨소.”
봄바람처럼 따듯한 목소리였다.
“…어?”
소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은호풍에게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마차 안의 그녀만 보였다.
“유주의 여인이 기품있고 어여쁘다더니. 모두 거짓이었소.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소.”
다소 키가 큰 여인이 다소곳이 눈을 감고 있다.
옅은 분홍빛 뺨.
은은하게 반짝이는 입술.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눈을 감은 모습이 참으로 신비로웠다.
“그런 저속한 단어로 어찌 소저의 미모를, 고귀함을 표현할 수 있겠소?”
은호풍의 목소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속눈썹이 떨렸다.
그 순간, 은호풍은 온몸으로 전율했다.
‘이 여인이로구나.’
은호풍은 깨달았다.
‘나는 바로 이날을 위해서 살아왔구나!’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여인을 쫓고.
술에 취하고.
허세를 부리고.
전부 쓸모없는 인생이었다.
‘부끄럽구나. 너무나 부끄러워.’
빛 앞에 서야만 그림자를 볼 수 있는 법.
눈부시게 빛나는 여인 앞에서 지난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누구에게도 이렇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다.
혹시나 불면 날아갈까, 은호풍은 부드럽게 다가갔다.
정성에 감동한 것일까.
미녀가 반쯤 눈을 떴다.
백치미 가득한 그 눈빛마저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는 우육탕을 좋아하지만, 그대가 못한다고 하여도 상관없소.”
“……?”
은호풍이 뜨거운 눈빛을 보내더니.
덥석, 손을 잡았다.
“소저, 아이는 셋이 좋겠소.”
“……!”
“……!”
모두의 머릿속이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