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각자의 꿈 (3)
“아직도 이러고 계십니까.”
장 군사가 은호풍을 보며 탄식했다.
“꿈을 꾸었소.”
은호풍이 잠긴 목소리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달콤하고 아름다운 꿈이었지. 그 꿈을 계속 꿀 수 있다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어찌나 고통이 심했는지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윤기 나던 은발은 빛을 잃어 노인의 백발처럼 보였다.
“이제 그만 잊으시지요.”
“어찌 잊겠소? 내가 어찌 그녀를 포기할 수 있단 말이오!”
은호풍이 소리 지르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크흑, 백리 소저. 그대는 대체 어디에 있소?”
텅.
술잔 내려놓는 소리가 텅 빈 가슴과 같았다.
은호풍은 애절한 목소리로 그녀를 찾았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원하거늘. 얼마나 보고 싶어 하거늘. 하늘은 대체 왜! 왜!”
은호풍은 절규하며 술을 들이켰다.
심화(心火)가 너무 깊어서,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랬기에 처음에는 헛것을 본 줄 알았다.
대롱대롱.
전각 일 층 입구.
“****!”
“****!”
호위무사가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들어 올려서 뭐라고 혼을 내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몰래 들어오려다 걸린 모양이었다.
“원래는 큰 벌을 내리는 게 맞으나. 딱 봐도 근처 귀빈의 자녀로군요. 대략 훈방하고 끝내면…. 공자님?”
장 군사가 여상하게 말하던 때였다.
운명처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너…, 너?”
은호풍이 술병을 내려놓고 더듬거렸다.
분명 본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분명 백리세가의….
“너…!”
은호풍이 손가락질을 한 순간, 호위무사가 꼬맹이를 내려주었다.
도도도도…!
꼬맹이가 짧은 다리로 열심히 도망쳤다.
“너, 너, 너! 그녀는 어디 있느냐! 백리 소저!”
은호풍이 노호성을 지르며 오층을 단번에 뛰어내…리지는 못하고, 열심히 계단으로 달려갔다.
“거기 섯거라!”
“으아아! 사람 살려요, 납치범, 납치범!”
꼬맹이가 주변에 대고 크게 외쳤다.
다른 문파의 무인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납치?”
“백호문 안에서, 수많은 무인이 보는 데서?”
“미친놈인가?”
스르릉.
어이없어하면서도 칼을 뽑았다.
“뭐, 뭐라고?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야!”
은호풍은 다급하게 소리치며 꼬맹이를 쫓아갔다.
“살려줘요, 나쁜 짓, 나쁜 짓 한대요!”
“저런 금수만도 못한 놈을 봤나!”
“저 새끼 조져!”
딸을 가진 중년 무인들이 눈을 번뜩였다.
“이런 바보들아, 아니야, 오해라고, 오해!”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은호풍은 소리 지르며 꼬맹이를 찾았다.
그러나 그사이, 꼬맹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으아아아! 너희 때문에 놓쳤잖아!”
“더러운 놈이 끝까지 추잡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잡아! 잡아서 주리를 틀자!”
중년 무인들이 포위해올 때였다.
휘리릭, 쿵!
수십의 무인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선두에서는 묵빛 갑주를 입은 일뢰대주 묵사웅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은가의 직계를 건드리려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으, 은가? 설마 신비은가?”
“아니오. 오해요, 오해!”
은가의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모두들 세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다 문득 집안에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정말로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까맣게 속은 것입니다!”
반드시 오해를 풀어야 했다.
은가의 손속은 잔혹하고, 망설이는 법이 없으니.
잘못하면 멸문이었다.
“으아아! 지금 이딴 놈들이 중요해? 어서 찾아, 그 꼬맹이를 찾으라고!”
“존명!”
수십 명의 사내들이 몸을 날리니, 무공도 모르는 꼬맹이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여깄다!”
“찾았다!”
“나, 나는 나쁜 짓 안 했는데. 나 잡아가면 나쁜 사람인데! 나쁜 사람은 머리 벗겨지는데!”
소화가 아무리 열심히 손짓, 발짓 변명해도, 은가의 무인들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무인들이 막 소화의 목덜미를 잡으려 할 때였다.
스팟!
바람 소리가 일더니 누군가 소화의 앞을 막아섰다.
소화는 뒷모습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서, 설 사부. 으아앙!”
“누구도 이 아이에게 손을 델 수 없다.”
서늘하고, 냉정한 살기!
마치 굶주린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같았다.
‘고수!’
‘만만치 않은 놈이야. 우리만으로는 힘들 수도 있어.’
‘대주를 기다리자!’
곧 은호풍과 묵사웅이 도착했다.
“너, 너는…! 으드득. 네 놈은…!”
은호풍을 본 설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바로 저놈이었다.
그가 꾸었던 모든 악몽의 주인은.
모든 심화의 근본은, 저 느끼한 얼굴을 가진 사내놈이었다.
화르르…!
가슴 속에 불길이 일었다.
절로 살기가 짙어지고, 눈동자가 검어졌다.
반대로 은호풍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얼굴까지 두건으로 감싼 살수라. 서역 출신인가?”
“살기가 대단합니다. 어쩌면 도망친 마도의 잔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님.”
“백리세가에서 이토록 지독한 살수를 키우고 있을 줄이야.”
은호풍은 순간 분노조차 잊고 감탄했다.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살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베는 칼이로구나. 탐나는구나.”
은호풍의 말에 설영이 흠칫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살수 따위가 아니지. 그녀는 어디 있느냐?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은호풍이 애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진심을 담아서 계속 호소했다.
“노오오옴…!”
그럴수록 설영의 살기는 더욱 강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을 때.
유운이 나타났다.
“힘을 믿고 어린아이와 본가의 무인을 핍박하다니! 어찌 은가가 이럴 수 있소!”
유운이 처음부터 강하게 항의했다.
“네놈, 잘 만났다. 네놈이 숨긴 백리 소저를 내놓아라.”
“은가의 행사가 이토록 무도할 줄이야.”
유운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이냐?”
“아무리 여색에 눈이 멀었기로서니, 같은 명문의 여인을 탐하다니.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려.”
“그, 그게 아니니라!”
오해로 비롯된 일이다.
어지간하면 유운도 이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소화와 설영을 구해야만 했다.
“여인을 탐하고자 사람을 협박해? 그게 은가의 공식 입장이오?”
“네 이놈, 교묘한 말로 우리 공자님을 괴롭히는구나!”
쿠르르…!
일뢰대주 묵사웅이 내공을 일으키자, 갑옷이 온몸을 감쌌다.
“철갑마수 갑옷이라니!”
“저런 귀물을…. 역시 뇌주의 패자로구나!”
반면 묵사웅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백리유운. 명성과는 많이 다른 자야.’
어떻게 지난 추격전을 잊겠는가?
하늘을 메우는 쇠사슬을 모조리 튕겨내는 모습을.
“네 이놈, 이번에는 얄팍한 사술로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외침과 다르게, 묵사웅은 바싹 긴장했다.
‘꿀꺽. 강기막을 펼치는 실력자이니. 오늘 일진이 사나울 것 같구나.’
저 나이에 강기지경의 무인이라니? 심지어 강기막을 펼친다?
비슷한 이야기조차 못 들어봤다.
그랬기에 본가에서 귀한 마수 갑옷까지 빌려왔다.
하지만 은호풍은 이런 사정을 몰랐다.
“일대주, 놈을 포박하게! 이번에는 놈의 입을 열고 말 것이야!”
“조, 존명!”
묵사웅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 설령 나보다 높은 경지의 무인이라 한들 이 갑옷이 있으니…!’
철이 든, 돌이든 다 썰려 나가니 보통 갑옷은 강기를 상대로 종이와 같다.
하지만 마수 갑옷은 달랐다.
콰르르…!
흉부의 구슬을 누르자, 날카로운 가시 바늘이 전신을 뒤덮었다.
‘크으윽!’
마치 내 몸 안에서 가시 바늘이 자라나서, 몸을 뚫고 나가는 기분이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본신의 내공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힘이었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죽는다.’
묵사웅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강대한 힘에도 불구하고 마수 무구를 많이 안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마기(魔氣).
태생부터 증오와 분노를 바탕으로 한 힘.
사용자의 정신을 종종 오염시키고는 했다.
“노옴. 우리 공자님을 농락하다니. 뿌드득. 찢어주마.”
묵사웅의 눈이 새빨갛게 변했다.
‘마수라니.’
유운 역시 바싹 긴장했다.
책에서는 많이 보았지만, 실제로 겪어본 적은 없었다.
살아있는 마수도 무섭지만, 죽은 마수는 더 무섭다.
무기로 쓰면 종종 사람을 잡아먹고, 재료로 쓰다가 피를 흘리면 다른 마수를 불러온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강력한 마기 때문이었다.
저릿저릿.
내공과는 확연히 다른, 악의(惡意)로 가득한 기운이 느껴졌다.
태초에 혼돈이 있어 천하를 가득 채웠다.
혼돈이 회전하고 또 회전하여 음과 양이, 하늘과 땅이, 남과 여가 되었다.
가벼운 것은 위로, 무거운 것은 아래로.
깨끗한 것은 기로, 더러운 것은 마기로.
신화의 기록에 따르면, 기의 정반대가 곧 마기였다.
기(氣)와는 달리 품을수록 몸을 해치는 것이 악기(惡氣)였다.
그런 악기가 상대의 정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심상치 않구나. 상대가 무리하고 있어.’
유운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쿵. 쿵.
흰자위에서 검은자위까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묵사웅의 눈에서 조금씩 이성이 사라졌다.
‘위험해! 먹힌다!’
유운의 본능이 소리쳤다.
영안이 조금이나마 깨인 유운만이 볼 수 있었다.
묵사웅의 뒤편.
아그작, 아그작.
범처럼 생긴 녹슨 쇳덩이 괴물.
그림자 속에서 마수 ‘주발(周鉢)’이 그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더 이상 내버려 두면, 돌이킬 수 없겠구나!’
고서에 따르면 마수의 영혼이 육신을 얻으면, 인간은 죽고 마수가 살아난다고 하였다.
‘마수에게 새로운 육신을, 그것도 무인의 육신을 줄 수는 없지!’
유운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놈이 대주님을 습격한다!”
“막아라! 공격해!”
다른 대원들이 사정을 모르고 공격해왔다.
‘정확하게, 아주 정확하게!’
너무 세게 치면 묵사웅이 죽을 것이고, 너무 약하게 치면 마수의 공격성만 자극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휘리릭!
유운이 물 위의 꽃잎처럼 회전했다.
발이 땅을 거세게 밟았다.
쿵.
바닥에 깊은 발자국이 생김과 동시에 발이 반 바퀴 회전했다.
휘이익!
전력을 다한 속도는 땅을 밟는 진각을 통해 강화되었고, 원심력을 거쳐 다리를 통해 폭발했다.
퍼어어엉!
- 회전에, 회전에, 회전이라. 옳거니, 전사경이로구나!
- 허허허, 어찌 이리 자연스럽게 쓴단 말인가. 대체 누구 제자길래?
두 스승이 보았다면, 만족스럽게 외쳤을 것이다.
소축퇴(小蹴腿)!
온몸의 회전을 이용한 묘리를 살린 공격!
그 모든 힘이 묵사웅의 내부로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