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청수향 (5)
단지 고함뿐이 아니었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유운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세로로 갈라진 뱀눈과 긴 혓바닥 문신.
울룩불룩한 근육.
허리춤에는 단도가 번뜩였다.
‘꿀꺽. 살벌하구만.’
‘산채로 사람 묻어버렸다는 소문, 진짜 같은데?’
사람들은 마른침만 삼키며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달랐다.
‘이러다 큰일이 나겠구나!’
점소이는 덜컥 겁이 났다.
어지간하면, 아니 단 한 번도 무림인의 일에 끼어들어 본 적 없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귀여운 여자아이.
저 사나운 사내가 향하는 곳에는, 소화가 있었다.
“소, 손님. 진정하십시오. 모두 저희 잘못입니다. 술값을 받지 않을 터이니 부디 용서를….”
“살다 살다 점소이 새끼까지? 누굴 거지로 아나!”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휘졌더니,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끄억!”
점소이가 가슴에 주먹을 맞고 벽에 부딪혔다.
쿨럭, 피를 토하더니 어깨를 부여잡았다.
“으으으…!”
팔뼈가 부러진 것은 물론, 속까지 상한듯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나쁜 아저씨, 못생긴 아저씨, 대머리 아저씨!”
“뭐, 뭐라고! 저 꼬맹이가 미쳤나? 저 주둥이를 확!”
독사견이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머리숱을 확인하더니, 몸을 날렸다.
휘익!
“꺄아아악!”
인정사정없이 소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때였다.
턱.
유운이 한 손으로 그의 주먹을 잡았다.
‘저 체구로 저 덩치의 주먹을 막았다고?’
‘달려오는 속도까지 실렸는데?’
사람들이 흠칫할 때였다.
“먼저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쓰는 공간인데, 저희가 너무 시끄럽게 굴었습니다.”
뜻밖에도 유운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따위 말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놈과 저 꼬맹이, 앞으로 밥은 다 먹었다. 이빨을 몽땅 뽑아줄 테니.”
독사견이 숨겨왔던 포악함을 드러냈다.
“시작은 저희의 잘못이니, 얼마든지 배상하고, 사과하겠습니다. 그런데….”
유운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대협이 하신 행동 또한 잘못되었습니다. 매우 심하게.”
점소이는 숙수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모양새가 보통 크게 다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소화 역시 겁에 잔뜩 질려서, 제대로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정도가 지나치셨으니, 대협께서는 모두에게 사과하셔야 합니다. 특히 점소이와 소화에게.”
“껄껄껄, 무슨 개소리냐? 꿈도 꾸지 마라!”
호통한 웃음소리와 달리, 흑사견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졌다.
‘무슨 힘이…!’
아까부터 주먹을 빼려고 하는데, 도통 빠지지 않았다.
마치 바위틈에 끼인 듯, 주먹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과하십시오.”
유운이 정중하고 단정한 어조로 말했다.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청사문의 외당주의 적전제자로….”
“사과하십시오.”
“……!”
흑사견이 단지 말만 한 것은 아니었다.
‘크으윽!’
온 힘을 다해서 주먹을 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 내공까지 일으켰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사과하십시오.”
유운과 눈이 마주쳤다.
맑고 깊은 샘물과 같은 눈동자.
어디에도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이노옴,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으하하!”
흑사견은 짐짓 웃으면서 모든 내공을 끌어올렸다.
거기에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팔을 잡아당겼다.
소용없었다.
‘마, 말도 안 돼. 나의 십성 내공을 이토록 쉽게?’
흑사견의 얼굴에 조금씩 두려움이 깃들었다.
“사과하십시오.”
유운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침착했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이노오옴!”
노호성과 함께 몸을 뒤로 뺐으나, 이제는 다리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이…이…!”
흑사견은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공격은커녕 버티기만 해도 버거웠다.
“사과하십시오.”
흑사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금씩 힘이 더 강해졌다.
뿌드득.
어디선가 근육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이, 이거부터 놓고….”
“사과하십시오.”
비굴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소용없었다.
유운의 눈을 다시 보았다.
절대 타협하지 않는 눈이었다.
‘주, 죽어? 이대로 내가 죽는다고?’
덜덜덜.
팔과 다리, 얼굴.
온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으아아아아아! 살려줘!’
그러나 일행은 이런 사정을 몰랐다.
“껄껄껄. 독사신권께서는 과연 자비로우시구려. 이런 어리석은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시다니.”
운룡검이 크게 웃으며 일 층으로 내려왔다.
가느다란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묘가영의 시야에서 멀어졌겠다, 이름난 무인도 없겠다.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니 될 말씀이오. 우리가 이들을 지켜주고 있지 않소? 그러니 마땅히 우리에게 존경을 보여야 하오.”
“……!”
“필요하면 어떤 ‘봉사’든 다 해야 하지 않겠소?”
운룡검이 음습한 눈으로 여인들의 몸을 훑었다.
그중에는 유부녀는 물론 어린 소녀까지 있었으니.
사내들은 몸으로 그의 시선을 막았다.
분노하면서도 감히 항의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상대는 무림인.
이 천하의 지배층이었으니까.
“그런데 감히 영웅들의 회합을 방해하다니. 내 친히 징계를 내려야겠어.”
운룡검이 거들먹거리며 다가올 때였다.
“재밌는 놈들일세, 껄껄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웃음소리.
호각대주 거암이었다.
‘무, 무슨 덩치가?’
운룡검이 순간 주춤했다.
구릿빛 피부 가득한 정체 모를 문신.
거기에 거한인 흑사견을 능가하는 덩치까지.
무림의 싸움이 덩치로 결정될 리 없다지만, 거암이 주는 시각적인 충격은, 그만큼 컸다.
‘굳이 어려운 길을 갈 필요 없지.’
아마도 저 덩치가 소년 일행의 호위이자 가장 강한 자일 터였다.
“당당한 세검문의 후예로서, 검을 들지 않은 자를 벨 수는 없지.”
“뭔 헛소리야?”
“검수끼리 붙자.”
운룡검이 설영을 검 끝으로 가리켰다.
“야, 넌 내가….”
“네가 사내라면 나의 도전을 받아라. 그래, 너. 기생오라비. 너 말이다.”
운룡검이 거암의 말을 냉큼 자르더니, 음흉한 눈으로 설영의 위아래를 쓸어보았다.
“큭큭. 반반한 얼굴은 아무리 봐도 사내가 아닌데. 옳거니, 남장 여인인 게로구나! 으하하, 그럼 오늘 밤 나의 수청을 들….”
운룡검이 그렇게 도발할 때였다.
사아아…!
“……!”
“……!”
주변에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모골이 송연한 살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내가…. 아니다.”
거암은 나서려다, 설영의 얼굴을 보고 말없이 뒤로 빠졌다.
“주.군. 부.디.”
아주 잠깐, 설영이 멈추어서 유운을 돌아보았다.
‘설 사부…. 이렇게까지!’
설영의 얼굴을 본 유운이 탄식했다.
얼마나 마음속 화가 깊은지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얼굴과 가슴에 화기(火氣)가 가득하니, 금방이라도 터질 화산을 보는 것만 같았다.
“말로 지은 죄 또한 가볍지 않으니. 부디 죽이지만 마십시오.”
유운이 탄식하자, 운룡검이 눈을 번뜩였다.
‘이거 뭔가 있는 놈이로구나!’
선수 필승!
번쩍!
운룡검이 검으로 설영의 목을 노렸다.
“저, 저!”
“작은 다툼에 살수를 쓰다니!”
누구도 예상 못 한 기습에 모두가 놀랄 때였다.
팅!
설영이 손가락으로 검을 튕겨냈다.
그 광경을 본 운룡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수! 힘을 아낄 때가 아니다!’
“하아. 이런 하찮은 무대에서 보일 무공이 아니거늘.”
운룡검이 차갑게 외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검이 진동하더니 미약한 검기를 만들어냈다.
어두운 회색빛 검기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일단공! 실력을 숨겼구나!”
“운룡검이 검기지경의 고수였다니!”
“대단한 심계로구나….”
사람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검기라니? 같은 경지가 아니면 상대조차 할 수 없는….
댕강.
“……?”
“……?”
운룡검의 검이 무처럼 잘려나갔다.
“뭐, 뭐, 뭐야?”
운룡검이 말을 잊고 버벅거렸다.
그의 눈앞.
솨아아…!
선명하고 투명한 순백.
우윳빛 검기가 빛나고 있었다.
“사, 사단공?”
“미, 미친! 량백검기라니!”
비록 고수가 아니더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수.청. 흐흐흐.”
설영의 입에서 기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실성한 여인이 동굴에서 외치는 듯한 소리였다.
“사, 살려… 으아아악!”
우드득.
우득.
뽀직.
파사삭.
“……!”
“……!”
온몸을 말 그대로 가루로 만드니.
사람들은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살아있는 시체를 만든 설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는….
“어? 어? 이, 이게 아닌데?”
하얗게 질린 키 작은 사내가 있었다.
하필이면 점소이를 부축하던 숙수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는 상태였다.
‘위기, 대위기다!’
셋 중에서는 그래도 상황판단이 빨랐다.
문무겸전 군자검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사술, 사술이다! 저자가 사술로 운룡검을 공격….”
사악한 술법을 썼다고 선동해보았지만.
“카악. 퉤.”
“어디서 개가 짖나?”
“그러고 보니 내 아내를 희롱할 때 저자도 같이….”
다들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본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군자검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십 대 중반에 사단공?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정상적으로 가능한 경지가 아니야.’
그렇다면 어떻게?
서역의 상인에게 들은 소문이 떠올랐다.
“그래, 그거로구나! 광전사! 너는 그게 분명해!”
군자검이 설영에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어릴 때 아이를 납치해서, 세뇌하여 죽어라 수련만 시킨다.
아무런 잡념이 없으니, 무공 성취 또한 놀라울 정도로 높다.
당연히 반대급부도 있는 법.
단점은 낮은 지능과 과도한 공격성이었다.
“미치광이 전사라고?”
“저렇게 잘생긴 청년이? 그럴 리가.”
설영의 경지가 워낙 말이 안 되었으니.
사람들도 긴가민가했다.
“내가 미치광이라고? 큭큭큭. 그래,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주마.”
설영의 눈가에 검은 기운이 감돌았다.
군자검은 더욱 겁에 질렸다.
‘살아날 방법은…. 그래, 세뇌된 자들은 특정한 단어로 움직인다고 했지!’
광전사는 복잡한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알아듣는 말을 쓰면, 광전사를 빼앗길 우려가 있다.
그래서 주인은, 암호화된 단어를 사용하여 광전사를 부린다고 했다.
광전사를 제어하는 암시어는….
‘그것이다! 그것밖에 없어!’
지혜로운 군자검은 확신했다.
자신을 저 흉포한 광전사로부터 지킬 방법은.
무엇보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흉포한 맹수 앞이지만, 용기를 냈다.
군자검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못 때리죠? 못 때리죠?”
흉포한 맹수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이거로구나!’
그러나 적을 물리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그 아이가 했던 행동을 떠올렸다.
군자검은 뺨에 두 손가락을 올리며 혀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못 하죠? 아무것도 못 하죠?”
그런데 등줄기가 싸했다.
그렇게 싸할 수가 없었다.
“네 놈…!”
설영이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눈이 완전히 위로 돌아가더니, 검게 물들었다.
“네까짓 게 나를 능욕해? 감히? 이 고독랑을?”
“그, 그게 아니라….”
“으아아아아!”
그리고 광기가 폭발했다.
우드득.
우득.
뽀직.
파사삭.
군자검은 정말 개처럼 맞았다.
“어어어억. 사려주어. 사려….”
구멍이 숭숭 난 이빨로 비참하게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왜 나만! 왜 나만 더 때리는데!’
군자검은 정신이 흐려지는 가운데 깨달았다.
아, 밑지면 본전이 아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