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각자의 꿈 (9)
선비는 사흘이면 눈을 비비고 달라질 정도로 달라진다 했다.
조학선검 황철균이 그랬다.
이전의 그는 쓸만한 무공을 지닌, 그럭저럭 괜찮은 소문주였다.
좋게 말하면 그랬고, 나쁘게 말하면 존재감이 희미한, 범재(凡才)였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그는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 같구나.’
유운은 그의 내면을 보며 감탄했다.
영안으로 살핀 그의 영혼은, 작은 나비와 같았다.
고치에서 막 벗어난, 아직은 연약한 나비.
그러나 이미 허물을 벗고 날개를 달았으니.
땅바닥을 기던 유충 시절에는 꿈도 못 꾸던 경지에 오를 터였다.
“못 본 사이 성취가 있으셨나 봅니다. 감축드립니다.”
유운이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 말에 황철균이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모두 은공 덕분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유운 공자를 본래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얕보았지요.”
“……!”
조그마한 학식과 명예를 믿고,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오만한 명가의 후예.
유운과 만나기 전의 심상은 그러했다.
그러나 문주와 함께 그를 만난 후는 달라졌다.
“한때는 질투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리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으니까요. 저는 한번도 그런 칭찬을 받아보지 못했으니까요.”
“……!”
“또한 좌절하기도 하였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 모습이, 저였으면 했습니다. 모든 문도가 우러러볼 수 있는 영웅이 저였으면 했습니다.”
유운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나이 먹도록 이루지 못한 경지를, 그 어린 나이에 능가하였으니. 인생은 왜 이리 불공평한가.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해왔나. 나란 놈은 대체….”
“…….”
“그러다 문득 책을 읽다가 깨달았습니다. 선비는 하루하루 달라진다는데. 나는 내내 남 탓만 하고 있었구나. 내가 남을 탓하고 있을 때, 공자는 또 나아가고 있겠구나.”
황철균은 담담하게 고백했다.
“내가 가진 것 또한 남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것이거늘…. 그러더니, 어느 순간 마음의 평화가 오더군요.”
“그 말이 틀렸었군요.”
“……?”
“본래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타고난 그릇대로 살 뿐이다.”
“……!”
“소문주님을 보니, 그런 말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대개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은 바뀔 수 있다.
본인이 원한다면, 나아갈 수 있다.
“선인께서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一切唯心造)고 하셨으니. 결국 이 또한 마음에 달렸다는 뜻이겠지요.”
“제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유운과 황철균은 서로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 없는 대화를 나눈 후.
“한창 바쁘실 터인데, 어인 일이십니까?”
흑호방주는 아들이 요절하여, 손녀뿐이었다.
따라서 통합 문파의 수장은 사실상 황철균이 되리라는 관측이 대부분이었다.
“두 분께서 조용히 뵙고자 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앞장서시지요.”
사람의 눈을 피하는 모습이 자못 은밀하나, 유운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잔치를 앞둔 주인이 손님을 해할 리 없지.’
무엇보다 이곳 주인의 성품을 믿었다.
유운은 황철균을 따라서 정원 깊은 곳으로 갔다.
“이런 곳이 있었군요.”
정자의 위치가 절묘했다.
야트막한 언덕 두어 개와 관목으로 인해 주변에서 볼 수 없는 위치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안에서 약간의 기름과 야채, 그리고 술 냄새가 났다.
유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자에 올랐다.
“허허허, 오셨소, 해원검?”
“불러놓고 얼굴도 안 비춰서 미안하군.”
청수한 백의 검객.
거북이 피부를 가진 노무인.
바로 백호문주 황일동과 흑호방주 도산호였다.
“두 분 어르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던 유운이 눈을 빛냈다.
‘소문과 다르구나!’
두 문파의 싸움이 흉험하니, 감탄하는 자도 많았으나 반대로 비웃는 자도 많았다.
“백호문주와 흑호방주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싸움이지.”
“천하백가에서 강기지경의 고수 하나만 출동해도 모조리 쓸려나갈 것을.”
유운 또한 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산을 오르니 알 수 있었다.
‘일부러 힘을 숨기고 계셨구나!’
반경 일장.
두 사람의 몸 중심에서 무언가가 뻗어 나오니.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사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상대가 적의를 보이는 순간, 그 무언가는 강철 칼날이 되어 목을 베리니.
강기지경!
이 두 사람이야말로 힘을 숨기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영역을 장악한다라. 이것이 강기지경의 싸움이구나!’
강기 경지에 아슬아슬 근접한 황철균은 비할 바도 되지 못했고, 막 올라서서 힘을 주체하지 못했던 적인걸과도 비교할 수 없다.
꽉 찬, 익을 대로 익은 강기지경의 고수였다.
감탄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허어. 그 사이에 경지가 올랐구나…, 허? 아무리 천하의 기재라도 이 정도라니…!”
“이건 정말….”
두 문주에서 보이지 않은 기파가 발산되었다.
마치 박쥐가 소리로서 위치를 파악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탐색 혹은 위협.
본래 두려워해야 마땅하지만.
‘강기를 이런 식으로 쓸 수도 있구나!’
유운이 기쁜 미소를 지었다.
이 또한 새로운 배움이고 지식이었으니까.
“기의 성질이 무언가 다르군. 강기인 듯하면서도 아닌 것 같고.”
“아니라기에는 공자가 품은 힘이 설명이 안 되오.”
“무엇이 되었든 확실하군. 우리에게서 멀지 않아. 아니 어쩌면….”
“허어…! 지난번 성취만 해도 놀라웠거늘. 이토록 어린 나이에? 허허허.”
도산호의 말에 황일동이 감탄하여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두 분에 비할 정도란 말입니까?”
황철균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대체 나이 차이가, 무공을 수련한 세월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네 사람이 술상에 앉았다.
은밀한 자리라는 말이 정말인지, 시비 하나 없었다.
황철균은 자청하여 술 시중을 들었다.
“늦은 밤, 이리 찾으신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유운의 말에 황일동이 유운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었다.
쪼르륵.
유운은 가볍게 입만 축이고 귀를 기울였다.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오. 무림인이라면 응당 꾸는 꿈.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포기하게 되는 꿈.”
황일동이 손을 뻗어 밤하늘의 별을 잡으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공자 덕분에 도 방주와 화해하게 되었고, 그 또한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음을 알게 되었소.”
“그 꿈이 무엇입니까?”
“사내의 꿈이지.”
도산호가 짧게 한마디 하자, 황일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는 자식에게 더 좋은 음식을 먹이고, 더 좋은 옷을 입히고 싶어 하지. 우리 또한 마찬가지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무인이, 무림 문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꿈을 꾸었던 자들이 우리뿐만은 아니었을 터. 하지만 언제나 결말은 같았소.”
“……!”
“그래서 본래 하려던 이야기는 매우 길었소. 공자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고.”
황일동의 말에 도산호가 한마디 보탰다.
“구구하고 구차한 이야기였지.”
“……!”
못마땅하다는 태도, 그럼에도 수긍하는 태도에서 그들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무공이 아니라 정치에 관한 이야기였겠구나.’
이익과 제안, 양보와 협상.
복잡한 술수, 그리고 계책.
그 중심에는, 친분이 있는 유운의 혈통을 이용하겠다는 심산이 섞여 있었으리라.
그러니 저리 미안한 기색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소.”
황일동이 수염에서 손을 떼고 눈을 빛냈다.
“공자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소. 무인이라면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아니 되었소.”
황일동의 목소리가 조금씩 뜨거워졌다.
달라진 분위기에, 사내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벌컥벌컥.
쿵.
도산호가 술을 병째로 들이키더니, 거칠게 내려놓았다.
“내주고, 받고, 계산하고. 그딴 거,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딴 건 무인이 아니다.”
우지끈.
와르르…!
그가 몸을 일으킨 여파만으로 주안상의 다리가 부러졌다.
“붙어보자. 한번 제대로, 찐하게.”
“……!”
칠순이 넘어가는 노(老)무인이, 거대한 방파의 주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거친 언행이었다.
파아아앙!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기가 밀려 나왔다.
부서진 주안상이 정자 기둥에 처박히고, 황철균조차 기파에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세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주님….”
유운이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황일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동이 걸리신 도 방주는 누구도 말리지 못하오. 그리고 사실….”
황일동이 검을 집어 들었다.
“그 마음은 나 역시 같소.”
“……!”
“다만….”
황일동이 도산호의 앞에 섰다.
“이 자리는 도 선배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듯하오.”
“무슨 말이냐. 아무리 자네라도….”
“잊으셨소? 우리 둘이 붙었을 때 어땠는지.”
“아, 아버님?”
그의 말에 황철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자식도 모르게 둘이 싸웠다는 소리였다.
“운이 좋아서 살았지, 우리 중 하나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소. 특히 도 선배의 무공 특성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소.”
도산호의 주먹에는 이미 강기가 어려있었다.
‘권강(拳罡)!’
사람의 육신에 강기를 씌우는 것은, 검이나 도보다 훨씬 더 어려우니.
그가 얼마나 수준 높은 고수인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선배의 무공은 일격필살이니. 생사결전을 할 것이 아니면 참아주시오.”
“…젠장.”
도산호가 짜증을 부리더니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아쉬운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지난 비무에서 네가 본 것이 강기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도산호의 주먹 위에 투명한 옥(玉)이 덧씌워지더니,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적인걸에게서 보았던, 붉은색이 아니었다.
‘주황빛이라니!’
해 질 녘의 노을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무공이 낮은 자라면, 불타는 용암 같던 적인걸만 못하다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아는 자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도 방주가 이층위에 도달하였구나!’
한계를 넘어선 불은, 오히려 붉음을 잃고 주황빛을 띤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는 강기지경의 두 번째 단계임이 분명했다.
“역시 도 방주의 성정에 걸맞은 무공이오.”
황일동 역시 알고 있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인걸이라는 놈은 힘이 부족해서 진 것이지. 경지에 오른 강기에는 초식도 기교도 필요 없다. 무엇이든 부숴버릴 수 있으니까!”
도산호가 그리 말할 만했다.
유운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 강기 앞에서는 백대보검도 의미가 없겠구나.’
주황빛 옥에 닿는 순간, 무엇이든 부숴지리라.
수련이나 기교, 초식이 무의미해지는, 절대적인 출력(出力)이었다.
“본인은 생각이 다르오.”
그때 황일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은, 기의 파괴력은 물론 중요하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세상에 온갖 무공은 다 필요 없겠지. 오직 내공심법 하나만 있으면 충분할 테니.’
“……!”
도산호도 의외로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있지.”
저 강대한 힘을 상대로, 박빙을 이루어냈다는 뜻이었다.
“강기를 날카로운 칼로써 휘두르는 것도 좋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 생각하오. 그랬기에 나의 ‘강’으로 선배와 겨룰 수 있었겠지. 그렇기에….”
황일동이 검을 들어 유운을 가리켰다.
“나 또한 공자가 이룬 ‘강’을 보고 싶소.”
“……!”
뜨거운 목소리!
그 순간 황일동의 기세가 변했다.
파르르.
잠들었던 새가 몸을 떨고, 날개를 퍼덕거렸다.
깃털 하나하나가 강기였다.
‘이것은…!’
유운은 황일동이 품은 심상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한 마리의 학.
평생 마음속에 금기서화를 동경했으나, 그럼에도 무림을 떠날 수 없었던 자의 한이 서린 무공.
학이 허공에서 날갯짓하며 유운을 바라보았다.
‘강과 강의 싸움이라니…!’
그것은 경계선이었다.
그저 순순히 학사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목숨을 담보로 무인으로 거듭날 것이냐?
“…하아.”
유운은 길게 탄식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비무라 한들,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위험만 가득한, 무모한 싸움.
이성이 있는 자라면 피할 싸움.
그랬기에,
스릉.
유운은 웃으며 검을 뽑았다.
쿵쿵.
가슴이 뛰었다.
그곳에 학사는 없었다. 오직 무인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