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각자의 꿈 (10)
“아주 오래전의 일이네. 기록조차 소실되어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 오는 일이지. 당대의 천재라 자부하던 한 청년이 있었네.”
황일동이 검을 들고 한 걸음 다가왔다.
스스스….
그의 발아래.
희뿌연 무언가가 형상을 이룬다.
“문파 내의 어떤 무공이든 수월하게 익히고, 또래는 물론 스승뻘도 이겨내니, 그의 자부심은 하늘 모르고 치솟았다네.”
꿈틀꿈틀.
마치 실타래가 풀어지듯, 형상이 부풀어 오른다.
형상이 계속 부풀어 오르니, 그 크기는 어느덧 황일동의 허리춤을 넘어섰다.
“그의 재능이 거짓은 아니었던지, 촌에서도, 향에서도, 심지어 현에서도 그는 승승장구했네. 천하는 우리의 생각보다 좁고, 그의 재능은 하늘보다 높다. 본문 모두가 그렇게 확신했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들을 만났지.”
쿠우웅.
형상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니, 그 크기는 황일동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는 확신했네.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본문의 시조께서 꿈속 하얀 호랑이에게서 영감을 받아 창안한 본문의 무공은 무적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백가의 일원과 겨루었지. 그 결과는….”
“…….”
“일 수.”
“……!”
“청년의 모든 삶이 부서지는 데는, 단 한 번의 겨룸이면 충분했네.”
크르르릉…!
뱃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
황일동의 뒤편, 하얀 호랑이가 분노하고 있었다.
울음과 분노.
그것은 기감이 열린 강기지경의 고수조차 느낄 수 없는, 영안이 열린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심상(心象).
“그리고 그 천재는 맹세했네. 그들을 뛰어넘기 전까지는, 결코 산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
“그는, 죽기 직전에야 내려와 본문을 찾았네. 그리고 하나의 비급을 남기고 죽었지. 한바탕 호탕한 웃음을 남기고서, 꼿꼿하게 선 자세로.”
와호선검(臥虎仙劍).
땅의 호랑이가 하늘의 신선에 닿기를 갈망하며 만든 지고한 검술이었다.
“이후 본문의 역대 장문인들이 모두 이를 다듬고 또 다듬었으니. 그래. 나 역시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천하백가의 후계에게. 진정한 무인에게 이 무공을 선보일 날을 말이야.”
성큼, 목이 마른 하얀 호랑이가, 학을 닮은 고고한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기를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운용하는 것이 가능했구나!’
유운은 기감으로 호랑이를 살핀 후, 감탄했다.
백호는 터무니없이 커다랬다.
닿는 순간, 상대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맹수였다.
하지만 경지가 높은 무인이 본다면, 오히려 혀를 찼을 것이다.
- 저토록 커다란 기운 덩어리라니? 한 걸음 움직이는데 온 심력을 다 쏟아야겠구나. 위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실전에서는 결코 쓸 수 없는 무공이다.
위력에 치중한 나머지, 속도와 기예를 잃은 무공.
본래는 빛 좋은 개살구로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유운은 이 무공의 핵심을 알아보았다.
스르륵.
산중 제왕, 백호가 소리 없이 유운에게 다가온다.
그 움직임은 마치 땅에 발붙인 동물이 아니라, 구름 위를 노니는 학과 같았으니.
놀랍도록 가볍고, 은밀했다.
‘대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주어야 하는 법.
그런데 어떻게 무거우면서 가벼울 수 있단 말인가?
유운은 기감을 뻗어서 백호를 살폈다.
‘…실이로구나!’
백호는 결코 무거운 기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종이보다도 얇은, 가느다란 실!
그것도 검기로 만들어낸 실, 무수히 많은 실이 바로 백호였다.
‘실로 백호를 자아냈구나!’
유운은 스승께 얼핏 들었던 최고급 기예를 떠올렸다.
검사(劍絲).
뿌옇게 보이는 검기조차 막기 어려운데, 그 검기가 실처럼 가느다랗다면, 예측하기 어렵게 흩날린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은밀하고, 위력적인 검공이다.
그런데 백호문은 거기서 더 나아가, 검사로 아예 백호를 그려냈다.
‘효율의 극치로구나!’
유운은 그 뒤에 숨은 원리를 보고 진정으로 감탄했다.
검사를 갈고 닦아 가벼운 실로 거대한 호랑이를 그려냈다.
거기에 강기지경이다.
실에 닿는 순간, 검기는 더 이상 검기가 아닌 강기로 바뀔 터.
검에 기를 불어넣는다는 생각을 뛰어넘은,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본인 말고도 또 하나의 강기지경의 고수가, 그것도 덩치 큰 맹수가 함께하는 격이니…. 허엇!’
더이상 감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황일동이 검을 앞으로 내민 순간.
크허허헝!
백호가 포효하더니 유운을 덮쳐왔다.
형상은 호랑이지만, 실체는 검기 덩어리!
실제 호랑이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놀라운 속도였다.
전면이 거대한 백색으로 뒤덮이는 순간.
스팟!
유운의 발끝이 미묘하게 움직이더니, 유운의 신형이 사라졌다.
구궁신보!
아홉 걸음 안에서는 무적이라 일컬어지는 종남의 절학이었다.
목표를 놓친 백호는 정자의 기둥에 부딪혔다.
서걱.
우르르릉…!
닿는 순간, 검기가 검강으로 화(化)하니.
두꺼운 목재 따위는 종이처럼 바스러졌다.
정자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기울었다.
“허어. 이 거리에서 저걸 피해? 나조차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도산호가 놀라움과 만족이 뒤섞인 표정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황일동의 공격은 끝이 아니었다.
스스스…!
황일동, 본인이 서 있는 자리.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공간을 채운다.
마치 고슴도치가 몸을 부풀리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고수의 ‘영역’이로구나!’
일찍이 책에서, 영상에서 본 적은 있다.
- 강이란 무엇인가? 단지 검기의 끝인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새로운 것은, 오직 오래된 것을 모두 익혔을 때만 가능한 법.
‘……!’
- 강기지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증명! 검기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표식이다.
다시 말하면, 검기로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스스스…!
황일동의 기세가 반경 일장을 채운다.
유운은 그 주변에 서 있을 뿐인데도, 숨을 쉬기 힘들었다.
‘공간 자체가…. 무거워!’
마치 거미줄을 드리운 나비와 같았다.
공간 자체가 이렇게 외치는 듯했다.
이 안에 들어오는 순간, 너는 죽는다!
의지가 이는 순간, 검이 닿는 간격.
그렇기에 그곳은 황일동만의 공간이었다.
영역장악.
강지기경의 고수가 인지하는 영역.
강기지경의 고수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적 대협조차 이르지 못한 경지로구나.’
홀로 강기지경에 도달할 정도이니, 적인걸이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무인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는 홀로 외로이 무공을 익혔다.
실전에서 임기응변으로 성장했다.
그랬기에 그의 무공에는, 명문이 가진 깊이가 없었다.
‘검사’도 ‘영역’도.
오랜 시간, 아주 오랜 시간 검기의 모든 것을 구석구석 탐구한 명문(名門)만이 도달하는 검술 기예이니.
홀로 재능이 뛰어난 자는 결코 얻기 힘든 경지였다.
‘적 대협과 황 문주는 하늘과 땅 차이로구나!’
방법을 알았더라면, 적인걸 또한 할 수 있었으리라.
강에 올랐다 함은, 아이가 어른이 된 것과 같으니.
하지만 그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리 없다.
그렇기에 홀로 성장한 자는, 절대로 명문을 뛰어넘을 수 없다.
크르릉…!
스르륵.
뒤에서는 검사로 만든 백호가 위협하고.
앞에서는 벽을 넘어선 절세 검사가 압박해왔다.
“이것이 본 문이, 본인이 찾아낸 답일세!”
파바바밧!
황일동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마침내 황일동의 영역 안!
그가 검을 드니 한 마리 학이 날갯짓하며 유운을 덮쳐왔다.
크허어엉!
동시에 백호가 뒤에서 덮쳐왔다.
비할 곳이라고는 없는 상황.
“조심하게! 쏘아진 화살은 돌이킬 수 없다네!”
도산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무리 비무라도, 살기가 없더라도 강기다.
실수 한 번이면 팔다리가 날아갈 터.
그럼에도 유운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이것이 무인의 싸움이로구나!’
검사만 해도 놀라운 기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검사를 극도로 발전시켜 만들어낸, 백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예.
혁명적인 발상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기예.
그랬기에 기뻤다.
‘이토록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니!’
천재는 천재를 기쁘게 한다.
천재가 이뤄낸 성취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예술품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솨아아…!
유운의 몸에서 기의 실이 뻗어 나갔다.
희뿌연 기의 그물이 커지더니, 사방으로 퍼졌다.
이내 공간을 가득 채우니.
펑!
콰아아앙!
황일동의 영역도.
백호의 돌격도.
기의 그물이 만들어낸 방벽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무, 무슨!”
“……!”
도산호도 황일동도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벽’이라는 형태 때문이 아니었다.
그 무공의 뒤에 있는 근본은, 바로 검사!
그것도 한 단계 더 나아간, 형체를 빚어내는 검사.
바로 백호문 비전 절기의 핵심이었다.
“어, 어떻게?”
“마, 말도 안 되는….”
무려 이백 년.
백호문 역대 최고의 천재가 만들어내고, 수많은 기재가 고심하여 다듬은, 절기 중 절기다.
“입문에만 내 반평생을 썼거늘…!”
그런데 십 년도, 일 년도, 한 달도, 하루도 아닌.
한 식경.
아니 그조차 되지 않는, 찰나에.
“분명 모습은 다르지만…. 핵심은 같네, 황 문주!”
도산호가 있을 수 없는 것을 본 양, 입을 떡 벌렸다.
형식도 아닌 핵심, 그 ‘정수’를 깨닫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바로 실전에서 쓴다니?
무림의 역사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운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배우고, 익히고, 즐긴다.
그것이야말로 유운이 ‘평생 해오던 일’.
매일, 매 순간.
거기에 두루마리를 통해 놀라운 지식을 접했으니.
그에게는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좋다, 좋아!”
하지만 정수를 빼앗겼음에도, 황일동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 또한 무인.
천재를 보면 질투하기보다, 감탄하며 쫓고자 하는, 순수한 무인이었다.
“이것도 한번 받아보게!”
파바밧!
황일동의 강기가 쏟아진다.
학이 깃털을 털어내듯, 촘촘한 공격!
전력을 쏟아낸 듯, 막대한 공간을 점했다.
스르륵.
퍼어엉!
유운은 물 흐르듯 피해내고, 때로는 퉁겨냈다.
콰아아앙!
정자가 단번에 부서져 나갔다.
“어, 어떻게?”
“좋구나, 껄껄껄!”
사람들의 시선?
이제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자는 오직 무인뿐이었으니까.
콰과광…!
파밧!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진다.
“이, 이게? 맙소사!”
황철균조차 공방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황일동이 쏟아내는 무공은 끝이 없었다.
유운의 집중력 또한 점점 더 올라갔다.
[ 명안명심법 ]
세상이 느려진다.
황일동의 손끝부터 심장의 고동까지. 모든 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이것이로구나!’
백호문이 이백 년에 걸쳐 이룩한 모든 경험, 지식, 깨달음.
모든 것이 유운의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자에게 펼쳐진 만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