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각자의 꿈 (4)
유운이 다리에 실은 기는 깃털처럼 작았다.
회전과 회전, 그리고 또 다른 회전이 만나 돌개바람이 되었으니.
위이이잉!
무엇이든 뚫는 송곳이 되어 쏘아졌다.
터더더덩!
힘의 총량은 가시 칼날이 위였지만, 한점으로 집중한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마수 주발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가시 칼날이 거침없이 깨어져 나갔다.
‘급소를 노린다!’
용조차 역린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마수에 약점이 없을 리 없다.
‘외피가 강하다는 말은, 안은 약하다는 뜻이지.’
고대 역사서 ‘혼돈경’에 따르면, 주발의 피부는 금속이라 생채기 내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의 속살은 달랐다.
이 각도에서 접근 가능한 속살은….
푹!
송곳이 주발의 귓구멍에 박혔다.
연약한 속살이 찢어지고, 검은 마기가 피처럼 줄줄이 새어 나왔다.
끄아아아아!
마수가 비명을 지르며 집중을 잃을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마수의 혼을 붙잡아주는 주술 도구, 마옥!
가슴팍의 붉은 구슬이야말로 죽은 마수를 움직이는 동력원이었다.
파사삭!
마옥까지 깨진 순간 승부 또한 끝났다.
인간의 몸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 구슬이라는 집까지 잃었으니.
기로 가득한 정(正)의 세상을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커어어어억!’
마수가 소멸한 순간, 묵사웅의 영혼이 몸 안으로 돌아왔다.
검붉은 피가 쏟아지려 했지만, 본능적으로 참았다.
‘어찌 마수까지? 무공만 강한 자가 아니었구나!’
묵사웅은 두려운 눈으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무공과 마수 사냥의 영역은 살짝 겹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달랐다.
마수는 부(不)의 세상에 속한 생명체.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데 유운은 능숙한 마수 사냥꾼처럼 놋쇠 괴물 주발을 처리했다.
‘설마 마수의 영혼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백리세가의 자제라면 당연히 무인일 터.
주술사도, 마수 사냥꾼도 아닌 자가 볼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다.
묵사웅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갑옷은 못 쓰게 되었구나.’
철갑 갑옷의 핵심은 주발의 가시 칼날.
주발을 잃은 이상, 결국 금속조각에 불과했다.
‘툭 치기만 해도 무너질 터인데. 왜 끝을 내지 않는 것이오?’
묵사웅이 유운에게 눈으로 물었다.
순수한 무인의 승부에서 마수라는 반칙을 먼저 꺼내 든 것은 자신이다.
심지어 자신이 먼저 선공하려고 했다.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로. 그런 일로 무인을 모욕하고 싶지 않소.’
유운은 의미가 전해지길 바라며 고개를 저었다.
“뭐지? 무슨 일이야?”
“글쎄. 휘두르다가 만 것 같은데?”
전사경에 실린 힘은 모두 주발에게 쏟아졌다.
그 때문에 바깥에는 별다른 흔적이 남지 않았다.
유운이 묵사웅의 코앞에 멈추어서 있으니, 마치 타격 직전에 서로 싸움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만두시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본문의 큰 행사를 앞두고 피를 보려고 하다니!”
뒤늦게 백호문의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은 공자, 호의로 초대했거늘 이런 식으로 본문을 욕보일 셈이오?”
“그게 아니라….”
“은가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소.”
“……!”
그 순간 은호풍도 일뢰대도 일제히 멈추어 섰다.
“허어억! 아, 안돼. 누님에게 알려지면…!”
“대, 대주님. 작전상 후퇴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만하시지요.”
“맞습니다, 좋은 잔칫날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들불 같던 살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유운 쪽도 마찬가지. 일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뿌득. 내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소동은 별 피해 없이 마무리되었다.
오직 한 사람만 빼고.
주르륵. 쿨럭.
묵사웅은 돌아서면서 몰래 피를 토했다.
‘백리유운. 실로 끝을 알 수 없는 자로구나.’
지난번에 보여준 실력조차 전부가 아니었으니.
은호풍과 비교하니 한숨만 나왔다.
‘휴우. 오늘만은 쉬고 싶구나.’
처음으로 그는 근무지가 아닌 술집으로 향했다.
* * *
“그때 전력으로 공격을 했었어야 했소!”
쾅!
은호풍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러나 장 군사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는 눈이 많았습니다. 백리세가는 물론 백호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을 이야기하면 되지 않겠소? 백리 소저를 가둔 악적이라고.”
“결국 백리세가 내부의 일입니다. 공자께서 무슨 말을 하든, 사람들은 백리세가의 말을 더 믿을 것입니다.”
“그럼 나더러 대체 어찌하란 말이오!”
은호풍이 답답한 듯 소리를 질렀다.
“보셨잖습니까, 그때 소저의 상태를.”
“…힘들어 보였지.”
은호풍은 차마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어떤 이유를 댄다 해도 보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어찌 해야 하겠소?”
장 군사에게 물었다.
“결국은 정도로 가야 합니다.”
“정도라 함은?”
“정식으로 청혼하셔야지요.”
“……!”
은호풍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단어 하나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지고, 손이 떨렸다.
“물론 백리세가에서는 거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송구하옵니다.”
은호풍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철없이 살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깨달으셨으면 됐습니다. 지금도 공자님 최고의 무기는 유효하니까요.”
“그것이 무엇이오?”
“가주님의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점이지요.”
“……!”
은 가주는 결혼하지 않아 남편이나 자식이 없다.
게다가 나이 차이도 꽤 나니, 사실상 은호풍이 소가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한 이유는, 그의 행실이 너무 천박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달라지시면 됩니다.”
“만약 그래도 놈들이 그녀를 내놓지 않는다면?”
“강자가 되시면 됩니다. 무림의 권력자가요.”
“권력자!”
“백리세가의 깊은 곳까지 뒤져볼 정도의 권력자가 되란 말씀입니다.”
“내가, 이 부족한 내가 할 수 있겠소?”
“그 대답은 오직 공자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장 군사는 이것으로써 자신은 할 바를 다했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
얼마나 고민했을까.
은호풍이 얼굴을 굳히더니 입을 열었다.
“정 군사. 사실 나는 알고 있었소.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놈이었는지.”
“고, 공자!”
평생 들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말에 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또한 백리유운은 물론 그의 수하조차 이기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자조적인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깃들었다.
“그런 은호풍은 오늘 죽었소.”
“……!”
“어리석고 못난 한량은 죽었소.”
스팟!
은호풍이 검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은빛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흩날렸다.
“여기에 있는 이는 새로운 은호풍! 당당히 사랑을 쟁취하여, 사내대장부로 다시 태어날 무인이오!”
“크흑, 공자님! 저는 이럴 줄 알았습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은호풍의 다짐에 일뢰대원들이 눈물을 쏟았다.
스르릉.
은호풍이 검을 뽑았다.
파지지직!
한 줄기 번개가 검 위에 어렸다.
“일뢰!”
“그토록 노력해도 뽑아내지 못했던 번개를….”
“드디어…공, 아니 주군!”
장 군사와 일뢰대원들이 감격하여 외쳤다.
한낱 한량으로 살던 이가, 드디어 은가의 핏줄로써 깨어난 것이다.
“할 수 있소. 아니 무조건 해내겠소.”
그녀를 위해서라면!
마지막 말은 입 안에 삼켰다.
그랬기에 오히려 이전보다 위엄이 넘쳤다.
쿠웅!
“주군!”
은가의 사내들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감격에 겨워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선언하겠소. 백리세가조차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최고의 사내가 되겠다고. 뇌주를 넘어서 육주 최고의 사내가 되겠다고.”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장 군사가 끼어든 이유는 결코 은호풍의 마음을 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유운이라는 자 뒤에 있는 살수를 보셨습니까?”
“보았소. 일찍이 그 정도의 살기를 지닌 자를 나는 처음 보오.”
“맞습니다. 흉포한 야수 그 자체였지요.”
장 군사는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를 죽이면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요? 백 명? 천 명? 저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마인를 휘하에 두다니…, 장 군사, 설마?”
“그렇습니다. 저는 유운이라는 자가 힘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숨기다니!”
“대체 왜?”
사내들 모두가 웅성거렸다.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
“왜 숨겼냐가 아니라, 왜 드러냈냐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계속 세상 물정 모르는 학사 연기를, 순진한 막내 연기를 계속해도 되거늘. 왜 드러냈을까요?”
장 군사는 자기 이야기에 취해서 잔뜩 달아올랐다.
“그토록 음흉한 자가, 누가 봐도 마인인 저런 살수를 이리 드러낸다? 대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설마…!”
“때가 되었다는 소리지요. 대권에 도전할 때가.”
“대권이라 함은…?”
“최소 백리세가. 어쩌면…. 그 이상!”
사내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으득. 놈이 가주가 된다면 절대 그녀를 얻을 수 없게 되겠지. 그럴 수는 없어, 아니 될 말이야.”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놈보다 더 빨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 군사가 탁자 위에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놈이 남몰래 그리고 있을 큰 그림을 말입니다.”
쿠웅!
모두의 가슴속에 묵직한 돌이 떨어졌다.
“실로 두렵구나, 어떤 그림일지.”
“우리가 막아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른 그자를 우리가 막아야 해!”
사내들은 어느새 장 군사에 감화되었다.
뜨거운 목소리로 그림 속에 빠져들었다.
유운이 결코 그린 적 없는, 유운의 그림 속에.
* * *
콩!
유운이 소화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히잉. 아파….”
사실 진짜 아픈 것은 마음이었다.
유운이 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서러워서 눈물이 고였다.
‘다 은 공자 때문이야. 바보, 변태, 고집쟁이….’
속으로 열심히 욕을 하고 있었는데.
유운이 길게 탄식을 했다.
“은 공자는 실로 불쌍한 사람이다.”
“…그렇긴 하죠.”
결국은 모두 자신의 장난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소화도 솔직히 미안했다.
“그러니 장난 좀 그만 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노력할게요, 히히.”
소화는 거짓말은 하지 못했다.
그러니 노력할 것이다.
언제나 실패할 그 노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