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97화 (74/114)

제97화

청수향 (4)

한 시진 전, 객잔 이 층 특실.

값비싼 술과 안주로 가득한 자리.

세 사내가 술잔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강호의 영웅들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오.”

“명성은 많이 들었으나, 직접 뵈니 소문보다 더욱 헌앙하외다.”

“하하하, 소협 역시 마찬가지요.”

“강호의 큰 행사가 아니었다면, 어찌 우리가 만날 수 있었겠소?”

서로의 얼굴에 금칠하며 치켜세웠다.

모두 백호문과 흑호방의 초대를 받은 문파의 후지기수들이었다.

하나는 키가 크고, 온몸에 문신이 가득한 장한이었고, 하나는 중간 키에 청수한 얼굴의 검사, 마지막 하나는 작은 키에 염소수염을 가진 문사였다.

“이렇게 좋은 자리를 앞에 두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소제가 술을 올리겠습니다.”

염소수염의 말에 청수한 사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소.”

두 손으로 술잔을 받치더니,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태평성대를 만드신 당금의 맹주께 한잔 올려야 하지 않겠소?”

“옳으신 말씀이오.”

“맹이야말로 하늘의 태양이니, 존경받아 마땅하지.”

세 사내가 호기롭게 술잔을 들이켰다.

“두 번째 잔은 천하백가를 위해서.”

“동의하오. 하늘 위에 떠 있는 별과 같은 분들이니.”

“천하를 받드는 기둥 아니오? 존중받아 마땅하지.”

두 번째 잔 이후, 사내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의 태양. 그리고 별. 그 두 가지의 공통점이 무언지 아시오?”

“무엇이오?”

“아래를 비추기는 하지만, 아래에서 닿을 수는 없다는 점이오.”

“……!”

맹이든 백가든 하늘 위의 존재.

땅에 사는 무림인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세 번째 잔은 우리를 위해 마실 것을 제안하오. 땅에서 사람들을 이끌 이들은 우리뿐이니.”

“껄껄껄, 어찌 내 마음을 그리 잘 아시오.”

“옳으신 말씀이오.”

세 사내는 눈을 빛내며 술을 마셨다.

“이번 개파대전이야말로, 우리 같은 젊은이들이 명성을 알릴 좋은 기회요.”

“맞소. 그동안 이런 큰 행사가 없지 않았소.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소?”

흑호방과 백호문이 하나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공공연히 ‘쌍호문’이라 부를 정도였다.

사실상 개파대전(開派大典)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 모임에서 많은 영웅이 탄생할 거요.”

“영웅이라. 제 눈앞의 독사신권이 아니면 누가 될 수 있겠소?”

“과찬이오. 아무려면 내가 운룡검 소협만 하겠소? 그 정교한 검술을 누가 상대하겠소?”

“저 군자검 또한 잊지 말아 주십시오, 하하하.”

“물론이오. 다 같이 빛나는 영웅이 되어봅시다.”

셋은 서로 추켜세우면서도 은근히 자신을 내세웠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때문이었다.

묘가영.

세 사내의 맞은편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몸을 기댄 여인 때문이었다.

‘꿀꺽. 유주 제일 미녀라더니.’

‘사내들을 홀리고도 남을 요물이로구나!’

사내들은 남몰래 그녀를 훔쳐보며 침을 삼켰다.

몸에 딱 달라붙는 붉은 경장.

꼬리처럼 허리를 휘감은 긴 머리카락.

어쩐지 요망한 표정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될 지경이었다.

“묘 소저에 대한 소문이 유주에 파다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하구려.”

“소저의 미모는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소.”

“소저, 제가 한잔 올려도 되겠소?”

세 사내가 너나 할 것 없이 추파를 던졌다.

여인은 지루한 얼굴로 미간만 찡그릴 뿐, 술잔을 받지 않았다.

“공사다망하셔서 술을 멀리하시는구려.”

“과연 화월루 최고의 후기지수답소.”

“역시 묘 소저요!”

대놓고 무시당했음에도 사내들은 오히려 그녀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그녀가 가진 것은 압도적인 미모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화월루(花月樓).

유주에서 이름난 주점이나 객잔은 대부분 화월루 소유였다.

거기에 은밀하게 벌이는 도박사업과 정보 장사까지.

고작 향이나 현 단위로 노는 자신들과는 격이 달랐다.

“이번 쌍호대전에서 뭇 사내들이 묘 소저 때문에 애를 태우겠구려.”

“안될 말이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우리에게 먼저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듣고 보니 그렇구려.”

묘가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놀고들 있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모습이, 어찌나 가소로운지 몰랐다.

“청사문은 이번 대전을 어떻게 생각하오?”

“외각주이신 나의 사부님께서는….”

“오, 외각주셨구려! 대단하오!”

한껏 거들먹거리는 덩치는 청사문의 신예였다.

그의 진짜 별호는 독사신권이 아니라 독사견.

사람들은 그가 독을 품은 뱀이자 개라고 욕했다.

‘맹의 천하에 흑도라니. 징그러운 모기 같은 놈들.’

노골적으로 마도나 사도를 부르짖던 이들은 진즉에 목이 달아났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흑도는 달랐다.

흑도는 이익을 탐하는 인간 본성 그 자체.

뒷골목, 주루, 도박장.

어느 곳이든 흑도는 존재했다.

‘그래봤자 동네 파락호지.’

백성들을 상대로는 강자인척하지만, 결국 대 문파들의 눈치를 보는 신세.

청사문 역시 선을 넘으면, 마도처럼 정리 대상이 될 것이다.

“장문인께서 너만이 세검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다며 부탁을 하시는데. 휴우, 본인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니. 누를 끼칠까 봐 밤잠을 설치곤 한답니다.”

청수해 보이는 외모의 검객은, 중도성향의 세검문 소속 운룡검.

누가 봐도 호감을 품을 정도로 겸손했지만….

‘겉과 속이 다른 놈이지.’

본인은 숨기고 있지만, 화월루를 속일 수는 없었다.

‘최근에 검기지경에 올랐다지?’

일단공이지만 나이를 감안하면 상당한 성취.

셋 중 그나마 관심을 두고 있는 자였다.

“본인의 명예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천하 만민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면 그뿐이지요.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입만 열면 경전을 논하는 자는, 군자검.

청수현 외곽에 있는 조양문의 신예였다.

청수현에는 문무겸전 군자검이 있다!

문과 무, 둘 다 하늘에 닿았으니.

라는 소문이 파다한 무인이었지만.

‘군자가 다 죽었나. 양심도 없는 새끼.’

별호는 보통 남들이 붙여준다.

그런데 군자검은 뻔뻔하게도 자기 스스로 별호를 만들어서 소문을 냈다.

‘웃기는 새끼.’

묘가영이 그를 보고 피식 웃을 때였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어찌 묘 소저에 비하겠소?”

“그렇지요. 최연소로 지부장에 오르신 능력자이시니.”

“여인의 몸으로, 실로 대단하오.”

세 사람이 다시 치켜세웠지만, 묘가영은 겸양의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네놈들을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니냐.’

지랄 맞지만, 이런 놈들 상대하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굴렀기에 젊은 나이에 청수향 지부장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부족해.’

현을 넘어, 유주 전체를 관리하려면, 핏줄만으로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했다.

실적.

경쟁자들이 승복할만한 압도적인 실적이 필요했다.

“미모와 지위, 능력을 모두 갖추셨으니….”

“유주제일화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겠구려!”

사내들은 칭찬하면서도 은근슬쩍 몸매를 훔쳐보았다.

‘사내들이란.’

속 보이는 칭찬. 숨기지 못하는 욕망.

매번 똑같아서 지겨웠다.

그녀가 지루해하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군자검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그자의 이야기, 들어보셨소?”

“그자라 함은 누굴 말하는 것이오?”

“왜 있지 않소, 요즘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이름.”

“해원검!”

“백리제일학사!”

“적랑쌍도를 쓰러뜨린 사내가 아니오?”

사내의 이름만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해원검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주제에 등을 기대고 있던 묘가영도 상체를 일으켰다.

“검술의 유려함이 마치 꽃과 같다 하더이다.”

“외모 역시 헌앙하니 뭇 여인들이 가슴앓이한다고 하더이다.”

“관대하고 자비로우니, 실로 강호의 새로운 별 아니겠소?”

처음에는 칭찬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속마음을 조금씩 드러냈다.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강기지경의 고수를 이겼다? 과장을 해도 적당히 해야지.”

“쯧쯧. 그러게 말이오.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겠소?”

“실제로 붙어보면 모르지 않겠소? 솔직히 나의 주먹이 결코 그에 부족하다 여기지 않소.”

독사견은 은근히 경쟁의식을 드러냈고.

“흥, 명가의 핏줄 덕분에 조금 빨리 갔을 뿐이오. 나, 아니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만큼 못 할 리가 없소.”

“옳은 말씀! 직접 만난다면, 정정당당하게 그를 무릎 꿇릴 것이오. 그리고 천하에 당당하게 선언하는 거지.”

“하하하, 사내대장부다운 포부요.”

운룡검과 군자검 또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쯧쯧.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듣고 있던 묘가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화월루의 정보망을 통해 파악한 바로는, 그에 관한 소문은 모두 진실이었다.

오히려 사실보다 더 적게 알려졌다는 분석까지 있을 정도였다.

“해원검이든, 백리팔수든 별거요? 우리의 무공이라면….”

“옳으신 말씀이오.”

“칠룡삼봉도 그렇소. 요즘은 묘 소저까지 넣어서 사봉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오. 우리라고 못 할 게 뭐가 있겠소?”

“암, 그렇고말고!”

서로를 치켜세우는 말에, 묘가영은 급속도로 흥미를 잃었다.

‘그냥 이놈들 버리고 바로 백호문으로 갈까.’

꼴 보기 싫은 놈들을 피해, 살짝 열린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 층 주루에서는 흥겨운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웃고, 떠들고, 환호하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니, 묘가영까지 기분이 좋아질 지경이었다.

그 중심에는 처음 보는 일행이 있었다.

‘누구지?’

느낌상 무림인 같은데, 문파나 가문을 드러내는 표식은 보이지 않았다.

‘저자는….’

묘가영의 시선이 한 사내에 닿았다.

푸른 시냇물처럼 맑은 눈동자.

어떤 투정도 다 받아줄 것만 같은, 부드러운 미소.

잘생겼지만,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편안해.’

그냥 보기만 해도 느낌이 좋았다.

사내가 아이를 토닥이는 모습, 환하게 웃으며 칭찬하는 모습, 어색하게 장난치는 모습까지.

모두가 보기 좋았다.

그래서 묘가영은 말없이 그를 감상했다.

“이제는 해원검이 아닌 우리의 시대….”

“그런데….”

“…….”

떠들썩하던 술자리가 어느새 조용해졌다.

세 사내의 시선이 묘가영을 따라 일 층으로 향했다.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는 자,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자, 칼을 쥐는 자.

하지만 묘가영은 감상에 빠져서 알아채지 못했다.

‘분명히 나보다 훨씬 어린 공자인데….’

이상하게도 죽은 오라비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해도 감싸주었고.

자신이 어떤 고통을 주어도 넉넉한 웃음을 보여주었던 그 사내가.

‘오라버니…. 아니야, 아직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야.’

그를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묘가영은 억지로 고개를 흔들어서 떨쳐냈다.

‘그런데 저들…!’

감상에서 빠져나오니, 정보상으로서의 본능이 눈을 떴다.

남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의 절세미남자,

평범한 노인과 소녀.

그리고 학사복을 입은 소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성이었다.

‘말이 안 되는데? 저들이 저런 행색으로 있을 리가 없는데?’

잘 씻은 덕에 얼굴에는 빛이 났지만, 옷차림은 달랐다.

여기저기 찢긴 흔적이나 구른 흔적이 역력했다.

거기에 심하게 부서진 마차까지.

딱 보아도 적지 않은 고초를 치른 모양새였다.

‘설마. 아니겠지. 맞나?’

가슴은 이미 그들의 정체를 확신하는데.

머리는 여전히 긴가민가할 때였다.

세 사내 중 가장 덩치 큰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에이, 퉷.”

가면을 벗어던진 사내에게서 살벌한 기세가 쏟아졌다.

눈은 이글거리는 질투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놈들, 시끄럽다!”

독사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