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100화 (77/114)

제100화

청수향 (7)

유운의 방송이 끝난 순간.

- 허어. 드디어 끝났구나.

- 길었네, 길었어.

- 좋은 말씀, 아니 대화였어.

신선들은 참아왔던 한숨을 터트렸다.

다들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 오랜만이라 그런가 아프네.

- 어딘지 알 것 같아.

- 나도 일세, 흐흐.

평소와 달리 눈이 아닌 귀가 아팠다.

유운은 분명 좋은 선생님이지만, 엄격한 선생님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 그래도 마음을 닦으니 깨끗해진 기분일세.

- 생전의 스승님 생각도 나고 좋았어.

수행이 더 높아진 느낌에, 대부분 얼굴이 밝았다.

그런데 방송이 종료되면서 다시 한번 금액이 표시되었다.

[현재 적립된 내기 금액은 ☆ 57.3개입니다.]

[방송을 종료합니다.]

흠칫.

그 순간, 몇몇이 움찔했다.

신선들의 수행이 높은 것도 맞다.

유운의 가르침에 공감하고 반성한 것도 맞다.

단 하나, 유운이 생각 못 한 점이 있었다.

별 부스러기의 가치.

두 스승이 이해를 돕기 위해 영약이나 보물에 비유했지만.

미처 유운에게 전하지 못한 비밀이 있으니.

실제 가치는, 그것을 아득하게 초월했다.

‘걸린 별 부스러기가 몇 개인데.’

‘이건 양보 못 하지. 절대로.’

누구도 완전히 욕심을 놓지는 못했다.

그래도 유운 덕분에, 아까처럼 눈이 뒤집히지는 않았다.

‘굳이 이 소식을 알릴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지. 새로운 녀석이 훨씬 더 이득이잖아.’

이미 자신의 돈이 들어간 상황이다.

신선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약속을 했다.

‘경쟁자 늘어나면 안 돼. 우리끼리만.’

‘입이 가려워도 꾹 다무세나.’

문제는 모두가 그리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시청자의 절반은, 재미로 끼어들었다가 본의 아니게 도박중독자가 된 신선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도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신선들이었다.

순수한 방송 애호가.

각자 소화, 거암, 설영, 그리고 유운을 좋아하는 신선들이었다.

가만히 구경했던 것도, 유운이 다른 신선을 혼내는 장면이 너무 신기해서였다.

마음에 한점 거리낄 것이 없는데, 억지로 침묵할 리가 없었다.

- 이번에 새로운 방송을 찾았는데, 거기에 소화라는 아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그 앙큼한 것이 어찌나 장난을 좋아하는지….

- 유운이라는 친구, 생각보다 괜찮아. 인성이 되었어. 인간이지만 교분을 나눌만한 친구야.

소화와 유운에 관한 이야기가 제일 많았고.

- 거암이라는 녀석, 먹이는 재미가 있어. 소처럼 주는 대로 다 먹더만.

- 설영, 꽃과 같은 이름이여, 아름다운 사람이여! 왜 이제야 나타났단 말인가!

특이한 취향을 가진 신선들도 꽤 있었다.

그들이 비슷한 취향을 가진 신선을 초대했다.

[‘예비 시청자’로 등록하였습니다.]

[방송이 시작되면 즉시 알려드립니다.]

유운 방송에는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 내가 가장 애정하는 아이는 말일세….

- 그 아이만 한 아이가 없지. 다른 누구하고도 안 바꿀 것일세!

각자의 ‘최애’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신선이 도마 위에 올랐다.

남의 집 불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는 법.

신선들의 내기 또한 자연스럽게 알려졌다.

- 이렇게나 많은 별 부스러기가 걸려있네~

- 머리 있으면 계산 좀 해봐. 이미 바닥을 깔아줬지? 수학적으로 이득이네?

- 안 하면 바보~!

- 유운 방송 봐라. 인생, 아니 선생역전 기회다!

수다쟁이 신선, ‘설설동자’가 신나게 소문을 퍼트렸다.

대박의 꿈을 안고 새로운 신선, 아니 희생자들이 모여들었다.

- 어서 시작해…!

- 잠도 안 자고 기다리고 있다고!

‘즉시 알리기’ 설정을 해놓고, 각자의 화면만 주시했다.

그렇게 유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선계에서 가장 뜨거운 방송인이 되었다.

- 운이 방송을 보려고 대기를 탄다고? 이렇게 많은 신선이?

-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껄껄껄!

매화검선과 종남일패가 숫자를 확인하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찌나 황당한지 절로 웃음이 나왔다.

- 다들 기를 쓰고 시청자 늘리려고 하는데. 운이 녀석은….

- 될놈될.

- 뭔가 그게?

- 요즘 유행하는 말인데. 될 놈은 된다는 뜻이라네.

- 실로 운이에게 어울리는 말이로군, 허허허.

유운은 아무런 미끼도 걸지 않았는데.

자청해서 미끼를 만들어서 무는 상황이었다.

- 첫 방송에 50명만 해도 엄청난데….

- 두 번째 방송은 이미 대박이 예약되었구만.

아무튼 두 신선은 기분이 좋았다.

* * *

설영의 표정이 오늘따라 개운했다.

“언…, 설 사부 얼굴이 그거 같아요.”

“뭐가 말이냐?”

소화 나름의 배려를 느낀 설영이 인자하게 웃었다.

“일주일간 똥 못 싸서 끙끙거리다가, 마침내 놈을 낳았다며 방방 뛰던 왕씨 아저씨?”

“…이…이!”

언니라고 안 놀라는 점을 칭찬해야 하나, 똥쟁이라고 놀리는 점에 화를 내야 하나.

설영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끙끙거렸다.

‘그나저나 다행이로구나.’

유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 사부의 심화가 이리 깊을 줄이야. 내 불찰이로구나.’

원래부터 사내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사내였다.

그런 그에게 은호풍 사건은 크나큰 충격이었을 터.

‘미약하지만…. 그건 분명 심마(心魔)였어.’

마음의 병 때문일까.

설 사부의 살기는 유독 진득하고, 강렬했다.

‘다행히 이번에 조금 풀리긴 했지만. 계속 신경 써야겠구나.’

그렇게 쉽게 사라지면 어찌 심마라 불리겠는가?

잠시 억눌릴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기왕이면 설 사부가 가장 바라는 것을 줘야겠지.’

유운이 빙그레 웃으면서 두 사람을 이끌었다.

“갑자기 상점가에 가자고요? 히히. 공자께서 같이 가시면 저는 무조건 좋아요.”

“주군께서 사는데 어찌 그림자가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화와 설영은 각자의 이유로 따라왔다.

객가촌은 그리 크지 않은 마을.

금세 번화한 시전 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무엇을 사시게요, 공자님?”

“옷이란다.”

“옷이요? 공자님 옷 지난번에 새로 장만한 좋은 건데. 때도 안 타던데.”

“내 옷이 아니고, 설 사부의 옷이란다.”

“제 옷 말씀이십니까, 주군? 당장 필요하지는 않습니다만.”

설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제가 사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저 언제든, 하명만 하시면 됩니다!”

설영이 가슴을 쿵 치며 외쳤다.

“저쪽으로 가시지요.”

마침 옷가게가 두 개나 보였다.

한쪽은 사람이 바글거리는 가게였다.

“와, 왜 인기가 있는지 알겠어요. 엄청 친절한데요?”

점원이 입에 꿀이라도 바른 것일까.

손님의 피부가 하얗네, 손가락이 길어서 아름답네, 이마가 고와서 좋은 인연이 생기겠네.

끊임없이 외모를 칭찬하며, 다양한 옷을 권했다.

다른 한쪽은 정반대였다.

“와, 용케 안 망했네요.”

주인장은 무뚝뚝해서 손님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유운은 그중 후자에게로 향했다.

“왜요? 저쪽이 저 친절하고 좋잖아요.”

유운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와, 진짜 왜 안 망했지? 망해야 하는데…헙!”

소화가 들어가자마자 그리 말하더니 입을 막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옷의 종류가 너무 한정적이었다.

검은 옷, 약간 검은 옷, 많이 검은 옷, 회색 옷, 조금 검은 색이 섞인 회색 옷.

소화에게는 칙칙하기 짝이 없는 옷들이었다.

하지만 설영은 달랐다.

“색감이 어두워서 눈에 잘 띄지 않으니 은신하기에 좋고. 옷감이 질겨서 작은 암기쯤은 너끈히 막을 수 있고. 조금이지만 마수 가죽까지 첨가하여 방어력도 높으니. 참으로 훌륭한 옷입니다.”

설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 중에서도 새까만 암행복이 마음에 드는 듯 연신 만지작거렸다.

“언…. 아니 설 사부, 취향 진짜 이상해요. 으으으….”

하지만 오늘, 지금만은 소화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설영.

바로 고독랑 설영이 이 옷가게의 주인공이었다.

“마음에 드는 옷은 이미 정하신 듯하고. 이 두건은 어떻습니까?”

“이것 말씀이십니까?”

유운이 검은 두건 하나를 슬쩍 건넸다.

목에 두르니 입과 코를 전부 막을 정도로 길었다.

“이것도….”

이번에는 손을 감싸는 천 장갑이었다.

“이것도 어울릴 것 같군요.”

몸에 살짝 걸치는 피풍의, 발목까지 오는 긴 장화, 각종 도구 수납함이 달린 허리띠, 품에 넣고 다니는 속주머니까지.

모두가 밤처럼 어두운 검은 색 일색이었다.

“주군…. 이건 설마….”

물건을 집어 든 설영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모두 함께 입어보시지요.”

설영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착용을 시작했다.

눈 뜨고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 흑의, 목도리보다는 복면에 가까운 두건, 손발을 가리는 장갑과 신발에 수납이 가능한 허리띠와 주머니, 심지어 암기통까지.

“주…군. 아셨군요.”

설영의 눈가에 설핏 눈물이 고였다.

거울 속 보이는 남자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짐작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암영, 암영이로군요! 하하하하!”

설영이 흥분하여 외쳤다.

‘협객전’의 제일 조연이자 주인공의 오른팔.

천하를 위해 나를 버리고 어둠 속에서 헌신하는 암살자.

설영이 개인적으로 뽑은, 가장 멋진 사내!

주군이 굳이 설영과 똑같은 복장을 선물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 고독랑 설영이야말로 가장 믿는 부하라는 뜻이로구나!’

그간의 고생과 노력이 모두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아찔한 쾌감에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게 대체 뭐예요? 설 사부가 뭐 잘못했어요?”

소화는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웨엑. 이상해. 온통 새까맣고.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누군지도 모르겠네.”

백리세가제일, 아니 어쩌면 천하제일일지도 모르는 예쁜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언니라고 놀리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본인이 저리 좋아하지 않느냐.”

“…진짜네요?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소화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꽁꽁 동여매서, 햇빛은커녕 공기나 제대로 들어가는지 의문이었다.

“히히. 아무튼 설 사부가 좋으면, 저도 좋아요.”

“나 역시 그러하단다.”

고슴도치처럼 까칠했던 설영의 기분이 풀렸다.

소화와 유운은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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