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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학사의 무공백과-105화 (82/114)

제105화

각자의 꿈 (2)

소화는 뜬 채로 발을 버둥거렸다.

압력이 점점 세지니, 정신이 아찔했다.

‘이렇게 죽어? 내가? 안 되는데. 공자님 나 없으면 끼니도 거르는데.’

소화의 의식이 흐릿해질 때였다.

철썩!

방파제에 부딪힌 듯, 파도가 멈추어 서버렸다.

하지만 파도는 한번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낸 물결이 소화 쪽으로 일었다.

철썩!

철썩!

소화는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익숙한 등이 보였다.

유운이었다.

“어? 왜 뒤로 안 가?”

“뭐가 막혔는데?”

“벽도 없는데 무슨 소리야. 밀어.”

“젠장, 안된다고, 안 돼.”

일부가 억지로 밀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 무슨.”

“사람이 아니고 벽이잖아!”

유운이 소화의 앞을, 거암이 장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려 수십, 아니 백 명이 넘는 힘이 몰려왔지만 끄떡도 없었다.

“밀어, 밀라고!”

몇 차례 의도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밀려온 사람들.

조금씩 흐름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때쯤 유운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조심하십시오.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시고, 자리를 지키십시오!”

유운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무리하지 마세나. 욕심부리다가 자칫 다칠 수 있어.”

“대전을 보지도 못하고 몸이 상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맞는 말일세.”

서서히 미는 힘이 줄어들었다.

극락과 지옥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했던가?

여전히 사람은 많았지만, 전과 같은 위험은 없어졌다.

“휴우. 살았다. 공자님 감사해요.”

“조심하거라. 노야도 괜찮으십니까?”

“대주 덕분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유운은 소화와 장노의 안전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왜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밀린 거예요, 공자님?”

“누군가의 고약한 장난질이란다.”

“자, 장난이라니요. 진짜 나쁜 사람이네!”

“그렇지.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될 사람이지.”

가마의 하늘거리는 주렴 사이.

부채로 얼굴 반을 가린 사내가 보였다.

차라락.

유운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순간, 부채가 걷혔다.

그리고 사내의 가느다란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마치 겨우 ‘이 정도로, 뭘!’이라고 말하듯.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대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우와아아! 제일총관입니다.”

“정문 광장에 나타나신 것은 처음 아니야?”

“어디 맹에서 귀빈이라도 오셨어? 누구지?”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과연 흑산조가로구나!”

“제일총관이 마중하러 나올 정도라니….”

“실질적인 세력은 흑산이 최고지!”

사람들의 환호성에 손사문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늘게 웃었다.

그런데 제일총관이 향하는 방향이 이상했다.

“어? 저 사람은 누구야?”

“문파의 중진이라기에는 너무 어린데?”

유운을 본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유운 공자.”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병 총관님.”

두 사람은 지난번 회동 때부터 구면이었다.

“두 분 방주님, 문주님께서 마중 나오셔야 함이 마땅하나, 지금 긴한 회의 중이라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이리 맞아주시는 것만 해도 영광이지요.”

두 사람의 친근한 대화를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청년은 누구야?”

“무슨 배첩을 받았길래?”

“학사복에 어린 나이…. 설마?”

몇몇 사람들은 유운을 알아보고 눈을 빛냈다.

“병 총관님, 저분이 귀한 손님인 것은 알겠으나 지금까지 기다린 저희의 입장도 생각해주셔야지요.”

“맞습니다.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 저희도 인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청장의 색깔은 암암리에 손님의 급을 나누는 것과 같다.

일정 부분, 주최자가 책임을 진다는 뜻.

그러니 결코 함부로 정해지지 않는다.

“공자님, 무례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하오나 혹시 배첩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유운이 품에서 배첩을 꺼냈다.

“저 색깔은 처음 보는데?”

“정식 배첩 맞아?”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빨주노초파남보, 보통 일곱 가지 색으로 구분 짓고는 했는데.

저 소년 학사의 배첩은 하얀색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백호문이잖아. 하얀 호랑이를 섬기는 문파인데….”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색을 줬다는 건…. 맙소사.”

어떠한 등급도 매길 수 없는, 귀한 손님!

백호문이 유운에게 부여한 등급이었다.

“어여 비키거라!”

“물럿거라!”

제일총관이 정문을 향해 움직이자, 호위무사들이 길을 텄다.

“제일총관께서 가는 내내 직접 안내하신다고?”

“문주님 말고, 저리 공손한 거 처음 봐.”

유운 일행은 광장의 정중앙, 뻥 뚫린 길을 통해서 정문으로 들어갔다.

“봤죠? 봤죠? 이게 우리 공자님이에요. 에헴!”

소화는 의기양양해서 어깨를 들썩였다.

문을 통과하기 직전, 소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베애애!

혓바닥을 길게 내밀면서, 한쪽 눈알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완전히 얄미운 표정과 함께.

“으하하하!”

“꼬마 놈이 놀릴 줄 아는구나!”

누가 보아도 손사문을 향한 도발이었다.

“하하하, 당돌한 꼬맹이로구나.”

손사문은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뽀각.

손사문이 아끼던 글자 패(貝) 하나가 부서져 버렸다.

* * *

“아기님의 백일잔치는 나흘 뒤입니다. 사흘간 매일 연회를 열어, 분위기를 돋울 예정입니다.”

제일총관이 직접 유운과 장노에게 일정을 설명했다.

“사흘이라. 긴 시간이 되겠군요, 노야.”

“그렇겠지요.”

두 사람 다 명문세가 출신.

연회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겉보기로는 한량들이 먹고 마시는 장소지만, 사실은 상대방의 허실을 탐색하는 정치 무대.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이곳에서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소화는 그런 어려운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우와, 오 층짜리 전각이 통째로 우리 거예요?”

소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백호문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손님들께서는 특급 전각에 머무실 자격이 있으시니까요.”

중년 시비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저 아가씨 아닌데, 히히.”

유운에게 무슨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말없이 웃더니 데운 물과 수건을 가져왔다.

“따뜻하다.”

소화는 기분 좋게 씻고 화려한 내부를 구경했다.

비단으로 만든 보료

금실로 수놓은 요와 이불.

은은하게 풍겨오는 용연향의 냄새.

어지간한 부잣집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사치였다.

“아, 좋다.”

소화는 베개 사이로 몸을 묻었다.

어찌나 부드러운지 몸이 녹아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가씨, 간단한 요깃거리입니다.”

“아가씨, 실내에서 편하게 입으실 수 있는 잠옷입니다.”

“아가씨, 서역에서 들여온 향수 이온데, 마음을 평화롭게 한답니다.”

자신은 고작 시비일 뿐인데, 계속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극진히 모셨다.

소화는 뭔가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좋은데. 심심해.”

유운과 장노는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설영은 흑의를 차려입고, 어두운 곳을 찾아 돌아다녔고, 거암은 몸이 찌뿌둥하다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휘이잉…!

서늘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세안으로 촉촉했던 피부가 뽀송뽀송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상쾌해!”

기분 좋게 옆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흑산조가 일행이 머무는 전각이 있었다.

“딱 좋아, 딱.”

소화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특급이 일급보다 좋은 점은 고급스러운 실내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층수!

오층에서 사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운이 따르려는지, 때마침 맞은편 전각에서 손사문이 나타났다.

서류 더미를 들고, 우아하게 차향을 즐기며 업무를 보는 듯한데.

“그런 꼴 못 보죠? 히히.”

소화가 냉큼 안으로 들어가더니 못 쓰는 종이를 몇 장 가지고 왔다.

부스럭, 부스럭.

북. 북.

종이들을 잘게 찢어서 바람에 흩날렸다.

“응? 이 날씨에 무슨 눈송이가…”

서류를 보다 별 생각 없이 말하던 손사문이 멈칫했다.

“…….”

눈송이가 아니라 종이 가루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뿌린 것이 분명한.

손사문이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전각, 저 높은 곳에 조그마한 아이가 보였다.

“안녕! 안녕!”

해맑게 웃으면서 마치 친구처럼 손을 흔들었다.

물론 친구일 리 없다.

“하하하, 재미있는 꼬맹이로구나.”

입가가 살짝 굳긴 했지만, 그리 말하고 돌아섰다.

자신은 흑산조가의 군사.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저런 꼬맹이와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도도도도…!

손사문이 사층 창가로 나오는 기색만 보이면, 소화가 전력을 다해 오층으로 뛰었다.

그리고 뿌려지는 종이 가루들.

꽃받침을 하고, 노골적으로 이쪽을 노려보는데….

“하하하, 장난을 좋아하는 녀석이로구나.”

둘만 있으면 모를까, 백호문의 시비와 조가의 부하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공간이다.

슬며시 치미는 노화를 억눌렀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다.

솨아아…!

바람 쐬러 창가에 나오기만 하면 종이 비가 쏟아졌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손사문이 나타나기만 하면 달려 나왔다.

종이 가루가 끝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못 하조? 사층보다 오층이 훨씬 더 좋조? 소화에게 손도 못 대조? 못 되조? 나쁘조? 냄새나조!”

음정도 안 맞는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고.

실룩샐룩.

심지어 뒤돌아서 엉덩이춤까지 추었다.

“으드득.”

손사문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다. 괜찮다.”

그리 말하면서 돌아볼 때였다.

툭툭.

소화가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

손사문도 무의식적으로 자기 이마를 매만졌다.

빠직!

이마에 실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하. 하. 하. 고놈 참….”

썩은 미소, 푸들거리는 입술.

손사문은 분노를 터트리지도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킥킥. 쌤통이다.”

못된 짓을 한 자에 대한 벌로는 너무 약했지만.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다른 곳을 가볼까?”

소화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밖으로 향했다.

이름께나 들어본 문파들도 고작 삼급 전각이고, 흑산조가나 화월루 정도 되어야 일급이었다.

그러니.

‘누구니 넌?’

유일하게 유운과 같이 특급 전각을 배정받은 사람.

소화는 살짝만 구경하고 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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