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각자의 꿈 (5)
‘마수라. 다른 세상의 일인 줄로만 알았거늘.’
유운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텅 비어있다.
그런데 땅은 꽉 차 있다.
아주 얇은 경계선 너머로, 전혀 다른 두 세상이 이어져 있다.
기의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생명을 순환시키는 기로 가득한 정(正)의 세상.
세상을 갉아먹는 마기로 가득한 부(不)의 세상.
세상만 이상한가? 아니었다.
‘이상하기로 따지면, 내가 제일이지.’
유운은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존재인 두루마리를 펼쳤다.
‘어디 보자. 여깄구나.’
일뢰대주 묵사웅과의 전투가 잘 녹화되어 있었다.
더 좋은 점은 마수의 혼이 생생하게 찍혀있다는 사실이었다.
‘혼을 가진 괴물이라.’
유운은 영상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마기란 본디 혼돈에서 나온 찌꺼기였다. 불완전한 존재였다···라고 책은 말했다.
그런데 실제로 마주한 마기는 달랐다.
기와 완벽하게 동등한 존재.
지독한 생존력과 지배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우월할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보이는 것만 믿지 말아라.”
“정의가 항상 이기는 이유? 그야 이긴 쪽만이 정의(正義)가 뭔지 정의(定義)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
유운은 전조의 현인이 남긴 가르침을 떠올렸다.
비록 사람도, 나라도, 심지어 원본 책도 없지만, 그 가르침만은 남아서 이어졌다.
‘어쩌면 여기에 길이 있을지도 모르지.’
유운은 신선들이 사는 세계를 생각했다.
이전에는 존재했는지조차 몰랐던 세계.
그렇다면, 유운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힘 또한 있을 터.
여기에 그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화르르···!
유운은 동영상을 느리게 돌리며 세밀하게 관찰했다.
기와 마기가 서로 처음 만날 때의 반응은?
‘마치 얼음과 불과 같구나!’
직접 마주하는 순간, 서로 상쇄되어 무(無)가 되어버렸다.
그랬기에 기는, 마기는 각자의 장악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걸 장악력이라는 단어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당위’였다.
‘내가 여기에 존재해도 된다는 확신. 존재의 근거!’
유운의 머릿속에 수많은 철학서와 역학 이론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두루마리를 통해 알게 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세상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아련하게 무언가가 떠올랐다.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형체를 드러내는 순간, 유운의 세상은 다시 한번 뒤바뀔 것이다.
‘확실히 놈의 움직임은 달라. 뭔가 생명체 같지 않아.’
놋쇠 괴물이 자신과 싸울 때의 반응도 살폈다.
마치 영체와 같았던 그 움직임을.
놋쇠 괴물이 마기를 활용하는 방식도 연구했다.
‘이 모두를 이해해야만,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모든 무를 이해하고, 분석하여, 완전한 무에 도달하라!
어렸을 때 멋지게 보였던 그 가르침이었건만.
경지가 올라갈수록 점점 더 멀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선조님.’
이렇게 배우고, 익히고, 연구하고.
때로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이 모든 과정이 좋았다.
그랬기에 유운의 본질은, 학사였다.
차르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느리게, 최대한 빠르게.
수없이 되돌려보면서 연구하고 공부했다.
그렇게 흡족해하면서 영상 목록을 볼 때였다.
‘어?’
목록에서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숫자가 눈에 보였다.
유운은 설마 하면서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외공 수련 45일 차】 (조회수 1)
【백리팔검 분석】 (조회수 2)
…
..
.
【해원검 대 적랑쌍도】 (조회수 1,229)
여기까지는 예상 가능한 숫자였다.
그런데…
【SSS급 신상을 선물 받았다!】 (조회수 : 1,321)
【밥만 먹고 벌크업!】 (조회수 : 1,605)
【회식의 정석】 (조회수 : 1,493)
【미치광이 남주가 내게 집착한다】 (조회수 : 2,937)
…
..
.
보자마자 정신이 어질해지는, 해괴한 제목들로 가득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유운은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의 사용 기록을 확인했다.
[녹화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자동 업로드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사용자가 제목을 지정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제목을 참조하여 적합한 제목을 추출합니다.]
자동 업로드야 그렇다 치자.
제목도, 이해는 안 가지만 넘어갔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바로 조회수였다.
‘이걸…이렇게 많이 본다고?’
유운은 어이가 없어서 입만 떡 벌렸다.
만서각 식구들끼리 먹고 떠들고 웃는 동영상이, 등평도수, 즉 물 위를 달리는 동영상보다 조회수보다 많다니?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실수가 있었나 보구나.’
유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도 실수하고, 신선도 실수를 한다. 두루마리라고 어찌 완벽하겠는가?
그리 생각할 때였다.
[업적, ‘총 조회수 일만’을 달성하였습니다!]
[하급 업적 보상으로 ☆ 0.2개가 지급됩니다!]
[ 최초 달성으로 인해 보상이 두 배로 늘어납니다!]
[‘은하 상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적합한 대가를 지급하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조회수 정산을 시작합니다.]
…
..
.
‘정산이라고?’
[정산 비율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유운이 끄덕이자 화면에 시세표 비슷한 것이 나왔다.
[현재 정산 비율 : 조회수 100 = ☆ 0.1개]
‘총 조회수 일만이면…10개?’
유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받은 후원금에, 조회수 보상까지.
[☆보유량 : 29.2개]
황당할 정도로 큰 금액이 쌓였다.
더군다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방송은 한 번에 불과했으니까.
“방송만 제대로 해도 엄청나겠군요!”
유운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 껄껄껄, 얼마나 큰일이 벌어졌는지 이제야 알겠느냐?
- 크흐. 별 부스러기를 흘리고 다니는 놈이 이리 많다니. 역시 신선계는 진짜 미친놈투성이야.
- 뭐 그래서 우리 운이가 득을 보았으니, 좋은 일 아닌가?
- 그럼, 그렇고말고. 으하하!
두 신선이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 고작 열일곱 소년이 별 부스러기 스물아홉 개라. 실로 믿기지 않는구나.
- 아무리 운이 녀석이라도, 정말 대단한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내기’는 제외한 수치였다.
한참을 기뻐하던 두 스승이 유운에게 물었다.
- 그런데 써보지 않을 테냐?
- 그래,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유운은 두 스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편의 기능은 대충 뭔지 알겠으니….’
바깥으로 전해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전과 달리 훨씬 작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상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그렇다. 하다못해 영약만 사서 먹어도….
“영약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허허, 그렇구나. 이미 충분히 가진 것을. 나조차 또 잊었구나.
매화검선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신선이 된 나조차 욕심을 놓지 못했거늘.’
가져도 가져도 부족한 게 사람 마음이다.
하물며 귀하디 귀한 영약이라면?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과욕을 부리다 몸을 해치고 말았을 터였다.
- 다른 좋은 것도 많단다. 운명을 보게 하는 묘약부터 가공할 공격력을 가진 신병이기, 타인의 정혈을 흡수하는 보패조차 있단다. 물론 비싸지만 말이야.
종남일패가 은근한 목소리로 권했다.
- 그게 무를 닦는 데 도움이 됩니까?
- …쉽고 빠른 길이지.
종남일패는 일부러 의뭉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면 저는 택하지 않겠습니다.”
- 쯧쯧. 무인이 이리 욕심이 없어서야.
“아닙니다. 제자는 욕심이 많습니다.”
- 그런데 왜?
“쉬운 길을 보면 그리로 가고 싶은 법 아니겠습니까?”
- 과연 운이로구나. 길게 보고, 바른길로 가야 끝에 도달할 수 있는 법이니라.
종남일패가 흡족하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무엇보다…, 이 별 부스러기는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 그게 무슨 소리냐?
“보십시오.”
유운은 각 동영상의 조회수를 가리켰다.
유운의 비무 영상도 조회수가 높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소화가 옷을 받고 환하게 웃는 영상.
만서각 모두가 함께 먹고, 마시고, 떠드는 영상.
소화와 설영이 투덕거리며 시끌시끌한 영상.
특히 후원금에서 소화의 지분이 컸다.
“어찌 저 혼자 이룬 성과이겠습니까?”
- 허나 저들은 알지도 못하지 않느냐? 그냥 써도 상관없다.
“제가 알지 않습니까.”
- ……!
한점의 흔들림도 없는, 올곧은 대답이었다.
- 그렇다고 함부로 보물을 내어줄 수는 없다. 이는 두루마리라는 기적이 안배하는 바와 어긋나니….
“그렇다면 기다리겠습니다.”
- ……?
“그들을 위해 쓸 기회를 기다려서, 그들을 위해 쓰겠습니다.”
- 운이, 이 녀석…!
두 신선은 울컥했다.
가슴 한편은 답답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 * *
두루마리 너머, 유운이 듣지 못하는 공간.
- 기적을 남을 위해 쓰겠다? 크흐. 이런 말 들어본 적 있나? 이게 화산의 제자일세. 하하하!
매화검선이 잔뜩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 친구, 술도 안 먹고 취하긴가? 크하하, 같이 취하세나.
종남일패도 기꺼운 표정으로 웃어젖혔다.
- 그런데 솔직히 아쉽기는 하네. 운이의 재능이라면….
종남일패가 입을 쩝쩝거리며 덧붙였다.
-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야. 오히려 잘된 일이지.
- 무슨 말인가?
-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돈이 있으면 쓰고 싶고 보물을 보면 갖고 싶지 않나?
- 그야 그렇지. 나부터도 당장 눈앞에 신비한 묘약이 있다면, 사버리고 마니.
- 그렇게 야금야금 쓰다 보면, 정말 귀한 물건들은 사지 못하지 않나.
- 흐음. 듣고 보니 그렇구먼. 차라리 잘되었군.
매화검선이 거기에 덧붙였다.
- 무엇보다 우리의 운이가 아닌가.
- 으하하, 맞아. 우리의 운이지!
단순한 말속에는 깊은 믿음이 담겨있었다.
-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쓰지 않을 녀석이지만, 모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전부 다 쓸 녀석이네.
- 그렇지, 그렇고말고.
- 무엇보다 나는, 두루마리가 운이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네. 그렇기에···.
- ·…··?
-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가치 있게 쓸 거라고 생각하네.
- 옳거니! 나 또한 그리 믿겠네.
두 신선은 서로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