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각자의 꿈 (1)
“저리 비켜, 여긴 내 자리야!”
“밀지 말라고, 앞에 공간 없어!”
“어어, 넘어진다, 넘어져!”
굳게 닫힌 백호문의 정문 앞.
수천의 사람들이 앞으로 가려고 아우성쳤다.
사람이 문자 그대로, 발에 치일 정도였다.
“와아아….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 봤어요, 공자님.”
“백호문과 흑호방의 행사에 대한 기대감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지 않겠느냐.”
이들 대부분은 촌구석 무림 문파 출신.
모두가 각자 꿈을 안고, 풍요로운 땅에서 기회를 잡고자 했다.
그중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입장하고 싶어서 전낭을 찔러주는 자도 있었다.
“이보게 교 호위, 우리 지난번에 주루에서 보지 않았나? 내가 섭섭지 않게 담았으니, 우리부터 앞으로 좀 보내주게.”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런 망동을 하시오! 썩 물러서시오!”
입구를 지키는 호위가 호통을 치며 사람들을 정리했다.
“어이, 거기 무슨 문파라고 했지? 호엽파? 당신은 여기로.”
“단호도문이라고? 그쪽은 이리로.”
처음에는 그냥 선착순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문파의 지위나 무력에 따라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이건 불공평해요. 저 사람들이 더 오래 기다렸는데. 하고 싶은 말도 많을 텐데.”
소화가 화내자 묘가영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단다, 얘야.”
“왜요? 차별은 나쁜 거잖아요.”
“여기에 사람이 몇 명 있는 줄 아니?”
“…무지 많죠.”
“최대 만 명.”
“……!”
“이 사람들이 동시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크, 큰일 나겠죠?”
“백호문주께서 그 사람들을 전부 만나 볼 수 있을까?”
“…못하시겠죠?”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되지. 타인과의 시간보다, 문파와 가족을 위한 시간이 더 소중하니까.”
“……!”
시간은 돈보다 귀한, 한정된 자원.
상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너무 어려워요.”
소화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종종 잊기 쉬운데 이곳은 무림이란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남의 어깨를 밟을 수밖에 없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묘가영이 서글픈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공자, 미안하지만 여기서는 잠시 헤어져야 할 것 같아요.”
묘가영이 품에서 배첩을 꺼내 들었다.
[ 화월루주 친전 ]
고급스러운 주황색 봉투로 감싼 배첩이었다.
“맙소사, 배첩 색깔 봤어?”
“주황색! 이 등급이잖아?”
“나 실물은 처음 봐.”
이름 없는 무인들은 주황색 봉투가 전표라도 되는 양 군침을 흘렸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개 등급 중 이 등급이었다.
“초대에서부터 급을 나누었군요.”
“이곳은 무림이니까요.”
그것만으로 설명이 된다는 점이 씁쓸했다.
“루주의 이름이 걸린 초청이라, 외부인을 데려갈 수가 없네요. 안에 들어가서 다시 봬도 될까요?”
어지간히 미안했던지 유운의 눈치를 보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오해를 받으면 속이 상할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소저.”
유운이 부드럽게 웃어주자, 그제야 마음이 풀렸다.
“그럼 내일 봬요.”
묘가영이 손을 흔들더니 백호문의 안내인과 함께 안으로 사라졌다.
줄은커녕 아예 문조차 따로 있었다.
“아, 우리도 저렇게 가야 하는데. 백리의 이름으로 깃발만 들면, 딱! 뜨면 딱! 딱 뜨면 딱!”
“푸하하하, 그건 또 어디서 배운 말투냐?”
소화의 말에 거암이 폭소했다.
“지난번 주루에서요. 딸기코 아저씨가 말하면서 이렇게 하던데요? 딱! 딱!”
박자에 맞춰서 허리를 튕기는 모습이 딱 배 나온 중년 아저씨였다.
“으하하, 무슨 꼬맹이가. 널 볼 때마다 놀란다, 볼 때마다.”
“근데 설 사부는 어디 갔어요?”
소화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 사부께는 내가 따로 부탁한 일이 있다.”
“없으니까 또 허전해요, 히히.”
소화가 그리 말할 때였다.
“물렀거라, 흑산조가의 행차니라!”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덟 명의 노예가 짊어진 가마가 나타났다.
건장한 노예들조차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커다랗고, 화려한 사 인승 가마였다.
놀랍게도 인파가 반으로 갈라졌다.
“치잇, 진짜 인생 너무 불공평해요!”
소화가 입을 내밀 때, 가마가 앞으로 다가왔다.
* * *
툭.
흑산조가의 군사, 손사문은 귀찮다는 듯 붉은 배첩을 요 위에 던졌다.
“군사님, 이 배첩은….”
“그런 게 필요하겠느냐? 우리는 흑산조가이거늘.”
오만한 말에 모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아무런 말이 없어도 모두 길을 터주니, 앞으로 쑥쑥 나아갈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얼마나 신경 써서 지었나 볼까.”
손사문은 먼저 주변 환경과 건물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정문을 굳이 가파른 언덕 쪽에 짓는다? 나쁘지 않아. 제법 머리를 굴렸어. 호오. 물길을 세 겹으로 파놓았구나. 하나는 땅 밑으로 숨겨놓고 비상시 식수로. 호오, 방위는 기문진의 영향을 받았고….”
촤라락.
마치 자죽철접선으로 계산하듯, 끊임없이 손을 짚었다.
부채날 사이로 학이 날아갈 듯 꿈틀거렸다.
“말과 마차가 다니기 힘든 것이 우연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강호에 우연이라니? 고약한 농담을 하는구나. 설계 때부터 외부 침입을 고려해서 지었음이 분명하다.”
부관의 물음에 손사문이 부채질을 했다.
“개미들이 참 많이도 왔구나. 뭐 그리 먹을 게 있다고. 쯧쯧.”
언덕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흘깃 보고 말았다.
어차피 그들은 개미, 장기판의 말조차 아니었다.
손사문은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장기판을 그려갔다.
“골(骨), 역시 천하백가뿐이겠지.”
천하를 받치고 있는 이십여 개의 기둥.
몸의 뼈대에 해당하는 가문이었다.
“기둥의 특징을 아느냐?”
“무엇입니까?”
“그리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다.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 모두가 무너지지.”
“……!”
“놈들도 그걸 알아. 그러니 하나를 건드리면 모두가 들고일어날 것이다.”
흑산조가는 분명 백리세가의 종가였다.
하지만 손사문의 말투는, 완전히 타인과 같았다.
“그러니 건드리려면, 차라리 하나가 아니라 모두를 건드려야지.”
“꿀꺽. 모, 모두를…!”
부관이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고 숨을 죽였다.
여덟 노예는 귀머거리이고, 두꺼운 벽이 외부 소음을 차단했다.
그런데도 저절로 몸이 떨렸다.
“그 정도 용기도 없이 어찌 천하육주를 도모하겠느냐?”
“그, 그렇습지요, 군사님.”
“그리고 우리 종가들은, 육(肉).”
“……!”
“백가라는 뼈에 달라붙은 살점과 같다. 뼈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살덩이 말이야.”
촤르륵.
손사문이 부채 속 학을 노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니 하얀 학이 마치 하얀 호랑이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이놈들도 우리와 비슷한 꿈을 꾸는 것 같구나. 스스로 뼈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흑호, 백호 이놈들이 말씀이십니까? 설마 거기까지….”
“충분히 가능하지. 가능하고말고.”
“……!”
어지간한 문파라면 턱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치가 너무 좋았다.
끝자락이라고는 해도 유주 안이라 땅이 기름지다.
천하의 중심부라는 심주와의 거리도 멀지 않고, 기이한 민족과 요술로 가득한 뇌주와 오가기도 괜찮다.
심지어 운하처럼 돈 주고 사기도 힘든 기반 설비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문제는 꿈은 같은데 방향이 반대라는 말이지.”
백호문은 확실한 정도의 문파이고, 흑호방 또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정도였다.
그러니 이들이 천하를 뒤집겠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기존 기둥들의 인정을 받아서, 작은 기둥이 되고 싶겠지. 그러나 그건 우리 조가의 방식이 아니야.”
촤르르.
손사문은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역시 안 되겠어.”
“안 되겠다 하심은?”
“방해돼. 치워야겠어.”
“……!”
흑산조가가 꾸는 꿈에 나올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문제는 강도였다.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어떤 타격을 입힐 것인가?
무(武). 재(財). 병(兵). 모(謨). 권(權)….
글자 패를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길 때였다.
“호오. 이게 누구야. 우리 막내 공자님 아니신가?”
유운을 발견한 손사문이 환하게 웃었다.
“고귀하신 백리의 혈손께서 왜 이리 고생하고 계실까. 흐음. 뭐 내 알바는 아니겠으니….”
그가 세운 계획에서 유운의 역할은 따로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두 문파와 흑산조가의 미래였으니까.
“그렇다고 굳이 내버려 둘 필요도 없지.”
손사문이 히죽 웃으며 부관에게 속삭였다.
부관은 눈을 번뜩이더니 가마에서 내려 사라졌다.
* * *
‘좋지 않구나.’
유운이 손사문과 눈이 마주쳤을 때 든 생각이었다.
그의 눈빛은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개미를 보는 듯했다.
그의 예감은 곧바로 사실이 되었다.
손사문의 가마 말고도 흑산조가 일행은 많았다.
그중 짐을 잔뜩 짊어진 무리가 정면을 가로막았다.
워낙 짐이 높고 많아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도 장한들이 나타났다.
“모두들 물럿거라, 경도문의 행차시다!”
청수향 인근의 군소 문파.
종가의 종가에 명을 받는, 조그마한 문파지만 이곳에서의 지위는 어마어마했다.
“비켜드리게, 어서.”
“지체하면 큰 경을 칠 걸세.”
“뒤로, 뒤로!”
인파가 움직이니 저절로 몸이 뒤로 밀렸다.
“이봐, 여기 사람 있어! 이러다 넘어지겠네!”
“내 말이.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파도에 휩쓸리듯 몸이 밀려났다.
파도에 버티던 사람도 어느 순간, 파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솨아아…!
사람의 파도가 끊임없이 몸을 불렸다.
그리고 파도가 유운 일행을 덮쳐왔다.
“으으읏?”
소화는 당황해서 몸을 피하려 했지만, 공간이 너무 좁았다.
앞뒤가 좁혀지더니,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바, 발이 닿지 않아요!”
겁에 질려 소리칠 때였다.
“꺄아악!”
소화의 몸이 붕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