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청수향 (1)
제일 먼저 바뀐 것은 흙이었다.
다 타버린 재 같던 흙이 어린아이의 얼굴마냥 붉어졌다.
“땅의 색깔이 바뀌었구나.”
“좋은 거죠? 맞죠?”
“좋다마다.”
“히히. 그럼 소화도 좋아요.”
생기 넘치는 흙 위에는 노란 꽃과 푸른 나무가 자랐다.
다음으로 바뀐 것은 풍경이었다.
“이토록 싱그러운 숲과 들이라. 생명력만은 대수림 못지않습니다, 각주님.”
“괜히 유주라 불리는 것이 아니지요. 설화에 따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고 합니다.”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유주(油州)가 달리 유주(乳州)라 불리는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바뀐 것은 물이었다.
“강물 좀 봐요. 깨끗해!”
소화의 말에 모두 창문으로 모여들었다.
“어, 정말이잖아?”
“이리 맑다니.”
소화가 코를 벌름거리더니 탄성을 토했다.
“와, 물에서 소나무 향이 나요.”
“청수향이라더니, 과연 그러하군요, 공자님.”
장노의 말에 유운이 미소 지었다.
“오죽하면 맑은 물의 도시라 이름 붙였겠습니까.”
“이곳의 물이 특별한가요, 공자님?”
“고대 영수가 마지막으로 몸을 누인 곳이라는 옛이야기도 있지. 신묘한 기운을 품고 있어, 물이 곧 약이라 불릴 정도란다.”
“역시 공자님! 뭐든 다 아시는 우리 공자님. 히히!”
한참을 가니 기다란 돌다리가 나타났다.
강 너머로 커다란 마을이 보였다.
“으하하! 이제야 목에 때를 벗길 수 있겠구나!”
“드디어 몸을 씻을 수 있겠어요!”
거암과 소화가 손을 맞잡고 환호했다.
“객가촌이로군요.”
“청수향까지 반나절도 안 걸리니. 거짐 다 온 셈입니다.”
“노야께서도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늙은이 챙기느라 공자께서 고생하셨지요.”
유운과 장노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다그닥, 다그닥.
일행은 천천히 말을 몰고, 다리를 건넜다.
“겨우 닷새인데 대여섯 달은 지난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노야.”
“허허, 이 녀석아, 사건·사고가 좀 많았느냐? 누구 때문이었더라?”
장노가 은근히 놀렸지만, 소화는 활짝 웃었다.
“히히히. 제 덕분에 재미는 있었잖아요.”
“으하하! 맞다, 맞아. 암, 재밌었지.”
“으드득!”
거암과 설영이 각자의 방식으로 대답했다.
“어쨌거나 잘 도착했으니 다행입니다. 설 사부의 마음도 풀린 듯하니.”
“아무렴 설 사부가 그런 일로 꽁하겠습니까.”
불퉁하던 설영의 얼굴도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왕씨 아주머니한테 들었는데, 옛날에 청수향에 두 연인이 있었는데요….”
쫑알쫑알.
소화가 떠들자,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로군요.”
쫑알거림의 도라고 해야 할까.
소화의 이야기에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저 아이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야?”
“본가에 있을 때 뭐라고 불렸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불렸습니까?”
“벙어리 소화.”
“……!”
“종복 사이의 위계질서 또한 무인 못지않습니다. 어린아이가 오죽 힘들었으면 스스로 입을 봉했겠습니까?”
“저는 몰랐습니다.”
“공자께서도 마찬가지로 힘드셨지 않습니까. 또한 어리셨고요.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장노가 따듯한 눈으로 소화의 등을 쓸었다.
“이리 밝고, 이리 활기찬 아이이거늘….”
“모르셨습니까? 공자님 덕분입니다.”
“……?”
“공자님이 뒤에 있으니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괴롭힘도, 못된 말도 이겨낼 수 있는 게지요.”
“이게 어찌 제 덕분이겠습니까. 장 노야 덕분이지요.”
“무슨…?”
“저는 위에서 받은 바를, 아래로 돌려주었을 뿐입니다.”
“공자님.”
장노는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노야 덕분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배웠습니다. 바로, 베푸는 즐거움이지요.”
“허허허, 그렇지요.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지요.”
절망에 빠져있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올 때.
슬퍼서 울던 아이가 기뻐서 울 때.
그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두 사람 다 그것을 잘 알았다.
“정말 잘 크셨습니다, 공자.”
열일곱 소년이 아비처럼 속이 깊으니.
장노는 가슴이 뿌듯했다.
“하하하, 결국 돌고 돌아 노야 칭찬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요? 허허허.”
되찾은 마음의 여유 덕분일까.
모두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객가촌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 모르니 깃발은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혹시나 은가를 마주할 수 있으니….”
장노의 말에 유운 역시 동의했다.
어차피 가문의 이름으로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유운 개인의 이름으로 초대받았으니 큰 부담은 없었다.
“저들은?”
마을 어귀.
커다란 도를 찬 흑의 사내가 서 있었다.
허리춤은 비수와 단도, 철질려 같은 병기로 가득했고, 등에는 검은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무기를 가리지 않고 적을 쓰러뜨린다…, 흑호방도로군요.”
“제법 근육이 실한데…, 크으, 주먹은 어떤지 한번 부딪혀보고 싶군요.”
“자제하십시오, 거암 대주. 저희는 손님으로 왔습니다.”
들썩거리는 거암을 유운이 말렸다.
한참을 가니 번화한 시전이 나타났다.
“흐음. 이곳에도 무인이?”
“백호문도로군요.”
깨끗한 백의에 무장은 딱 검 한 자루뿐.
얼굴도 멀끔하고, 의관도 단정하니.
가슴팍의 하얀 호랑이는 차라리 학처럼 보였다.
“둘이 주시하는 방향이나 거리를 보아하니 사전에 논의하기는 한 것 같은데….”
호각대주답게 거암은 두 사람이 선 장소부터 확인했다.
서로가 보이는 위치이긴 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칠 때 고개를 끄덕이기는커녕,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 긴말한 관계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적으로 살아온 세월만 삼십 년이다.
감정의 앙금이 단번에 해소될 리가 없다.
“이 또한 세월이 해결할 일이지요.”
유운 일행은 지나가며 무인을 살폈다.
백성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근무 중 경계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니.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잘 훈련된 무인이었다.
“확실히 여기서부터는 걱정할 일이 없겠습니다.”
“다행입니다.”
일행은 가까운 객잔에 여장을 풀었다.
“모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오늘만큼은 푹 쉬십시오.”
“어우, 그 말씀만 기다렸습니다.”
“으으, 먼지. 얼른 씻어야겠어요.”
유운도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좋구나.’
따스한 물 덕분에 몸이 노곤해졌다.
거기에 푹신한 이불과 요까지.
유운은 오랜만에 깊게 잘 수 있었다.
* * *
날이 밝았다.
“으으…! 배가 등에 달라붙는 것만 같아요.”
“어제 알아봤는데, 이 집은 탕 요리가 그렇게 끝내준답니다.”
소화와 거암이 아침부터 성화였다.
“두 분이 원하는 대로 시키십시오.”
유운이 허락하자, 두 사람은 점소이를 불렀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손님?”
“탕 요리를 잘한다지? 그중에서 추천하고 싶은 게 있나?”
“저희 객점은 우육탕이 끝내줍니다. 대형 주루 출신이신 숙수께서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요리지요.”
뚝.
점소이의 말에 설영이 젓가락을 부러뜨렸다.
“나는 우육탕을 좋아하오.”
“나는 우육탕을 좋아하오.”
“나는 우육탕을 좋아하오.”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쳤다.
“다른 것으로.”
“한번 국물맛을 보시면 다들 극찬하는….”
“다른 것.”
“죽순과 쇠고기의 조화가 일품인….”
“다른 것!”
“허억!”
일행 중 가장 잘생긴 사내의 얼굴이 악마처럼 변했다.
점소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구, 궁보계정! 탕 말고 매콤한 닭볶음 요리도 잘합니다!”
“으드득. 그걸로!”
설영의 기세에 점소이는 대답도 안 하고 주방으로 도망쳤다.
“소심하게 아직까지 그걸 기억하고 있어? 아, 탕이 당기는 날이었는데.”
“아이, 참, 저는 닭 잘 못 먹는데.”
거암과 소화는 그리 말했지만.
“와, 이 집 진짜 맛있는데? 돌아갈 때 또 들러야겠어.”
“후르릅. 쩝쩝. 그거 안 먹을 거면 저 주세요. 얼른요!”
정작 나왔을 때, 누구보다 많이 먹은 사람은 그들이었다.
“아이참, 누가 그렇게 깨작깨작 먹어요. 복 떨어지게.”
소화가 입맛이 없어 보이는 설영에 핀잔을 주었다.
“왕씨 아주머니가 그랬는데, 젓가락으로 찔렀다 빼기만 하면, 아이도 안 생긴다고…, 헙!”
툭.
소화가 자기 입을 막았다.
“밥, 밥! 우리 밥은 먹고 해요, 언니!”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소화와 설영이 대치했다.
설영이 오른쪽으로 돌면 소화도 오른쪽으로 돌고, 설영이 왼쪽으로 돌면 소화도 왼쪽으로 도니.
다람쥐 쳇바퀴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히히, 나 빠르죠, 언니?”
“으득. 또오오! 오늘만은 못 참는다!”
내공을 쓰지 않는다고 어찌 무인이 아니겠는가.
훅!
설영이 단번에 소화를 따라잡았다.
대롱대롱.
설영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허공에 매달렸다.
설영이 꿀밤을 먹이려고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으으….”
소화는 겁먹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귀여운 아이가 애처롭게 파들거리니….
“어우, 이 쥐방울만 한 게.”
설영은 차마 내려치지 못하고 팔을 내렸다.
소화가 실눈을 뜨더니, 슬며시 미소 지었다.
“못 때리죠? 못 때리죠? 히히히!”
어느새 손에서 벗어나더니 설영의 등을 토닥였다.
“착한 사람이네요. 참 잘했어요. 언니.”
“으아아아!”
설영이 진짜로 꿀밤을 먹이려고 하니, 장노의 뒤로 쏙 숨었다.
“으하하하!”
“하하하”
일행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후에도 두 사람의 추격전이 이어졌으니.
옆자리의 사람들도 유운 일행 쪽을 힐끔거리며 미소 지었다.
‘오래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이로구나.’
유운은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두루마리를 꺼냈다.
다들 소화 덕분에 혼이 나가서, 손바닥 좀 본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어디 보자. 어?’
두루마리의 ‘영상 녹화’ 기능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급하게 움직이다가 잘못 눌렀나 보구나.’
두루마리는 생각보다 예민해서, 스치기만 해도 켜지고 꺼졌다.
은호평 사건 때는 워낙 격렬한 움직임이 많기도 했다.
그런데 활성화된 기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방송 송출까지?”
식사는 물론 여행, 거기에 온갖 소란이 올라가 있었다.
유운은 한숨을 쉬며 자책했다.
‘귀한 분들의 눈을 어지럽혔구나.’
선경을 노니는 신선들이다.
인간계의 소란 따위, 얼마나 가당찮겠는가?
‘내 눈에야 행복하고 즐거운 광경이지만. 신선 어르신들의 눈을 어지럽힐 수야 없지.’
유운이 두루마리를 만져서 방송을 끄려고 할 때였다.
- 끄지 마!
- 끄지 말라고!
- 끄으지모아!
다급하게 떠오른 진한 문자.
얼마나 급했는지, 틀린 글자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누구지?’
유운은 대화명을 확인했다.
[ 소수마녀(素手魔女) ]
하얀 손을 가진 악마 같은 여자!
금방이라도 손으로 머리를 으깰 것만 같은, 살벌한 이름이었다.
유운이 상세 정보를 확인하려고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그 동작을 오해했나 보다.
다시 한번 다급한 문장이 떠올랐다.
[‘소수마녀’님이 ‘임무(긴급)’를 제안합니다.]
[내용 : ‘방송 중지’를 중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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