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청수향 (6)
약향 가득한 의원.
두 사내가 문방사우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말은 흐르는 물에 흘러가 버리지만, 글은 마음 판에 새겨지니. 때로는 말보다 글에 더 많은 진심이 담기고는 합니다.”
유운이 말하면서 조용히 먹을 갈았다.
“그, 그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온몸에 뱀 문신이 가득한 거한, 독사견이었다.
오른팔은 퉁퉁 부은데다 붕대를 칭칭 감아서 벌통처럼 보였다.
왼팔로는 어색한 자세로 붓을 잡고 있었다.
“대협께서 객잔에서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어떠한 점을 느끼셨는지 차근차근 써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그게 제가 글솜씨가 없어서.”
“진심을 담는데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은 필요 없습니다. 아는 글자로, 간단하게 적으시면 됩니다.”
“…네.”
독사견은 마지못해서 대답하고는 붓을 휘갈겼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뱀이 꼬불거리니, 마치 난동을 부리는 개와 같은 형상이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았으니. 다시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유운이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나름 진심으로 쓴 것인데….”
“쓰십시오.”
유운이 단호하게 말하자, 독사견이 움찔했다.
“쓰, 쓰겠습니다.”
종이가 한 장 넘어갔다.
“진심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종이가 또 한 장 넘어갔다.
“진심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부르르.
독사견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평소 쓰던 손도 아니고, 글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어떤 이유로든 쓰고 싶지 않았다.
“다시 쓰십시오. 필체에 분노가 느껴집니다.”
“어, 어떻게?”
놀랍게도 유운은 얼굴도 보지 않고 독사견의 감정을 알아냈다.
“평생 글을 읽고 써왔습니다. 어찌 글 안에 담긴 마음을 못 읽겠습니까?”
“···네, 네.”
근육질의 거한은 다시 사과문을 썼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 종이가 산만큼 쌓였다.
“그만…. 그만! 진짜 잘못했습니다, 그만 쓰면 안 되겠습니까? 배상도 충분히 하지 않았습니까!”
팔이 부러진 점소이에게는 배상금으로 큰돈을 주었다.
점소이가 모은 돈까지 합쳐서 집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였다.
이 정도 돈이면 다른 팔이 부러져도 좋다고.
하지만 유운은 만족하지 않았다.
“어찌 돈으로 진심을 살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는 대협께서 진심으로 남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
독사견이 머뭇거리자 유운이 책을 한 권 내밀었다.
“성현의 가르침이 담긴 책입니다. 인간이 범하는 과오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지요. 글을 쓰실 때 참고하셔도 됩니다.”
“싫….”
“참고하셔도 됩니다.”
“…네.”
독사견이 땀을 뻘뻘 흘리며 글을 썼다.
잘못했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자 속에, 아주 약간의 진심이 담겼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이전보다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더 채워야 합니다.”
유운이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불경, 도가 경전, 경서에 법률서까지.
어떻게 구했는지 의문일 정도로 많은 책이 쌓여있다.
독사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주, 죽여줘!’
하지만 소용없었다.
“다시.”
“……!”
“다시.”
“……!”
“다시.”
“……!”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으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붓을 든 손이 움찔거렸다.
‘확 담가버릴까? 방심한 것 같으니 혹시….’
그리 생각하다가 옆을 보았다.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으깨진 감자? 가루가 된 콩?
사람 비슷하게 생긴 살덩어리?
살아있는 송장 두 구?
독사견의 손이 저절로 공손해졌다.
‘그래, 삶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그 순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맑아졌다.
“진심이 담겼군요. 좋습니다.”
유운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 드디어!”
“가셔도 됩니다.”
“으아아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독사견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일어서서 보니, 바닥이 까맣게 채워진 종이들로 가득했다.
독사견은 문을 나서면서 다짐했다.
‘착하게 살아야지!’
그리고 문을 벗어난 순간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이 새끼, 두고 봐라. 기회만 닿으면 복수를…!’
슬쩍 돌아보니, 설영이 정성스레 빚은 두 송장이 보였다.
‘그래, 잊자. 똥 밟았다고 생각하자. 잊는 게 이기는 거야.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독사견은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덜덜덜.
비록 생각과 달리 온몸을 떨었지만, 어쨌거나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 * *
[시청자 간의 자발적인 합의를 확인하였습니다.]
[공식적인 ‘내기’가 성립합니다!]
장난처럼 시작한 내기.
처음에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참여했다.
- 으하하, 오래간만에 재밌겠구나!
- 인간계에 있을 적 생각나네. 내가 그때 한 도박했는데.
-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야, 걸어, 걸어!
흥겨운 목소리와 함께 별 부스러기가 쌓였다.
[‘공공신투’님이 내기에 ☆ 0.2개를 걸었습니다!]
[‘유령마제’님이 내기에 ☆ 0.3개를 걸었습니다!]
[‘현문고검’님이 내기에…]
…
..
.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금액이 천천히 늘어났다.
그러나 어어 하는 순간, 금액이 삽시간에 불어났다.
[현재 적립된 내기 금액은 ☆ 5.2개입니다.]
[현재 적립된 내기 금액은 ☆ 6.4개입니다.]
…
..
.
[현재 적립된 내기 금액은 ☆ 12.9개입니다.]
[현재 적립된 내기 금액은 ☆ 21.6개입니다.]
일정 금액이 넘어가자, 관심 없던 이들까지 참여하기 시작했다.
- 미친, 별 부스러기가 20개가 넘게 모였어? 이런 말장난 같은 내기에?
-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쳤어!
어느덧 신선들조차 놀랄 정도로 금액이 커졌다.
- 허허허, 역시 젊음이 좋구만, 치고받기도 하고.
- 그래, 이렇게 싸우면서 크는 거지.
처음에는 그리 여유롭게 보았으나.
어느 순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 방장놈아, 힘을 좀 내야지! 사내 녀석이 그게 뭐냐! 악당을 집어 던져야지. 그래야 벽이 부서지지!
- 여자같이 생긴 놈이 손만 맵네. 이놈아, 그렇게 사람만 패면 어떡하냐! 천장에 던져서 구멍도 좀 뚫고, 탁자 위에 내팽개치기도 해야지!
조금씩 말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부숴, 부수라고!
- 왜 안 부수는 거야, 장난하는 거야? 장난해?
그리고 마침내 결착이 났다.
[‘내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결과를 판정합니다.]
[객실 손상도…0.01%.]
[손실도가 극히 낮으므로, 무손실로 판정합니다.]
두루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신선답지 않은 한탄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 무림인이 부딪혔는데 객잔이 멀쩡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 기둥도 부수고, 응, 탁자도 날리고, 응, 건물도 무너지고 응, 그래야지!
- 무림이 어찌 이리되었단 말인가. 말세로다, 말세야!
그러나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 무효야 무효! 다시 해!
- 야 이런 시XXX, 장난해 새X야! 죽XXXXX! 콱 XXXX!
마도 출신의 신선들을 시작으로 욕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객잔이 멀쩡하다’에 건 신선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승자 또한 없었다.
- 그럼 내기 결과는…?
- 결과는 어떻게 된 거야?
- 내 본전은? 본전이라도 돌려줘!
선계에는 내기 자체가 드물었고, 결과가 나오지 않은 적은 더 드물었다.
모두가 궁금해할 때, 두루마리의 문구가 떴다.
[내기의 승자가 없으므로, 결과는 무승부.]
[내기에 걸린 보상은 다음 내기로 이월됩니다.]
뜻밖의 말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 이월? 그 말은 설마…
- 다음 내기 우승자가 모두 타게 된다고?
신선들은 자기도 모르게 적립된 별 부스러기를 확인했다.
[현재 적립된 내기 금액은 ☆ 57.3개입니다.]
꿀꺽.
아무도 말이 없었다.
고요한 가운데 침 삼키는 소리만 들려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만 같은 정적 속에서.
“오늘 방송은 이만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운이 두루마리를 접으려고 했다.
- 아, 안돼! 끄지 마!
- 방장놈이, 이 무슨 만행이냐! 지금 방종을 한다고?
- 밀고 당기기를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지. 지금 그런 장난을 할 때더냐!
신선들이 다 같이 아우성을 쳤다.
“왜 지금 종료하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 오냐오냐해주었더니…
- 이 녀석이 정말!
“실망입니다.”
- ……!
- ……!
나직한 유운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있었다.
“여러분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누가 선계의 신선이라고 믿겠습니까?”
- …….
- …….
신선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는 자, 눈이 벌게진 자, 손을 덜덜 떨고 있는 자.
“이래서야 도박에 빠진 도박중독자와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마치 혼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혼나는 게 맞았다.
‘지금…. 우리를 훈계하는 거야?’
‘등선도 못 한 하계의 인간이, 우리를?’
신선들은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방송하는 이들은 모두 시청자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어떻게든 후원금 한 푼이라도 더.
어떻게든 임무 하나라도 더.
어떻게든 시청자 한 명이라도 더.
하다못해 신선에게 가르침을 구걸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유운은 달랐다.
“처음에는 어떤 숭고한 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대체 무엇을 위해 수행을 해오신 것입니까?”
유운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번다한들, 만족하시겠습니까? 거기서 끝내시겠습니까?
신선들은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았다.
초조. 불안. 갈망.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삿된 망념들로 가득했다.
- 이, 이런! 내가 이런 마음을 품었다고?
- 허허허, 오백 년을 수련했건만. 아직도 하찮은 욕망을 버리지 못했구나.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재미를 위한 작은 내기는, 즐거운 놀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큰돈을 건 내기는 도박입니다. 그리고 도박은, 나쁜 것입니다.”
- ……!
너무나 지루하고 고루한 말.
그러나 너무나 옳은 말이었다.
그랬기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반박할 수 없으니까.
“내기로 얼마를 벌든, 얼마를 잃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루마리가 안내해줘서 안다.
방송의 주인인 유운도 수수료를 번다.
내기 금액이 클수록 유운에게도 이득이다.
하지만 유운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점점 더 큰 돈을 걸고,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점점 더 벗어나기 어려워집니다.”
유운이 또박또박 말했다.
- 자네 말이, 아니 소협의 말이 옳네.
- 우리가 과하긴 했지. 안 그런가?
- 잠깐 눈에 뭐가 씌었나 보네.
신선들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쩐지 말투도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다를 것이다, 이번에는 진짜 다를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바로 심마입니다. 그리고 화면 끄신 분, 화면 키고 바로 앉으십시오.”
늘어져 있던 신선이 흠칫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뭐라고 항의하기에는 찔리는 바가 너무 많았다.
“못된 충동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을 바로 해야 합니다….”
꿀꺽.
신선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계 최초로, 인간이 신선에게 가르침을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