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청수향 (10)
주먹이 으스러진 채, 넋을 잃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신 반복하며 엎드린 거한.
다진 감자처럼 반송장이 된 사내 둘.
그렇게 세 명이 의원에 실려 나갈 때의 일이었다.
‘호오. 분명 나를 보았을 텐데?’
묘가영은 신기했다.
사과 요구든, 이를 빌미로 한 추파든 뭐라도 있을 법한데.
유운 일행은 묘가영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객잔을 떠났다.
‘이거 냄새가 나. 대박의 냄새가.’
가문이나 명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운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
자신을 모욕하는 상대에게 먼저 사과를 할 정도로 예를 중시하며, 위협 앞에서도 흥분하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다.
무엇보다 느낌.
샘물처럼 맑고 선하면서도, 대나무처럼 꼿꼿한 그 느낌이 좋았다.
‘백리유운이라. 명성이 실제를 따라가지 못하잖아?’
그렇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뜻!
묘가영은 생끗 웃으며 유운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결국 들켰다.
“조금만 더 모른 척해주지.”
객잔 뒤편, 어두운 골목길.
붉은 경장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월루 청수향 지부장, 묘가영이었다.
“언제쯤 나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와, 한참 전부터 알았다고요? 은신술 수련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네.”
가볍게 입술을 삐죽이더니 한 발짝 다가왔다.
“그거 알아요? 공 야장, 우리가 오래전부터 침 발라놓은 거.”
묘가영의 말에 유운이 살짝 놀랐다.
“그럼 어째서 돕지 않았습니까?”
“뛰어난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건 알았는데, 정확히 뭔지는 몰랐던 게 첫째 이유.”
“……!”
“둘째로,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공 야장이 우리의 제안을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그런 때를 말이에요. 그렇게 몇 년을 기다렸는데….”
묘가영이 유운을 빤히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처음 본 분에게 반나절 만에 뺏겼네요?”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괜찮아요. 뭐 거래라는 게 다 그렇죠.”
어차피 화월궁이 제련 기술에 목숨 걸 정도로 무력이 부족하지도, 돈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패착 역시 두 가지. 첫째, 제자라는 놈이 저리 빨리 스승을 포기할 줄 몰랐다.”
“……!”
“둘째, 그날 하필 유운 공자께서 대장간에 왔다.”
정체를 짐작하는 것쯤이야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다음 말이 더 놀라웠다.
“사고 싶은 걸 못 샀는데. 대신 나에게 다른 걸 팔면 안 돼요?”
“뭘 말씀이십니까?”
“공자의 운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촌구석을 마실 삼아 잠깐 걸었더니 미래의 천하제일장인을 얻는다? 보통은, 아니 노력해도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묘가영이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유운 곁으로 다가왔다.
“물론 공자의 능력이나 인품 덕이기도 하지만…. 저는 달리 생각해요. 하늘이 공자를 돕는다.”
“……!”
“재능도, 인맥도, 세력도 중요해요.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보충할 길이 있지요. 하지만 운만은 달라요.”
“운이라.”
“제 지론이 뭔지 아세요? 운칠기삼.”
“……!”
인생의 성공은 운이 칠할, 능력이 삼할이라는 뜻이었다.
“제가 운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설령 그렇다 한들, 그걸 어떻게 팔겠습니까?”
방금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보충할 길이 없다고.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운을 보충할 방법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운 좋은 사람 곁에 붙어있는 거지요.”
묘가영이 묘한 미소를 띠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길한 사람 곁에서 운을 나눠 받기.”
말이 안 되는 듯하면서 묘하게 말이 되는 주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어때요?”
“무슨 뜻인지요?”
일부러 야릇하게 말했지만, 유운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올곧을까?’
그래서 더욱 탐이 났다.
“동행으로요.”
“저에게는 이미 일행이 있습니다.”
“하루에 은자 백 냥.”
“……!”
“그저 옆에만 있게 해줘도 드릴게요.”
어지간한 객잔을 통째로 전세 내고도 남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저희에게도 정해진 일정이 있습니다.”
“알아요. 백호문과 흑호방의 개파대전에 가려는 거잖아요.”
“개파대전이라….”
이름 모를 여인조차 확신할 정도로, 소문이 널리 퍼졌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한나절이면 도착하니, 사실상 거저먹기 아닌가요? 목적지도 같은데 기를 쓰고 같이 안 갈 이유가 있을까요?”
“휴우.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좋습니다. 다만 일행의 동의가 있어야만 합니다.”
유운이라고 돈의 소중함을 모르지 않는다.
작은 수고만으로 큰돈을 벌 기회를 마다하는 것이 오히려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묘가영이 생끗 웃었다.
* * *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저는 이 동행, 반대예요.”
소화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양 옆구리에 손을 올렸다.
묘가영이 마음에 안 든다는 항의의 표시였다.
소화의 말에 유운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일행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묘가영이 눈을 반짝였다.
‘이 꼬마가 핵심이로구나!’
형식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유운이 주인이 맞다.
하지만 그 주인이 한 종복을 총애하고 있으니.
그 종복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매일 은자 일백 냥을 줄 텐데도?”
“안되는….”
“그 돈이면 당과 수천 개, 아니 당과 가게를 살 수 있는데?”
“다, 당과? 꼴깍.”
소화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되어요. 우리 공자님 옆에는 나만 있을 거예요.”
유운 옆에 딱 달라붙어서 이쪽을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그 돈의 반만 떼어내도 굶주린 아이들 수백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텐데….”
“아, 아이들?”
소화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부모 잃고 다리 밑에서 사는 아이들 보았어? 아, 너는 부유한 백리세가에서 자랐으니 잘 모르겠구나.”
“나도 알아요, 안다고요!”
소화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희미하게, 어렸을 때 기억이 있었다.
누구도 돌봐주지 않았던 비참한 시절이.
“칫. 알았어요. 대신 이 안으로는 오지 말아요.”
소화가 팔을 돌려서 한 바퀴 원을 그렸다.
소화와 유운, 장노까지 들어가면 딱 차는 작은 원이었다.
“그래, 알았어. 노력해볼게.”
노력.
조금은 애매한 단어로 말을 돌렸다.
다른 사내들이 조금 멀어진 틈을 노려서 물었다.
“너, 설마 언니가 마음에 안 드니?”
“응!”
“깔깔깔! 너 진짜 재밌는 아이구나.”
대놓고 묻는다고 대놓고 대답하다니.
앞으로의 여정이 재미있어질 것만 같았다.
“정 마부, 이만 출발하게.”
“예, 노야. 이랴!”
장노의 말에 따라 마부가 마차를 몰았다.
“외간 여자를 이 마차 안에 들이는 건 절대 안 돼요, 공자님. 알겠죠?”
“하하하, 알겠다 소화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소화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으으…. 어디서 저런 불여우 같은 게 나타나서.”
소화의 강력한 반대가 아니었다면, 유운 바로 옆에 앉을 기세였다.
하지만 소화의 생각에도, 은자 백 냥은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그래서 타협한 결과가….
“공자님~! 같이 가요~!”
유운의 마차 옆.
분홍빛 마차가 똑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제법인데? 그래봤자 꼬맹이. 내가 네 남자를 뺏어줄게.’
묘가영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 *
청수향.
다리를 건너자, 맑은 물의 도시가 펼쳐졌다.
격자무늬로 난 물길을 따라 푸른 물이 흘렀고, 그 위를 알록달록한 배들이 떠다녔다.
“물 위에 건물을 지었다더니 정말이로군요.”
“예쁘다! 태어나서 이런 광경은 처음 봐요!”
장노와 소화가 제일 먼저 감탄사를 터트렸다.
“정문에서 철기보까지 동전 열 문! 선착순이니 먼저 타시는 분부터 출발합니다.”
“갓 추수한 밀 한 포대가 동전 육십 문! 열 문만 더 내시면 집 앞까지 가져다드립니다!”
호객꾼과 장사꾼, 관광객에 마실 나온 주민들까지.
물과 배 위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어떻게 땅에 물길을 냈지? 신기해요, 공자님.”
“이곳 사람들은 이것을 운하라고 부른다더구나.”
“운하요?”
“물길을 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대단한 일이지.”
바닷가라면 차라리 쉽다.
청수는 강물치고도 수위 변화가 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곳곳에 수문이 설치되어있다는구나.”
“수문이요?”
소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물의 양을 조절한다고 하니. 결코 쉬운 기술이 아니지.”
“놀랍네요.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들었는데.”
묘가영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금의 기술로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 쓰고 있는 수문들은요?”
“전조(前朝)의 유산이라고 하지요.”
“와, 천 년 전에 파놓은 물길이 아직도 유지된다고요?”
묘가영이 짐짓 놀랐다는 듯 눈을 떴다.
동그랗게 눈을 뜬 모습이 어딘가 소화를 닮았다.
“공사 규모를 볼 때 적어도 만 명 이상을, 십 년 이상 동원해야 했을 것이고. 당시 건축 현황을 기록한 공문서까지 남아있으니. 전조가 맹에서 이야기하듯, 암흑기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와,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세요?”
“전조가 만들어놓은 운하 덕분에 홍수도 막을 수 있고, 쌀과 밀을 운송하는 조운도 활발해졌으니. 기술이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지요.”
“저도 견문이 좁은 편은 아닌데. 박학다식이란 이런 거로군요.”
묘가영이 감탄하며 유운을 올려다보았다.
기술부터 시작해서 역사, 정치, 경제까지.
모든 화제가 하나로 이어지니 들을수록 무언가를 깨우치는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하며 건물을 돌자마자 풍경이 바뀌었다.
“저기가 바로 그곳이군요.”
“백호문이 저렇게 큰 곳이었어요?”
소화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청수향 북부, 야트막한 언덕 위.
수많은 전각으로 가득한 장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호문.
하얀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는 정도의 검문(劍門)이었다.
“차아!”
쿠우우우웅!
구령에 따라 동시에 수백 명이 발을 구르니, 땅이 울렸다.
와글와글.
거대한 장원 내부를 오가는 인원만 천여 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수백 개의 전각과 망루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으니.
장원이라기보다는 숫제 성에 가까웠다.
“뭘 이리 놀라느냐, 본가보다 작은데.”
“원래 안에서는 잘 안 보이는 법이에요. 그것도 몰라요?”
“뭐? 요 녀석이, 크흐흐!”
“히히!”
거암과 소화가 떠드는 사이, 백호문의 정문이 보였다.
“와…!”
“몇 명이야, 대체?”
과장 안 하고, 개미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백, 이백, 천…. 어림잡아도 칠천에서 팔천은 되는 듯합니다.”
“설마 저들 모두가 이번 행사에 온 것입니까, 공자?”
“달리 이유가 있겠습니까, 노야.”
유운 일행은 기가 질려서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