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각자의 꿈 (7)
수많은 소거법 끝에 남은 이름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유주, 백리세가, 금 파의 수장 백리은혁.
유주, 백리세가, 종가 흑산조가.
복주, 태산황가 전체.
심주, 청죽림.
천하 전체, 육주염상련.
“그러나 이것은 결국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다 장난이었단 말인가?”
도산호가 오해했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이들뿐이었다면 여러분께서 이리 숨으실 리 없습니다. 외부인이라면 어떻게든 눈에 띄었을 테니까요.”
“……!”
“결국 내부인.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다수의 내부인이 포섭되었다는 뜻. 그런데 어떻게?”
유운이 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 같이 자랐고, 대부분 서로 혈족인데다, 이해관계도 일치하는데 배신을? 그것도 다수가?”
유운이 미간을 두들겼다.
“이게 가능한 경우는, 역사상 딱 두 가지뿐입니다.”
“그, 그게 무엇인가?”
어느새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 황일동이 물었다.
“종교 그리고 정치.”
“……!”
“형태는 다른데, 사실 속성은 같습니다. 내가 옳다.”
“그, 그 말은….”
“나의 사형제들과 부모·자식을 바른길로 이끌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러니 배신 따위의 저열한 행동이 아니다. 고귀한 행동이다.”
“아….”
쿵.
묵묵히 듣고만 있던 도산호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익도, 혈연도, 우정도 버릴 수 있는 동기. 그것은 이 두 개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들었다.
“그런데 정치는 가능성이 작습니다. 전조는 천년이나 전이니, 지지자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고. 기득권인 맹이 스스로를 부술 리도 없고. 결국 남은 것은…”
꿀꺽.
“종교. 그중에서도 현 체재에 대한 반감이 매우 큰 적안미륵교겠지요.”
“허억!”
정답이었던 것일까. 황철균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정말 그들이란 말인가?”
“짐작은 했지만….”
두 사내 역시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삼십 년 넘은 친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게 가족 관계인 경우는 극히 드물지요.”
“그래, 그렇겠지.”
두 사내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죽 믿을 사람이 없으면 자기 집 내에서 이렇게 숨어서 행동하겠는가?
“언제부터였습니까?”
“처음 이상을 느낀 것은 이십 년 전부터였네.”
“……!”
유운의 물음에 황일동이 대답했다.
“그때만 해도 성격 특이한 녀석들끼리 뭉쳐 다닌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런데 아니었네. 어느 순간 그들이 점점 커지더니….”
“……?”
“지금은 거의 삼분지 일에 육박하네.”
“……!”
정확한 숫자는 소문주인 황철균 역시 몰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반절이 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거지.”
황일도가 눈을 감았다.
자신이 구하려는 혈육, 제자, 부하.
그들 자신이 구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황일도를 구원하려고 한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상 지금이 마지막 기회로군요.”
“그렇네. 어떻게든 사교의 뿌리를 뽑아내야만 하네. 이건 땅을 지키는 것이나 무공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일세.”
“지켜야 할 아이들 자체가 바뀐다면…,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황일도의 말에 도산호 역시 동의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전조도 그렇고 결국 천하가 뒤집힐 때는 다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동의는 대부분 사특한 믿음에 기반하였지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자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네.”
“오만한 녀석들, 기도 확 죽이고 말이야.”
…
..
.
깊은 밤.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한 회의가 이어졌다.
* * *
두 문파가 하나가 될 것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게 그들을 진짜로 하나로 만들지는 못했다.
“젠체하는 샌님들과 한 식구가 된다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그러게 말일세. 아무리 방주님의 뜻이라지만, 나는 도저히 내키지 않네.”
흑호방의 사내들은 본래 홀로 긴 여행을 하는 마수 사냥꾼의 후예.
고집스럽고 완고한 이들이 유독 많았다.
그런 이들을 승복시킬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상대가 과연 너희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는지, 몸으로 깨달아 보아라!”
도산호가 방도들 모두에게 선언했다.
지위고하, 소속, 나이를 가리지 않는 무제한의 격투!
거기에 막대한 상금과 명예까지!
도산호의 발표에는 사내들의 가슴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가득했다.
“허나 형제간에 칼부림할 수는 없는 법. 내공 또한 형제를 크게 상하게 할 수 있으니. 싸우는 방법은 오직 ‘추랍’으로 제한한다!”
어린아이들이 종종 즐기는 밀고 당기기.
땅에 발을 붙이고, 밀고 당기는 힘만으로 상대를 넘어뜨리면 이기는 단순한 경기.
추랍(推拉).
어른들이 즐기는 밀고 당기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규칙은 단순했다.
두 사람은 각자 발 반보 정도 거리에 반원을 그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원 안에서 들어가서, 상대방을 쓰러뜨리거나 원 밖으로 밀어내면 끝인 경기였다.
무기도 내공도 심지어 신법조차 없다.
피할 곳도 없고 후퇴나 방어도 안 된다.
그랬기에 어떤 무인은 이렇게 평했다.
알몸으로 싸우는 것보다 노골적이다.
그 작은 원 안에서 사람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
체력이나 기술 같은 외부 요소는 물론, 참을성, 속임수, 직관과 같은 내부 요소까지 전부.
그래서 흑호방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경기였다.
“대진표조차 없이 싸운단 말입니까?”
유운이 옆자리의 흑호방도에게 물었다.
“크하하, 대진표는 무슨. 황야에서 언제 정해진 적만 나오는 법 있었나? 적은 항상 세상 전체고, 이를 이길 방법은 내 주먹뿐이지.”
순수한 무투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더 어려운 임무를 주셨군요.”
유운은 사람들의 경기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와아아!”
“흑호가 이겼다!”
“으하하, 호랑이 말고 학이나 해라, 이 비리비리한 백호 놈아!”
어제까지만 해도 술과 음악이 가득했던 연회장이, 모래판으로 바뀌어버렸다.
얼굴을 보고 데면데면하게 외면했던 사내들이, 작은 원 위에서 죽어라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싸워서 나중에 화합이 되겠습니까?”
“배웠다는 사람이 어찌 모르나? 안에 있는 걸 다 쏟아내야 새로 쌓을 게 아닌가!”
“……!”
늙은 마수 사냥꾼의 말이 유운을 일깨웠다.
‘도 방주께서도 이걸 아셨구나.’
때로는 주먹으로, 때로는 발로, 때로는 머리로.
퍽!
우득!
웃통을 벗어젖힌 사내들이 서로 미친 듯이 싸운다.
- 단지 사교도를 잡기 위한 행사만은 아니오. 흑호방, 혹은 백호문만을 대상으로 한 경기도 아니오.
도 방주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우리 아이들이 시원하게 부딪히고 마음껏 깨졌으면 좋겠소. 그래야 내 안의 아집을 버리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오.
그랬기에 이 행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흑호와 백호만이 아니었다.
‘이거다! 바로 이거야!’
‘비록 형식은 다르지만, 결국 강자를 뽑는 거잖아?’
‘이게 천하제일비무대회가 아니면 뭐겠어?’
명성을 떨치고 싶어 안달 난 젊은이들.
몸값을 올릴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낭인, 용병.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중진.
그리고 오만한 젊은이들을 기쁜 마음으로 짓밟아줄 늙은 고수들까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조그마한 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제, 제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걸요?”
하룻밤 만에 달라진 세상.
어지간한 묘가영이 놀랄 정도였다.
휘리릭!
금나수법으로 주먹을 흘린 후, 상대의 무릎을 무너뜨린 백호문의 검술가.
“이놈들아, 칠순 노인도 못 넘어뜨려서 어떡하누? 물건 떼버려라, 약해빠진 것들아.”
골골한 목소리를 내뱉는 자는, 거암 못지않은 덩치를 가진 흑호방의 장로.
“유주 사내들은 모두 이렇게 허약해 빠졌어? 얼굴만 희멀거니 쓸모가 없구만, 쓸모가.”
사내들을 도발하는 야만족 여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야, 인간적으로 밥은 좀 먹고 하자.”
한 자리에서 여러분 이기면, 이렇게 부담 없이 나와도 상관없었다.
지지만 않는다면, 아니 진 사람도 얼마든지 계속 도전이 가능한 경기였다.
제한은 오직 ‘체력’과 ‘승복’뿐.
힘이 달려서 더 못하겠다거나, 이 사람은 내가 죽어도 못 이기겠다! 는 경우만 아니면 무한히 싸울 수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생일잔치예요. 히이잉. 완전 속았어. 흑.”
소화가 잠깐 우울해하긴 했지만.
“히히히, 먹을 것도 무제한이라고요?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죠!”
“나도 같이 가자, 나도! 으하하하!”
소화와 거암은 허리띠를 마음껏 풀었다.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노야.”
“그러게 말입니다. 백리세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수련하다 옷이 땀에 젖으면, 반드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수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아무 옷이나, 심지어 속곳 하나만 입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도 제각각.
서로 합의만 이루어지고, 원만 그릴 수 있으면 아무 데든 상관없었다.
“경기가 대체 몇 개야?”
“사십, 오십, 백…와. 거의 이 백 개는 되겠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조차 진이 빠질 정도로, 많은 경기가 열렸다.
이런 상황에서 유운의 임무는,
‘이 모든 사람에게 승복을 받아내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야트막한 언덕 위.
유운은 경기를 보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단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승복’이다.
과연 물리적으로 가능한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래, 일단 해보자. 끝까지 가보고 힘들다고 이야기해야지.’
유운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눈을 감았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무공, 아니 수련법이 있었다.
[ 명안명심법 ]
단전이 세 개 발아하고, 사실상의 강기지경에 오른 후로는 처음이었다.
더 좋아졌다는 느낌은 확실히 들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어느 정도일까?
아직은 그조차 몰랐다.
우우웅…!
기해혈. 용천혈. 명문혈.
각기 세 군데의 단전에서 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놓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휩쓸려갈 정도의 막대한 양!
유운은 그 세 줄기의 기운을 눈으로, 머리로 이끌었다.
‘뜨거워. 너무 뜨거워!’
눈은 마치 불이 나서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피부와 뼈가 다 타버려서 뇌가 드러난 것만 같았다.
‘뜨거운데…. 시원해!’
당연히 막혀있어야 하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모조리 사라졌다.
부글부글.
몸이, 눈이, 뇌가 다 같이 끓어올랐다.
금방이라도 폭발시키지 않으면, 내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이틀 전 입구를 가득 메웠던 인파를 떠올리면서 눈을 떴다.
그리고….
‘……!’
이백여 개의 모든 싸움판이 동시에 머릿속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