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백호문의 초대 (15)
한 시진.
광란의 질주는 무려 한 시진에 걸쳐 계속되었다.
두두두…!
두두두…!
유운 일행은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은가는 집요했다.
우두둑!
말이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무너지면.
휘리릭!
몸을 날려 경공술을 펼쳤다.
“헉헉…!”
“흐흡. 내공이 떨어졌습니다, 조장님!”
“절혼단을 먹어라!”
“그, 그건 죽기 직전에 먹는….”
“공자님의 명을 못 들었느냐!”
“조, 존명!”
진원지기를 갉아먹는 약까지 먹고 달렸다.
하지만 무인이라도, 장거리 경주에서 말을 이길 수는 없다.
조금씩, 조금씩 거리가 벌어졌다.
“으아아!”
“아아…!”
“아…!”
서서히 절규하는 소리가 멀어졌다.
마침내 은가의 말이 점으로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헉헉! 주, 죽겠습니다. 더는 못갑니다!”
마부가 부들거리는 팔을 움켜쥐었다.
푸르릉. 히이…잉!
말도 입에 거품을 물고 비틀거렸다.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멈추어도 됩니다.”
유운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으. 까딱하면 잡힐 뻔했습니다. 운이 좋았군요.”
“운이 아니오.”
마부의 말에 거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은가의 무인들이 보기보다 약해서…?”
“그럴 리가. 대수림에서도 훌륭한 전사로 인정받을만한 자들이었소.”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당황하지 않고, 유운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진형까지 만들어서 일행을 포위하고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명성보다 더 뛰어나더군.”
고작 일개 대에 속한 무인들.
하지만 검기를 뿌리는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허면 저희가 어떻게 벗어났는지요?”
“우리에겐 명성보다 더, 더, 더 뛰어나신 분이 있지 않은가.”
거암이 히죽 웃으며 유운을 가리켰다.
“아아…!”
“각주님이 아니었다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포위망이었네.”
파바바박!
하늘을 가득 메우는 쇠사슬과 밧줄을 보았을 때는 정말 잡히는 줄 알았다.
‘크윽. 너무 많아!’
아무리 힘이 센 자라고 해도 손은 두 개.
어찌 수백 개의 무구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티디딩!
티디딩!
“……!”
유리잔에 부딪힌 빗방울과 같이, 맑은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솨아아…!
티디딩…!
포박 무구가 수없이 쏟아졌다.
대상(大象, 코끼리)조차 꽁꽁 동여맬 정도의 양이었지만.
누구도 유운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 벽이었지.’
마치 하늘 높은 곳에서 누군가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이곳을 넘지 말지어다!
무지갯빛 장벽 안에서 그들은 안전했다.
거암이 보았던 어떤 주술사의 가호도 이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대정령의 가호를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네.”
거암은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는 듯 두 주먹을 쥐었다.
“하하, 저도 공자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를 말인가, 허허.”
위기가 사람을 하나로 만든다.
일행은 더욱 끈끈한 무언가로 묶였다.
반면 한 사람만은 달랐다.
‘으드득. 이번만은 용서 못 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설영 스스로 받아들인 벌칙이니.
하지만 이번에는 선을 넘어도 너무 심하게 넘었다.
부르르…!
그때를 생각만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내놈이라니?
시커먼, 아니 느끼한 사내 녀석에게 손을 잡힌 기분은 정말 끔찍했다.
‘아무리 네가 귀여워도, 오늘만은 안돼.’
이번만큼은 주군이 말려도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짐하며 마차 뒤편으로 향했을 때였다.
“……?”
소화가 땅에 엎어져 있었다.
“흥, 일어나라. 오늘은 장난 받아줄 기분이 아니다.”
설영이 짐짓 차갑게 외쳤다.
하지만 소화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재미없다. 장난은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설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발로 툭 건드렸다.
소화의 몸이 힘없이 뒤집혔다.
“…어?”
순간 설영이 멈칫했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사람이다.
수백 개의 쇠사슬을 모두 막을 수 있을까?
혹시 은가 놈들이 흥분해서 화살을 쐈다면?
눈먼 암기에라도 맞았다면?
불길한 예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 소화야!”
설영이 다급하게 달려들어서 소화를 안아 들었다.
그런데도 축 늘어져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죽은 것일까?
“아, 안돼!”
만약 그녀가 죽는다면?
그것은 섣부른 도망으로 적을 도발한 자신 때문이었다.
“크흐흑. 야 이 녀석아, 안된다, 안돼!”
창백하고 표정 없는 얼굴.
그토록 생기 넘치던 아이의 얼굴이 맞단 말인가?
설영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뭐든지 용서해줄 테니, 부디 살아만 다오, 살아만!”
설영이 간절하게 외치며, 그녀를 안을 때였다.
“…정말?”
조그마한 목소리.
“그렇고말고. 네가 살아만 난다면, 다 용서해주마.”
설영은 눈물을 흘리며 목놓아 외쳤다.
“정말이죠?”
“그래, 물론…, 어?”
무의식으로 대답하던 설영이 멈칫할 때였다.
소화가 눈을 번쩍 떴다.
“…어?”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 히히히.”
폴짝.
소화가 몸을 튕겨서 일어섰다.
그러면서도 눈치를 보았다.
‘죽은 척했다고 화내겠지?’
눈치 봐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소화, 이 녀석아!”
설영이 눈물을 글썽이며 안는 것이 아닌가?
“어? 어?”
소화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모두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난이 지나쳐서 터무니없는 오해를 불러왔다.
설영이 화내고, 욕해도 당연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소화가 죽지 않은 것이 기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 내가 잘못했는데….”
“아니야, 어찌 네 잘못이겠느냐. 내가 정신을 못 차린 탓이지.”
“흐으윽. 다 내 탓인데, 내 탓인데.”
“아니다, 아니야!”
소화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소화야!’
‘설 사부!’
두 사람 사이에 앙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소화가 설영의 품에 폭 안겼다.
“용서해줘서 고마워요, 언니.”
“괜찮다, 괜찮아.”
너무 자연스러워서 처음에는 둘 다 몰랐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
“어?”
두 사람 다 멈칫했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설영의 옷차림은 그대로였다.
아무리 봐도 무사부라기보다는 귀한 가문의 아가씨 같았다.
소화의 입꼬리가 살살 올라갔다.
“헤헤헤. 언…니?”
“…….”
“언….”
“으아아아아!”
설영의 외침에 다들 벌떡 일어났다.
“적?”
“어디야, 어디!”
하지만 설영과 소화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으아아! 언니, 살려줘요!”
도다다다…!
소화가 재빨리 마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으아아아! 죽인다!”
설영이 괴성을 지르며 안으로 뛰어들고, 소화는 그사이 밖으로 나왔다.
“언니, 봐준다면서요! 왜, 왜 약속을 안 지키는데!”
“으아아아아!”
악귀의 형상을 한 미녀가 소녀를 쫓는다.
“드디어 네놈이 미쳤구나, 크하하!”
그 모습을 본 거암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살려줘요, 언니!”
“으아아악!”
“으하하하!”
생쥐와 고양이가 서로 쫓고 쫓았고.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웃었다.
* * *
쿨쿨. 드르렁, 드르렁.
지친 일행은 막사도 세우지 못하고 깊은 잠이 들었다.
“음냐. 음.”
낮에 싸운 게 거짓말인 듯, 소화가 설영의 팔을 껴안고 뺨을 부볐다.
“녀석.”
유운은 씽긋 웃으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장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야, 몸은 좀 어떠십니까?”
“공자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혹시나 노령의 장노가 다칠까 봐 유운이 안다시피 해서 왔다.
유운이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다.
끝을 알 수 없이 검고, 어두웠다.
“휴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리에서 오해를 푸는 것이 옳았습니다.”
유운이 아쉽다는 듯 탄식했다.
“일이 그리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장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은호풍이 오해할지도 몰랐고, 설영이 그렇게 과민반응할지도 몰랐다.
그 이후의 일은 태풍에 휩쓸린 배처럼,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군요.”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명문세가일수록 보수적이다.
그런데 진실이 드러난다면?
은호평은 물론 설영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터.
무림인으로서는 죽은 것과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어쩌겠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야.”
“하지만….”
“괜찮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도, 사람을 해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토록 엄격한 옛 성현들도 때로는 융통성을 발휘하고는 했습니다.”
“융통성이라 하심은….”
유운이 잠시 눈을 감더니 말을 이었다.
“덮어야지요.”
“……!”
“설 사부의 명예를 위해서도, 은 공자의 명예를 위해서도. 이 일은 여기서 끝내고, 잊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설 사부야 잊고 싶을 테지만. 은 공자가 그러할까요?”
“노아께서 은 공자가 화화공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소문은 그러합니다. 이 여자 저 여자 지분거리는 바람둥이라고….”
은호풍은 금방 반하고, 금방 질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니 조금 지나면 잊겠지요. 세상에 여인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보통은 그러합니다만….”
장노는 은호풍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가 과연 여인, 아니 설 사부를 포기할 수 있을까?
“제가 남녀관계는 잘 모릅니다만.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은 공자 또한 좋은 배필을 만날 것입니다.”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장노는 어쩐지 걱정이 들었다.
그토록 간절한 눈빛은, 오랜 세월을 산 장노조차 처음 보았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남녀관계거늘.’
남과 여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원수였던 백호문과 흑호방이 이어지지 않았던가?
‘남녀관계는 흐르는 대로 두는 것이 제일이다.’
장노는 어렸을 때 선배에게 들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그래, 순리대로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설 때였다.
무언가 찜찜했다.
‘이게 남녀 사이의 일이었나?’
남녀…?
남…?
남…
‘…….’
장노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