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제175화 전쟁, 그리고 가출한 놈 (2)
안정된 마기.
마계화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마계화는 이미 일본에서 많이 겪어 본 일이었다.
기자 지구는 일본의 마계화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뭔가 달리 할 말은 없었다.
“확실히 일본의 마계화와는 다르네.”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다르다. 뭔가 이곳은 마계화로 지구를 침략하려는 그런 분위기라기보다는 이곳 자체가 마계가 되어서 지구에 적응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게 나쁘냐고 한다면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멸망한 세계의 마계는 중간계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계와 다른 차원의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한 세계를 공유하지만 서로 왕복이 쉽지 않은? 그런 곳이었다는 느낌이다.
마치 지구와 게이트 안의 세계처럼 분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계 역시 그 세계의 일부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즉, 그 세계가 멸망할 때에 마계도 같이 멸망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곳과 연결된 지구 게이트는?
일단 이토의 일본 마계가 있었고, 지금 이곳 기자 지구의 마계가 있다. 다른 점이라면 이토의 중2병처럼 지구를 침략해서 마계로 만들겠다는 의지보다는 지구와 같이 생존하고 싶다는 분위기랄까?
게이트는 중간계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멸망한 세계와 지구를 이어 주는 것이다. 그 결과로 지구도 멸망을 하게 될지, 아니면 멸망한 세계의 구원이 될지는 그 게이트를 소유한 이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난 시스템이 의지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의지라기보다는 그들은 그냥 연결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시스템은 나에게 많은 것을 퍼 주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섬 게이트부터가 다른 이들과 다른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떻게 보면 시스템의 의도라기보다는 내 어깨에서 그루밍을 하고 있는 호야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호야는 나를 찾았다. 그것을 난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멸망한 세계에서 절대자가 된 호야는 나를 찾기 위해서 게이트를 조종했거나, 그런 호야의 의지가 반영되어서 게이트가 내 앞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냐앙.
호야를 가만히 쳐다보니 뭘 보냐는 눈빛을 보낸다. 저래도 쟤가 날 참 좋아한다. 나도 쟤를 참 좋아하고. 아닌 것 같다고? 그건 우리의 유대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저쪽에 있다고?”
“네, 저쪽에 있는 것으로 느껴지네요.”
헬레나의 말에 따라서 우리는 그쪽으로 이동을 했다. 시연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처음 본 광석 같은 것이 있으면 아공간 주머니에 일단 담고 본다.
애가 아주 요즘 제작에 미쳐 있는 것 같다.
엘프 여왕은 조금 흥분한 모습이다. 그녀는 평생을 세계수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왔다. 그랬다가 세계수의 그늘을 내가 옮기면서 세계 여러 곳을 보게 되었다.
평온을 좋아하는 엘프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엘프라고 다 그렇다는 것은 선입견이다.
요즘 우리 엘프들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못 살 정도로 현대에 적응한 이들이 많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그들은 화려한 현대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물론, 여전히 세계수의 지킴이를 하는 이들도 있다. 어차피 선택은 개개인이 하는 것이니까.
레라는 물의 일족을 크게 번성시키고 있다. 원래 여성으로만 구성되었던 이들이었지만, 이제는 남자아이들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일족을 늘려간다. 그래도 천성이 물을 좋아하는 이들이라 지구에서도 바이칼 호수 근방에 자리를 잡고 있다.
물의 일족에게는 매우 좋은 곳이 분명했다. 다행히 러시아는 바이칼 호수까지도 우리에게 넘겨주었기에 별로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헬레나의 바람의 일족은 지구 곳곳에 퍼져서 살아간다. 영지 안에만 사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앞으로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곳이 지구라는 것을 느끼고 적응하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바람의 일족, 엘프, 물의 일족, 심지어 드워프까지도 인간과 결혼을 할 수 있고, 자손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영지에는 그런 커플들이 여럿 존재한다. 그들에 대한 차별은 당연히 없다. 나중에는 인간들만이 아니라 참 여러 종족의 후손들이 세상에 살아갈 거라는 생각도 든다.
단, 여전히 마계의 주민들은 인간과 섞일 수 없는 존재들이다.
헬레나의 안내를 받아서 찾아간 곳은 작은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게 원래 있던 피라미드는 아니다.
즉, 이곳이 마계가 되면서 생겨난 피라미드라는 이야기다. 선우는 저 안에 있다고 한다.
“이 미친놈은 아무리 피라미드가 좋다고 해도 여기 와서 뭔 짓을 하는 거야?”
“냅둬, 선우 오빠랑 선우 오빠 여친이랑 둘 다 피라미드에 미쳐 있더라.”
시연이의 말에 난 조금 어이가 없었다. 선우의 여친과 선우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마계의 피라미드에 둘이 와 있다?
이게 뭔 미친 짓이란 말인가.
“일단 들어가 보자.”
우리는 피라미드 입구에서 피라미드로 들어갈 길을 찾았다. 의외로 매우 멀쩡한 문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니.
“어이, 친구!”
선우가 웃으면서 우리를 반겨 준다. 저 면상에 살짝 주먹을 날려줄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든다. 그리고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호야가 냅다 날아가서 선우의 얼굴에 냥냥 펀치를 먹인다.
퍼버버버버벅!
“끄악!”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내 어깨로 복귀. 역시 호야님이 짱이시다.
“야아, 미친놈아. 여기서 뭐 하고 있는데?”
“어? 그게…….”
“오빠!”
주연이다. 선우의 첫사랑이자, 곧 결혼할 선우의 여친.
“주연아, 이게 뭔 난리냐? 선우네 부모님 걱정하신다.”
“아, 그게…….”
“뭔데?”
“그게 우리 신혼집을 피라미드로 만들고 싶어서요.”
내가 선우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선우도 고개를 끄덕인다.
“야, 피라미드가 거대한 무덤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거지?”
애초에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다. 소위 말해서 한국에 있는 왕릉이라는 이야기다. 아무리 피라미드가 좋다지만 저걸 집으로 쓴다고?
“야, 내가 등신이냐? 그것도 모르게?”
“그걸 아는 놈이 피라미드를 신혼집으로 쓴다고?”
“어. 의외로 피라미드가 여러 효용이 있어. 환기도 잘 되고.”
“환기가 잘되는 집은 널렸다만?”
“취향을 존중해 주시게, 친구.”
“하아.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애초에 이 피라미드는 뭐냐? 원래 있던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오, 눈썰미. 이거 마왕 파라오, 그 친구가 선물해 준 거야.”
“마왕 파라오랑 친구 먹었냐?”
“어, 말이 아주 잘 통하던데?”
선우는 원래 친화력이 좋은 놈이다. 그렇다고 마왕이랑 친구를 먹을 줄은 몰랐다.
“잠깐 있어 봐 금방 올 거야.”
심지어 온단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마왕이니까 보면 죽여야 하나? 하지만 마왕이라고 해도 그 존재 자체가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죽이기도 애매하다.
실질적으로 이곳 기자에서 피해를 입었거나, 죽은 이들은 대부분 헌터들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히려 중국처럼 민간인들까지 학살하는 놈들도 있는 마당에 마왕 파라오는 오히려 매우 온건한 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냥 죽인다는 것도 크게 내키지 않는다.
“안녕하십니까, 대군주님.”
그때 내 뒤에서 인사 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마왕 파라오가 있었다.
파라오의 머리 장식이랄까? 그런 것을 하고 몸은 슈트를 입고 있는데 그게 묘하게 어울린다.
“마왕 파라오?”
“네, 맞습니다. 혹시 저를 죽이실 생각이라면 일단 얘기를 먼저…….”
내 눈빛이 심상치 않아 보였나 보다. 그리고 의외로 저자세로 나온다. 무려 마왕인데 말이다.
“뭐,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나섰겠죠?”
“하하하, 다행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기자 지구를 벗어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네, 전 오래 마왕으로 살고 싶지, 이토처럼 멍청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다행이다. 괜한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대군주님을 뵙게 해달라고 저 친구에게 요청을 했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지만요.”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마왕 파라오는 선우와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선우가 대뜸 찾아와서 피라미드를 가지고 싶다고 했단다. 웬만한 헌터였다면 당연히 무시를 했겠지만, 세계에 알려진 바로는 선우는 대군주인 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 알려져 있었다.
괜히 선우를 건드렸다가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마왕 파라오는 매우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존의 피라미드를 주려고 했더니 선우가 거부를 했단다.
새로 피라미드를 만들어 달라고. 그래서 새로 피라미드를 만들었단다. 그랬더니 매우 좋아하면서 그것을 한국으로 가지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나에게 잘 얘기해서 기자 지구를 공식적으로 마계의 영토로 인정받을 수 있게 잘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말이다.
사실 선우가 저렇게 이야기를 한 것은 내가 기자 지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계도 멸망한 세계의 일원이었던 만큼 그 명맥을 이어가게 할 필요는 있었다.
더 확장만 하지 않는다면 기자 지구는 건드릴 생각이 없다는 것이 내 입장. 그걸 잘 아는 선우라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거기에 포인트는 나에게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지, 그렇게 하겠다고 장담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마왕 파라오와 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외로 내일이 없는 놈이라고 정기훈이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은 달랐다.
인간이 아닐 뿐이지 그 역시 영주였다. 미라로 변했던 헌터들은 이제 마계 주민으로 탈바꿈되었고, 그들은 언데드가 아니라 온전한 마계의 주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밖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기자 지구는 매우 평온한 모습이었다. 물론 여기저기 마수들이 돌아다니고, 그것을 사냥하는 이들이 잔뜩 있었지만 말이다.
심지어 지구의 헌터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그들에게 사냥 라이선스를 발급한단다. 마수는 마왕 파라오의 권능으로 계속해서 찍어 낼 수 있고, 그들을 죽이면 부산물과 경험치를 얻으니 매우 좋은 사냥터라는 것을 나에게 강조했다.
즉, 공존을 원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나오니 내가 굳이 기자 지구를 파괴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계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주십시오. 그들이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하겠습니다.”
아직도 마계의 주민들은 세계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마계는 공기처럼 중요한 곳이었는데 일본의 마계를 다 정화시키지 않고 있는 이유도 그런 부분이 있었다.
마왕 파라오는 그들을 모두 자신이 끌어안고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난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게이트의 의지가 느껴졌다.
공존.
멸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공존을 선택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듯한 의지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