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114화 (114/114)

제114화

각자의 꿈 (11)

사사사…!

쿠우웅!

앞에서는 황일동이 유려한 검초를 쏟아내고, 뒤에서는 검기로 빚어낸 백호가 덮쳐온다.

강기지경의 고수, 그것도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 두 명이 함께 공격해오는 격이니.

신묘막측(神妙莫測).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기묘한 공격이었다.

오죽하면 경지가 더 높은 도산호조차 막아내기 급급했을까.

그런데 유운은 달랐다.

스스슥.

아홉 개의 환영이 일더니, 쏟아지는 검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저 보법은 대체…!”

종남의 구궁신보를 처음 본 도산호에게서 감탄의 빛이 스쳤다.

쏟아지는 폭우를, 허깨비처럼 피해내는 광경은 그조차 처음 보았다.

“실로 아름다운 공방이로구나!”

두 사람의 비무를 관전하던 도산호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때까지의 감상은 딱 그러했다.

잘 익은 명주(名酒)와 같은 황일동.

빛나는 재능을 가진 기재, 유운.

합을 맞춘 듯한 광경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러나 다음 장면부터는 달랐다.

솨아아…!

유운의 발밑에서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초식과 초식이 오가고, 기와 기가 맞부딪히는 사이.

스팟!

퍼어엉!

안개가 몸을 일으키더니 형체를 갖추는 것이 아닌가?

“서, 설마 저건?”

“마, 말도 안 되는…!”

지켜보던 도산호와 황철균이 눈을 부릅떴다.

비록 크기는 조금 더 작고, 움직임은 느리지만.

그것은 검기로 움직이는, 또 하나의 호랑이였다.

“……!”

인정할 수 없다, 어디 감히 흉내를 내는 것이냐?

그렇게 외치듯, 황일동의 공세가 더욱 거세졌다.

파바밧!

딱 달라붙어서 보법으로 피할 수 없는 거리.

열두 마리의 학이 동시에 홰를 치듯, 열두 가닥의 검기가 쏟아졌다.

학우개시(鶴羽開翅).

경로를 읽기는커녕, 눈으로 따라갈 수조차 없는 절초였다.

그 순간 유운은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었다.

채애앵!

유운은 마치 검로가 보인다는 듯, 검이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전에 먼저 쳐냈다.

문제는 그의 뒤편이었다.

콰아아앙!

집채만 한 백호가 유운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위, 위험!”

절체절명의 위기, 황철균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칠 때였다.

콰아아아아앙!

누군가 백호의 옆구리를 들이받으니, 커다란 백호가 튕겨 나갔다.

“……!”

“……!”

비록 크기는 작지만, 위엄찬 모습은 백호에 못지 않으니.

아호(兒虎)!

유운의 등 뒤를 지키며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은 결코 허상이 아니었다.

“아아아…!”

황철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오직 신음뿐이었다.

평생 노력했어도 입문조차 하지 못한 무공이다.

질투 따위는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경이롭구나!’

놀랍고 기이한 재능에 감동할 뿐이었다.

“이, 이걸 만들어냈다고? 격렬한 공방이 오가는 와중에?”

황일동을 평생의 호적수로 여겼던 도산호가 받은 충격은 이에 비할 바 아니었다.

와호선검은 말 그대로 백호문의 최후절기.

그런데 비무에서 이를 보여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따라 할 테면 따라 해 보아라!

화공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들, 범인이 이를 따라 할 수 있을 리 없다.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채도, 명도, 원근과 같은 이론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과 기교까지.

살아있는 듯한 그림에는, 그토록 많은 비밀이 숨어있다.

그렇기에 보는 것은 시작조차 아니다.

그랬기에 황일동은 자신했다.

누구도 감히 따라 하지 못하리라!

한번 보여준다고 배울 수 있었다면, 흑호방주는 백호문주를 진즉 이겼을 것이다.

물론 흑호방주 또한 놀라운 고수.

작정하고 폐관 수련하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밑바탕이 되는 이론을 만들어내고, 수많은 기법을 만들어내야 하니.

‘족히 십 년, 아니 이십 년은 걸리겠지.’

그것도 운이 따를 때의 이야기.

그랬기에,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알았기에.

도산호의 감정은 황철균과는 달랐다.

‘실로 두려운 재능이로구나. 사람이 어찌…!’

권강을 두른 주먹이면 산조차 부술 수 있다 하여 파산신권이었고.

거칠고 사나운 흑호방의 사내들을 이끄는 맹수이기에 흑호방주였다.

그런 도산호였기에, 유운이 가진 재능의 무서움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스르륵.

쿵.

황일동이 검을 멈추니, 비무는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

황일동은 그저 물끄러미 유운을 바라보았다.

‘그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백호문의 천재가 만들고, 수많은 기재가 다듬은, 지고한 무공이다.

검기의 실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예조차 시작에 불과하다.

형상을 빚어내고, 그곳에 의념(意念)을 부여하고, 생각을 두 개로 나누고….

지독하게 복잡하고, 정교한 무공이니, 후손 중 익힌 자는 자신뿐이었다.

그나마도 수십 년의 고된 수련이 필요했다.

‘대체 어떻게?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눈앞의 ‘존재’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천재? 괴물? …하늘을 거스르는 존재?

그런 놀라운 재능이 백호문의 정수조차 먹어 치웠으니.

‘유운 공자가 후일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를 이대로 두는 게 옳은 길인가?’

너무나 많은 감정이 동시에 일어나니, 마음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황일동은 백호문의 문주.

예와 의를 아는 자였다.

“무리한 요청이었거늘. 비무에 응하여 주어서 고맙소, 유운 공자. 진정 놀라운 비무였네. 직접 본 공자의 재능은 이전에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황일동이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입을 열 때였다.

“아아아…! 하늘이 내린 재능입니다!”

“……?”

유운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끊었다.

침착한 성정의 유운에게는 매우 드문 일.

황일동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공자,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본인의 재능이….”

“검기를 정제하여 검사로 만들고, 검사에 의념으로 그림을 그리고. 마침내 그림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니…, 아아아! 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유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뜻밖의 칭찬에 멈칫했지만, 황일동의 수련은 얕지 않았다.

“본 문의 무공을 높게 평가해주셔서 감사드리오. 그러나 유운 공자의 재능에는 감히 미치지 못하는….”

하지만 황일동이 유운을 칭찬할 틈 따위는 없었다.

“누가 감히 백호문의 선조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기적과 같은 무공입니다!”

유운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검으로 바닥에 선을 그렸다.

얼핏 보면 어린아이 낙서와 같은 무질서한 선들.

그러나 고수들의 눈에는 달랐다.

“…저, 저건!”

“…공방(攻防)이로구나!”

황일동이 사용한 백호문의 검술은 물론, 유운이 썼던 백리팔검과 육합검법, 비류연검이 낱낱이 분해되어있었다.

심지어 중간중간 내공의 흐름까지 묘사되어있으니.

바둑의 기보와 같은 정밀한 기록이었다.

“……!”

“……!”

그토록 복잡한 변화를 모두 기억했다는 점에 놀랄 틈도 없었다.

슥슥.

유운이 바닥의 그림을 모두 지워버렸다.

“아아…왜 지우십니까? 이는 천하의 보물로….”

황철균이 안타까워 외칠 때였다.

“모두 훌륭한 초식이고, 뛰어난 무공이지만. 백호문의 선조께서 남기신 무공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

단호한 유운의 말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검기의 실로 생명을 빚다니요? 길고 긴 무림의 역사 속에서도 본 적 없는 일입니다.”

유운의 목소리에는 경탄과 존경이 가득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로구나. 진심이야!’

천하의 기재가 저토록 뜨겁게 외치니.

황일동도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학에서 진정 어려운 것은 초식 공방이나 내공 수련이 아닙니다.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

“……!”

“그런 의미에서 문주께서 보여주신 무공은, 검술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격찬!

말 그대로 격렬한 칭찬의 폭포!

쏟아지는 칭찬에 황씨 일가의 가슴이 달아올랐다.

“험험, 그, 그 정도요?”

황일동이 은근슬쩍 유운에게 다가왔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제안하신 것은 특정한 초식이나 내공이 아닙니다. ‘발상’ 그 자체! 무수히 많은 깨달음을 이끌어낼, 놀라운 ‘심상’입니다.”

유운의 입에서 끝도 없이 칭찬이 쏟아져나왔다.

예의상 하는 말도, 가식 섞인 말도 아니었다.

아름다운 예술품을 보고, 감탄하는 순수한 젊음!

“커흠. 본문의 선조께서 조금 대단하시기는 하셨소. 역대 최고의 천재라 불리셨으니….”

“천재 중 천재임이 분명합니다.”

“허허허, 그 정도는 아닌….”

“맞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순도 십 할의 칭찬!

그것도 백리세가의 적통이며, 백리제일학사라 불리는 젊은이의 칭찬이었다.

황일동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허허허, 하긴 본문 무학의 심오함만은 어느 명가에 못지않긴 하오.”

“이를 말씀이십니까.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닿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와서야 세상에 천재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허허허, 허허허, 허허허.”

그저 웃을 뿐이지만, 황일동의 가슴 속은 뜨거웠다.

‘이것이 백호문의 무학이다! 천하백가의 천재가 인정하는 무학이란 말이다! 으하하!’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

문파의 정수를 빼앗겼다는 아쉬움도, 유운의 재능에 대한 두려움도 모두 씻겨져 나갔다.

백호문의 선조를 칭송하면서,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갔다.

“와호선검이라 부르기는 하지만 핵심 요결에는 달리 이름이 없었소. 공자께서 붙여주실 수 있겠소?”

흥이 오른 황일동이 유운에게 부탁했다.

“심득의 이름이라. 검의 실이 생명을 부여하니…. 검사조생(劍絲造生)이 어떻겠습니까?”

“검사조생이라! 참으로 멋진 이름이구려. 고맙소, 고맙소, 유운 공자!”

황일동이 감격에 차서 유운의 손을 잡았다.

“실로 아름다운 무공이었습니다.”

“이를 말이오, 껄껄껄!”

유운의 눈동자는 산속의 샘물처럼 맑고 깨끗했다.

오직 무를 향한 향상심, 그 하나뿐이었다.

‘이토록 밝게 빛나는 젊은이를 잠깐이나마 의심했다니! 아아아…. 내가 몹쓸 늙은이였구나! 나를 용서하시오, 공자!’

황일동의 마음속, 마지막 한점의 경계심까지 녹아내렸다.

이토록 아름다운 젊은이를 믿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를 믿겠는가?

깊은 반성과 후회, 그리고 진한 감동!

주름진 눈가에 설핏 눈물이 고였다.

“유운 공자!”

“황 문주님!”

젊은이와 늙은이가 두 손을 맞잡았다.

오가는 눈빛 속에는 서로를 향한 존경과 호감만이 가득했다.

“싸우다 서로 마음이 통한다라. 실로 사내다운 광경이로구나!”

지켜보던 도산호의 가슴 역시 달아올랐다.

유운의 진심이 그에게로 옮겨왔다.

빛나는 재능은, 그 자체로 소중한 보물.

별이 빛나면, 두려워하거나 미워할 것이 아니라 더욱 빛나게 도와야 했다.

“황 문주, 우리가 잘못 생각했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 방주?”

도산호가 성큼 다가왔다.

“이미 먹이가 가득함을 알고 찾아온 맹수들이오. 살점 몇 조각 떼어준들 만족하겠소?”

“……!”

유주에서도 부유하기로 소문난 청수향이다.

외부에서는 거대 세력들이 욕심내며 압박했고.

내부에서는 원한을 잊지 못한 원로들이 반발했다.

“무림의 일을 그런 식으로 풀어가려고 하면 아니 되었소.”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지 않소. 누가 있어 이 복잡한 매듭을 풀어낼 수 있겠소?”

커다란 땅덩이에는 각종 이권뿐 아니라, 수많은 문파의 은원이 얽혀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폭발할 위험이 있으니.

하나하나 풀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이미 우리의 아이들이 보여주지 않았소?”

“……!”

고집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도산호와, 선대의 은원을 저버릴 수 없다는 황일동의 마음조차 바꾼 사건을 모를 리 없다.

“서, 설마. 아이들처럼 우리가….”

“크흐흐. 저지르는 거요. 사고를, 아주 큰 사고를!”

도산호가 통쾌하게 웃으며 생각을 털어놓았다.

“허허. 흐음. 이거 어쩌면….”

“어떻소? 좋지 않소?”

“매우 위험하오. 자칫하면 외부의 세력이 우리 두 문파를 통째로 삼킬 수도 있소.”

“맞네, 분명 도박이지. 이백 년 역사의 두 문파가 걸린 도박.”

“……!”

황일동이 할 말을 잃었다.

지면 모든 걸 잃는다. 이런 무모한 도박을 할 이유가….

“도 방주께서 생각하시는 패는 설마…!”

“황 문주가 생각하는 바와 같네.”

두 사내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자라면?

‘승산이 있다!’

‘걸어볼 만해!’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패일 것이오.”

“으하하, 그렇지. 누가 감히 예상하겠는가? 예상하는 놈이 미친놈이지. 공자에게도 막대한 득이 될 걸세! 돌 하나로 새 세 마리를 잡는 격이니…!”

한참을 쑥덕거리던 두 무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유운이 있었다.

‘참으로 충만한 하루였어. 이토록 놀라운 깨달음을 얻을 줄이야.’

검사.

검사조생.

거기에 수많은 가능성까지!

쿵쾅거렸던 심장을 가라앉히고, 심득을 수습하던 참이었다.

“……?”

“……!”

두 늙은이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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