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각자의 꿈 (6)
타닥타닥.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
서역풍의 대리석 바닥에, 북부 유목민의 천막.
그 사이로 흐르는 신비한 음악과 달콤한 술.
백호문이 준비한 연회는 꽤나 이국적이었다.
“꽃과 달로 지은 다락(花月樓)이라. 실로 운치 있는 이름 아니오? 과연 묘 소저의 사문답다고 할 수 있소.”
문사복을 입은 청년이 은근히 안쪽으로 붙어왔다.
“자네 같은 먹물이 어찌 묘 소저와 같은 미인을 지킬 수 있겠나. 그저 그녀를 위한 시를 지어주면 족하네, 껄껄.”
중년 사내는 호탕한 척하면서 묘가영의 위아래를 훑었다.
‘지겨워, 항상 똑같지.’
묘가영은 담비 털을 목에 감고 술잔을 들었다.
그러자 동시에 대여섯 명이 술병을 가져다 댔다.
“묘 소저, 나의 청하주부터 받으시오.”
“묘 소저, 그대에게 어울리는 봉밀주가 여기 있으니….”
말을 할 때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니, 무엇을 생각하는지 뻔히 보였다.
반면 그 사내는 달랐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의 사내지.’
그와 함께 있으면 몰래 보는 눈도, 험담하는 입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신비은가와 충돌했다고 하니.
‘설마 다친 건 아니겠지?’
현명한 사람이라 무리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무림이란 본래 예측할 수 없는 장소.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저자, 설마 그자 아니야?”
“해원검이로구나!”
“오늘 은호풍 공자와 붙었다며?”
“일뢰대주와도….”
수군거리는 소리보다 묘가영이 더 빨랐다.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사람들 사이를 비집더니, 금세 유운 옆에 섰다.
“다쳤어요? 속은 괜찮아요? 뇌기는 보이는 상처보다 안 보이는 상처가 더 위험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호의에는 호의로 보답해야 하는 법.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저 때문에 방해가 된 것 아닙니까?”
유운이 원래 그녀가 있던 장소를 가리켰다.
심기가 뒤틀린 사내 여러 무리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새ㄲ…저 새로운 분들이랑은 업무차 어울린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하지 않겠습니다. 오해는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친구니까요.”
“알고 보면 정말 사소한 오해인 경우가 진짜 많죠.”
묘가영이 옆에 붙어서 계속 말을 걸었다.
“어찌 보면 우리 화월루도 오해 때문에 태어난 조직이니까요.”
“어떤 일이 있었길래?”
“진짜 별거 아니에요. 술 취한 사내놈이 시조님을 기녀로 오해하고 수작질을 부렸나 봐요. 시조님께서 그자를 손보고, 그자는 복수한답시고 의형제를 불러오고, 시조님은 살기 위해 북해로 도망치고….”
“…….”
“물고 물리는 뻔한 이야기지요. 사소한 것 때문에 죽고 사는 이야기.”
“우리 인생이 원래 그렇지요. 다 지나고 보면 사소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가끔 나이와 안 어울리는 말 하는 거 아세요?”
“땅과 하늘도 그렇지요. 서로 전혀 다르고, 안 어울리는데 항상 붙어있지 않습니까?”
“와 진짜. 방금 너무 나이 든 스님 같은 거 알죠?”
묘가영이 수상하다는 듯 유운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어떻게 이 나이에 이런 느낌이지? 애 늙은이?”
“그런 말, 정말 많이 듣습니다.”
“진짜 그럴 거 같아요.”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타닥타닥.
잠시 대화가 멈추었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공자는 꿈이 뭔가요?”
“크게는 선조의 유지를 잇는 것이고. 작게는 존경하는 무림 선배의 성취를 따라잡는 것이지요.”
“에이, 너무 평범하잖아요.”
“제가 원래 평범합니다.”
두 스승이 들었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어이없어했을 말이었다.
“저는요, 오라버니랑 같이 천하를 여행하는 게 꿈이었어요.”
“였다면….”
“지금은 못 하죠. 돌아가셨으니까.”
“…….”
“아무 말 안 하시네요?”
“뭐라 이야기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저 듣겠습니다.”
유운의 말에 묘가영이 피식 웃었다.
“그래요, 그게 더 좋네요. 괜히 위로한다고 교훈 이야기하면 기분 나쁠뻔했어요.”
묘가영이 문득 유운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참 신기해요.”
“뭐가 말입니까?”
“어쩜 우리 오라버니랑 이렇게 닮았는지.”
묘가영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유운의 하얀 피부에 닿자, 깜짝 놀라 내렸다.
“미안해요. 이거 생각해보니 거짓말 같네요, 호호.”
죽은 여동생, 죽은 누나, 죽은 어머니.
사내들에게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그렇게라도 기억할 수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아….”
유운이 어떤 상황인지 모를 리 없다.
평범한 문인 출신 어머니는 아이를 낳다가 일찍 죽었고, 아버지 역시 불의의 사고로 요절.
기억할 얼굴조차 없는 사람이 바로 유운이었다.
“외로울 때 언제든 연락해요. 한 잔 사줄게요.”
“기억해놓겠습니다.”
유운은 떠나가는 묘가영을 배웅했다.
그녀는 통통 튀더니 다른 연회장으로 사라졌다.
“나름 고충이 많겠네.”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남이랑 어울리는 직업이라니.
유운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 전각으로 걸어갔다.
펑, 펑!
종이를 적시는 물감처럼 노란 폭죽이 번졌다.
인적이 드문 정원을 돌아갈 때였다.
‘…고수!’
등줄기가 서늘했다.
기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강자가 등 뒤에 있다고.
“이 밤에 누구신지요?”
유운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펑펑!
폭죽의 노란 불빛 아래,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소협, 잠시만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황 소문주님? 소문주께서 어인 일로….”
이 문파의 작은 주인, 황철균이었다.
“조용히 뵙고자 하는 분이 있어, 조용히 찾아왔습니다.”
“…앞장서시지요.”
잔치를 앞둔 주인이 손님을 해할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유운은 황철균을 따라서 정원 깊은 곳으로 갔다.
“이런 곳이 있었군요.”
못 위의 조그마한 정자가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두어 개와 관목으로 인해 주변에서 볼 수 없는 위치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안에서 약간의 기름과 야채, 그리고 술 냄새가 났다.
유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자에 올랐다.
“허허허, 오셨소, 해원검?”
“불러놓고 얼굴도 안 비춰서 미안하군.”
청수한 백의 검객.
거북이 피부를 가진 노무인.
바로 백호문주 황일동과 흑호방주 도산호였다.
‘두 분이 이런 경지셨구나!’
산 아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오르고 보니 보였다.
강기지경.
이 두 사람이야말로 힘을 숨기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황철균과는 다르게 꽉 찬, 진짜 강기지경의 고수였다.
“허어. 그 사이에 경지가 올랐어? 과연 천하의 기재일세.”
“이제는 보이지 않는군. 적어도 우리 수준. 혹은 그 이상.”
“아, 아버님과 숙부님 수준이라고요?”
황철균은 매우 놀라 입을 벌렸다.
대체 나이 차이가, 무공을 수련한 세월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세 사람이 술상에 앉았다.
은밀한 자리라는 말이 정말인지, 시비 하나 없이 황철균이 직접 술 시중을 들었다.
“늦은 밤, 이리 찾으신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그들의 앞마당, 아니 집 그 자체였다.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게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유운 공자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문득 궁금하오만.”
황일동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짓궂게 웃었다.
유운이 별다른 정보 조직이 없다는 사실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
그러니 이곳 상황을 알 단서는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흐음. 차근차근 추론해보겠습니다. 두 분이 눈치를 본다라. 그것도 이 정도로 정성 들여 눈치를 본다고 함은….”
유운이 잠시 차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역으로 짚어보면 상대에게 그만한 세력과 정보력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최소한 집 주인을 능가하는. 이것만으로도 범위가 대폭 축소되는군요.”
“……!”
“두 분의 힘이 하나가 되었을 때를 가정하면. 아래로는 중형 아니 어지간한 대형 문파, 상단, 대부분의 종가까지 제외가 될 것이고.”
“……!”
“위로는…. 먼저 맹은 제외하겠습니다. 적이 맹이라면 대응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도주나 생존 방법을 찾고 계셨을 테지요.”
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맹은 곧 천하. 천하를 상대로 싸울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다.
“맹이 마음먹었으면 이런 논의를 할 시간도 없었을 터이니. 맞는 말일세.”
황일동이 그 정도는 자기도 예상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맹의 군세는커녕, 맹주 일족 중 한 명만 행차한다 해도 감당하지 못했겠지.”
도산호는 씁쓸하다기보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림인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혈통이 바로 영씨 일족이었다.
“굳이 규격 외의 존재를 상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차피 그들은 그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없을 터이니.”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 문파 이상, 맹 이하의 힘. 당연히 천하백가부터 시작해야겠지요.”
“……!”
자신의 뿌리를 정조준하는 말에 사람들이 침을 삼켰다.
“해주의 청해오가나 뇌주의 신비은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제외. 정복의 이득이 거의 없으니까요. 마찬가지 논리로 장주, 각주 등지에 있는 백가도 제외. 그러면….”
유운이 손으로 꼽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백호와 흑호와 이해관계가 얽힐 가능성이 있고, 지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싸워서 얻는 손실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뿌리가 깊은 세력. 객관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적대세력은….”
“……?”
“백리세가군요.”
“……!”
사람들이 침을 삼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난스럽게 시작되었던 물음에 그렇게까지 과민반응할 필요는 없네.”
“맞네. 자네를 의심하고 있지도 않고.”
두 주인의 대답에 유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땅히 의심하셔야 합니다. 문파의 주인이라면 더더욱.”
“……!”
“잊으셨습니까? 천하백가가 왜 백가(百家)가 아닌지.”
“흐음.”
황일동이 흐린 눈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백가가 되어서도 서로 싸웠고, 백가가 될만한 싹은 뿌리까지 뽑았기 때문이지요.”
알면서도 쉬쉬하는 천하의 어둠이었다.
“하지만 백리세가는 가문 내 싸움으로….”
“그러니 더욱 외부의 적이 필요하지요. 하나가 되기 위해서. 혹은 공적을 쌓기 위해서.”
그제야 유운이 진심임을 알고 얼굴이 굳었다.
“정말로 백리세가가….”
“세력의 주인이시라면, 적을 좀 더 특정하셔야 합니다.”
“……!”
“흑호와 백호가 완전히 하나가 아닌 것처럼 백리 또한 완전한 하나가 아니지요.”
단지 승계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백가라는 조직 자체가 일종의 연합체.
종가라는 이름에 묶인 다른 가문들 역시 나름의 욕망을 가진 독립체였다.
“저를 부르신 걸 보니 저는 일단 제외하신 것 같고. 나머지를 살펴보면….”
유운은 후보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다섯째 형님은 그럴 욕망은 있을 수 있어도 능력이 되지 않으시니 제외. 넷째, 셋째 누님들은 능력은 있으신데 그럴 욕망이 없으시니, 제외. 둘째 형님은 능력도 욕망도 있으시니, 일단 후보군.”
“금 파가 설마….”
“첫째 형님은 차라리 내 발밑에 다 뚫어라, 선전포고하면 했지, 뒤통수를 치실 분은 아니니 제외.”
“……!”
“서문세가는 모종의 이유로 당분간 가세 확장보다는 내실 확충에 신경을 쓸 테니 제외. 선우세가는 아직 가주가 어려서 외부에 신경 쓰기 어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