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청수향 (8)
폭풍과 같은 하루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설 사부.”
“하명하십시오, 주군.”
전신을 흑의로 감싼 설영이 그림자 속에서 대답했다.
평소보다 더욱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대장간에 가야겠습니다.”
“청수향이 코앞이거늘. 갑자기 왜…?”
“아무리 우리가 어렵다고 하여도, 손님으로서의 예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운이 일행의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 그렇군요.”
일행은 마차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차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노인처럼 골골거렸다.
은가의 공격은 거의 다 막아냈으니, 그 때문이 아니었다.
첫 번째 원인은, 격렬한 질주로 인한 누적된 충격.
두 번째 원인은….
“저 때문이로군요. 죄송합니다, 주군.”
설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부석 좌측이 길게 베여서, 내부가 반쯤 드러났다.
설영의 검기가 남긴 상처였다.
“어찌 설 사부 탓이겠습니까.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지요.”
유운은 설영을 달래더니, 마부에게 물었다.
“혹시 솜씨 좋은 대장간을 아십니까?”
“청수현을 오간 지만 십 년이 넘습니다. 마침 객가촌에 뛰어난 장인이 있습니다.”
금만보가 나름 신경 쓴 마차답게, 겉은 수수한 목재지만 속은 단단한 철로 만들어졌다.
마차를 제작하는 곳이 근처에 있을 리 없으니, 목수와 대장장이의 도움이 필수였다.
“그럼 다 함께….”
“저와 설 사부면 충분합니다.”
유운이 따라오려는 장노와 거암을 말렸다.
‘주, 주군!’
설영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이렇게 많은 일행 앞에서, 나 하나만을 콕 찍어서 동행을 요청했다?
설영이야말로 내가 가장 아끼는 부하라고 공표하는 격이 아닌가!
‘첫 단독 수행이라니! 내 삶에 이런 기쁨이 올 줄이야!’
설영의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결코 주군의 기대에 어긋나고 싶지 않았다.
스스슥!
설영이 그림자 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물론 그래봤자, 벌건 대낮.
어린아이라도 설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시지요, 설 사부.”
“존명!”
설영이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유운의 뒤로 숨었다.
설영은 당당한 백리세가의 검수.
당연히 특별한 은신법 같은 것은 몰랐다.
“…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둘은 대장간으로 향했다.
* * *
허름한 대장간 안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내 말을 좀 들어보거라.”
“듣긴 또 뭘 들어요? 그 고리타분한 이야기?”
머리 허연 노인과 파릇파릇한 젊은이가 다투고 있었다.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게 말이냐 되요? 쟁기랑 방어구만 만들라고요? 그래 가지고 무슨 큰돈을 벌어요?”
“내 스승의 스승 때부터 지켜온 원칙 아니더냐. 그러니 부디 마음을 돌려서….”
“이렇게 평생 거지처럼 살라고요?”
“이놈아 지금도 먹고살 만하지 않더냐. 돈이 없었으면 내가 너를 어찌 키웠겠느냐?”
“은혜를 입었으니, 나도 평생 이 꼴로 살라는 거죠?”
젊은이가 팔을 돌리며 대장간을 가리켰다.
좁고 허름한 건물. 삐걱거리는 풀무. 녹이 슨 망치와 집게. 숯검정이 잔뜩 눌어붙은 화로.
젊은이의 눈에는 차지 않는, 초라한 대장간이었다.
“싫어요.”
“뭐?”
“그놈의 스승, 나는 섬기지 않으렵니다.”
“무, 무슨 소리냐?”
“떠날 거라고요! 이 징그러운 곳에서.”
“강아, 안된다, 안돼!”
“이거 놔요!”
노인이 잡아도 소용없었다.
젊은이는 바짓가랑이를 잡는 노인을 내팽개쳤다.
“어이쿠!”
노인이 넘어져서 모루에 머리를 부딪치기 직전.
유운이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고, 고맙소, 공자.”
“아닙니다, 어르신.”
노인을 부축한 후, 유운이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넌 또 뭐야? 무슨 상관인데. 우리 일에서 빠져!”
“무슨 사정인지 짐작은 되오. 중간에 끼어서 함부로 참견하려는 것도 아니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소? 어찌 키우고 가르친 스승을 이리 대한단 말이오?”
유운이 노인을 가리키며 꾸짖었다.
“퉤. 그간 일한 것으로, 돈값은 충분히 했어.”
“이놈아, 강이 이놈아. 내가 너를 헛키웠구나, 헛키웠어!”
큰 절망 때문일까.
노인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 모습을 본 장노가 안타까운 듯 등을 토닥였다.
“기운을 내시오. 살 사람은 살아야지.”
어찌 보면 자신과 유운과 비슷한 관계였다.
하지만 결과는 판이하니, 더 씁쓸했다.
젊은이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짐을 챙겼다.
“어, 어디로 가느냐?”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노인이 물었다.
“조가.”
“……!”
“흑산조가로 가오. 큰돈을 준다고 하더이다.”
이미 남이라 생각하는지, 말투조차 바뀌었다.
“사람 해하는 것만 잔뜩 만드는, 잔혹한 놈들 아니더냐! 하필이면 그런 놈들에게! 안 된다!”
노인이 부들부들 떨며 손을 뻗었다.
“구질구질하게…, 윽!”
젊은이는 노인을 쳐내려다 오히려 뒤로 밀려났다.
망치질로 단련된 자신을 종잇조각처럼 다룬다니?
“꿀꺽. 무림인!”
유운이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자임을 안 순간, 태도가 바뀌었다.
“조용히 가겠으니, 놓아주십시오.”
젊은이는 그러면서 한참을 뒤졌다.
옷과 먹을 것, 값비싸 보이는 제련 도구 몇 가지였다.
그리고 돈이 들어있는 전낭.
젊은이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유운의 눈치를 보며 돌아섰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달랐다.
스윽.
그림과 기록이 가득한 종이 뭉치였다.
그걸 본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것만은 안 된다! 다 되어도 그것만은 안돼!”
“무슨…. 이것을 만드는 데 내 노력도 들어갔다고!”
“대대로 만들어온 것이거늘, 어찌 그리 말하느냐! 차라리 돈을 다 가져가라!”
“…이런 젠장.”
한 차례 욕이라도 하려다, 유운을 보고 억지로 억누르더니 몸을 일으켰다.
“퉷. 다시 돌아올 거요. 그때는 지금처럼 순순히 가지 않아.”
“저, 저!”
평생을 키워온 아들 같은 녀석의 변절에, 노인이 목덜미를 잡았다.
그렇게 젊은이는 사라졌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한참을 넋을 놓고 있던 노인은, 유운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구려. 감사하오, 젊은이. 못된 제자놈에게서 구해주었구려.”
슬픔과 절망, 고통이 가득 찬 눈을 보니 유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휴우. 그게 어떻게 된 일이고 하니….”
유운이 조심스럽게 묻자, 노인이 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노인, 공야묵의 가문은 대대로 대장장이 일을 했다.
선조 중 무기 제작이 뛰어난 자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자신이 판 무기에 죽을 뻔했다.
자신은 간신이 살았으나, 원수에게 아내와 딸이 죽었다.
앞으로 다시는 사람을 해하는 무기를 만들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하고 금지했으니.
야장 일족은 그렇게 재능 일부를 제한당했다.
“내 녀석의 마음 또한 충분히 이해하오. 재능이 뛰어난 녀석에게 농기구와 방어구, 마구 따위를 만들게 시켰으니.”
야장 공야묵 역시 선조의 유훈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흑산조가는 아니오. 돈이라면 온갖 흉악한 물건을 다 만드는 놈들이지 않소!”
흑산조가가 어떤 이들인지 모르는 자가 없었다.
특히 대장장이를 가혹하게 착취하기로 유명하니, 야장 일족이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놈의 돈, 돈.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완성되는데. 그걸 못 참고….”
“완성이라니요?”
“그것이 뭐냐면….”
공야묵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심을 굳혔다.
“제자 녀석도 떠난 마당인데, 은인께 숨길 게 뭐가 있겠소?”
공야묵이 대장간 깊은 곳에서 묵직한 봇짐을 가져왔다.
모루 위에 올린 후, 꾸러미를 풀며 무언가를 뽑아 들었다.
“이 백철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가 대대로 제련한….”
유운이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숙일 때였다.
스르릉!
하얀빛이 번뜩이며 목덜미를 향했다.
유운이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네 이놈, 감히!”
설영이 노한 목소리로 외치며 몸으로 앞을 막았다.
‘암습! 내가 순박한 겉모습에 속았구나!’
설영은 자책하며 검을 뽑았다.
살수 중에는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몇 달, 길면 십 년을 위장하는 예도 있다.
만약 이 모든 게 유운을 노린, 잘 짜인 연극이었다면?
절대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노인에게 검을 뻗을 때였다.
“진정하십시오, 설 사부.”
“주군!”
유운이 손끝으로 검을 잡았다.
“아무리 주군이 자비로우시더라도, 이번만은 안 됩니다. 어찌 암습자까지 용서한단 말입니까?”
“암습이 아닙니다.”
“무슨…?”
설영이 뒤늦게 모루 위를 살폈다.
번쩍!
하얗고 긴 검이 보였다.
‘가검?’
날을 세우지 않은 검.
사실상 몽둥이에 가까운, 가짜 검이었다.
하지만 설영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분명 대대로 무기를 만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제작 편의상 어쩔 수 없이 검의 형태를 띠었을 뿐, 진짜로 날이 있는 검은 아니옵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검이 날카롭더구나. 게다가 하필이면 공자의 코앞에서? 나는 못 믿겠다!”
“그, 그게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소인의 실수이옵니다!”
공야묵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넙죽 엎드렸다.
자칫하면 자객으로 오해받아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어나십시오, 어르신. 괜찮습니다.”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공야묵을 일으켜 세웠다.
“정말 아니옵니다. 자랑하려던 마음이 앞선 탓에….”
“압니다. 저를 죽이려면 어르신 같은 장인이 아니라 자객을 보냈겠지요.”
“제가 장인임을 어찌 확신하십니까? 혹시나 저분 말대로라면 어쩌려고….”
공야묵이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평생 살아온 흔적은 몸에 새겨지는 법, 어찌 모르겠습니까?”
손자가 장성했을 노쇠한 나이인데도, 온몸의 근육은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기에 손의 지문은 화상 때문에 뭉그러졌으니.
누가 보아도 대장장이 내지는 금속을 다루는 야장이었다.
“크흐윽. 감사합니다, 공자님.”
공야묵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유운은 공야묵의 검을 자세히 살폈다.
‘검 자체가 품은 힘이었구나!’
사람의 살기가 아닌 검의 예기(銳氣)였다.
검이 품은 기운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근처에만 가도 목이 베일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