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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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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찬란히 빛나서 더욱 어두운 도시에서 - 02
그것은 마치 발레 공연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이었다.
심장을 후벼 파 하나의 생명을 끝낸 칼날은 허공에 피를 흩뿌리며 뽑혀져 나와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옆으로 휘둘러졌다.
스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멍하니 서있던 또 한 명의 목에 칼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목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놀란 사내가 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잡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막을 수는 없었다. 정맥과 기도가 함께 잘린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빠르고, 날카로우며, 치명적인 기습으로 두 명이 죽은 상황에서, 남은 세 명은 상황을 파악하고 본능적으로 대처했다.
“씨발, 습격이다!”
동료의 피를 뒤집어쓴 남자는 놀라고 당황한 상황에서도 빠르게 행동했다.
우선 소리를 질러 아직 남은 동료들에게 위기를 알린 후 빠르게 자세를 취하고 적을 향해 우선 주먹을 날렸다.
비록 지금은 파리의 뒷골목에서 하찮은 불법 이민자 노동자이자, 어설픈 갱에 불과하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이 보낸 짧은 인생은 절대로 하찮지도 단순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멀쩡하게 옆에 서 있던 동료나 친구, 형제가 갑자기 머리가 날아가면서 죽는 일을 경험하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놀라서 아무 일도 못하다가 같이 죽는 것을 본 적도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이 지금 살아 있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피하고, 반격하고, 싸워 이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먹은 빠르면서도 묵직하게 호선을 날리며 날아들었다.
프로 복서도 감탄할 정도로 멋진 그 훅은 타겟으로 삼은 위치로 정확하게 꽂혔다.
자신의 동료 둘을 살해한 자의 왼쪽 턱에 정확하게 꽂히는 자신의 주먹에 마음속으로 환호한 것도 잠시, 그의 주먹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의 것이 아니라 쇳덩어리의 그것이었다.
우드득 거리는 뼈부리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아아악!”
뒤늦게 확인한 상대는 얼굴에 오토바이 헬멧처럼 보이는, 하지만 전부가 검은 금속으로 된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마스크를 쓴 남자는 그렇게 손뼈가 부서진 그의 오른팔 손목을 오른손으로 움켜쥐더니, 왼팔 팔뚝으로 그의 팔꿈치를 후려쳤다. 팔꿈치는 으적 하는 소리를 내며 원래는 구부러질 수 없는 방향으로 꺾였다.
그리고 그에 따른 미칠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마치 발레리노처럼 우아하게 회전한 마스크 남자의 몸이 사내의 뒤로 돌아가더니 한손으로는 그의 턱을 쥐고, 한손으로는 목을 감싸듯이 팔을 앞으로 감아 그의 어깨를 잡고는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잡아당겼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해진 힘이 목뼈에서 교차했다.
상하나 좌우로는 제법 단단해도 회전에는 약한 인간의 목뼈는 으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뇌와 머리 이하의 몸을 연결하는 척추신경이 그 충격을 끊어졌다.
사내는 즉사했다.
탕! 탕! 탕!
그 사이 총을 꺼내든 리더 격의 사내가 마스크를 쓴 남자를 향해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커다란 자지를 덜렁거리면서 총을 쏘는 그의 모습은 일견 우습기 보였지만, 어깨 너비로 다리를 벌리고 양손으로 권총을 잡고 쏘는 그의 자세는 어설픈 갱의 모습이 아니라 충분히 훈련된 프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확하게 사용된 마가로프의 9mm탄환들은 그가 목표로 하던 마스크를 쓴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방패처럼 앞세운 그의 동료에 몸에 박혔다.
그리고.
탕!
마스크 남자가 어느 사이에 뽑아 든 권총에서 발사된 탄환은 단 한발에 정확하게 총을 든 리더의 두 눈 사이에 명중했다.
“에디! 콰미!”
마지막 남은 사내는 연달아 죽어 버린 동료의 이름을 비통하게 외쳤다.
육탄전으로는 선진국 특수부대원과 싸워도 지지 않을 거라는 에디나 어리지만 팀의 리더로 여러 차례 사선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왔던 백전노장 콰미가 너무도 어이없고 간단하게 죽어 나가는 광경이 그를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머리가 아무 생각도 못하는 사이에도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깔아 뭉개고 있던 민영의 위에 몸을 겹친 다음 빠르게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민영을 자신의 몸 위로 올려 방패로 삼고, 민영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로서는 갑자기 나타난 저 미친 살인마가 과연 여자의 안위에 신경을 쓸지 안 쓸지 알 수 없기는 했지만, 최소한 총을 막아보자는 생각에서 나온 동작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일단 움직임을 멈추는 것을 보며 인질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총 치워! 이 여자 죽는다!”
그는 아직은 약간 어설픈 구석이 있는 프랑스어로 외쳤다.
벌벌 떨고 있는 여자의 몸이 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과 좋은 향기가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 등에도 그의 시선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상대의 총, 정확하게는 총을 든 손의 손가락을 주시하며 칼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최악의 경우 상대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조짐이 보이면 여자의 목을 찔러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심사였다.
이 상황에 굳이 아무 상관 없는 차민영과 같이 죽겠다는 그 심사가 참 황당했지만, 그들은 원래 그런 인간들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차민영은 울먹이며 애원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는 했다.
인질이 질질 짜면서 인질범과 구출자를 동시에 자극하는 이런 행동이 사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며, 오히려 인질을 위험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화 같은 곳에서 이런 장면을 보면 한숨을 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일이 되자 주체를 하지 못했다.
갑자기 납치당했고, 집단 강간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강간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 갑자기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하더니 사방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목에는 칼날이 디밀어져 있는데, 앞에는 얼굴에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 상황에 이 일을 직접 겪다 보니 이성적으로 뭔가를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차민영은 그저 살려 달라는 말 만을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차민영을 인질로 삼은 남자는 약간의 희망을 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린 상대가 그를 향해 겨누고 있던 총을 든 손을 등 뒤로 숨겼고, 다시 나타난 손은 빈손이었다.
차민영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고, 한국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그는 차민영의 말과 상대의 반응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
어쩌면 이 둘이 아는 사이이고 여자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거로 생각했다.
둘이 아는 사이라면 상대방도 뭐라고 말을 했을 것이라는 기본적인 상황 파악을 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방법과 희망만을 떠올리기도 벅찼다.
그리고 잠시만 계속된 대처 동안 그의 생각은 이 여자를 이용해서 살길을 찾은 다음 친구들과 힘을 합쳐 이들에게 보복하자고 생각하자는 것에까지 뻗어갔다.
죽은 친구들을 두고 비겁하게 혼자 살아 도망가기 위한 자기변명까지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위한 시작인 협상을 위한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그를 향해 빈손을 보여주던 마스크의 남자가 자기 손으로 마치 허공을 움켜쥐는 것 같은 동작을 취했고, 그 순간 칼을 들고 있던 그의 손목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으아아악!”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고통에 참지 못하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그는 여자가 인질로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이 성큼 걸어 그에게 다가온 마스크의 남자가 아직도 그가 자기 몸 위에 올려 두고 있던 여자를 발로 밀어 옆으로 굴려 버린 것이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그 행동은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인질로서 가치가 있는 상대에게 할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면 왜?’
고통을 참으며 왜 자신이 착각하도록 총을 치운 것인지 궁금해하는 그에게 무릎을 땅에 대고 허리를 굽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상대로부터 어울리지 않는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뭐든, 뭐든 대답할게.”
“너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위조 여권 구하는 법을 아는 것 같더군. 어디로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겠나?”
남자는 미칠 것 같았다.
숨구멍이나 눈구멍도 안 보이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대의 모습도 무서웠지만, 상대가 평온한 목소리로 물어온 질문의 내용은 그를 미친놈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권? 위조 여권? 겨우 그걸 물어보겠다는 거냐?”
그는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상대가 인질을 구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으로 인질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안 다음에는 온갖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고향에서 벌였던 일들을 생각하며 과거가 자신들을 여기까지 추적한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 파리의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자신들 따위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어떤 일에 자신들도 모르게 끼어들어서 으스러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재수 없게 쾌락 살인마에 걸린 걸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떠오른 수많은 이유 중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죽음의 공포와 고통조차 잊고 미쳐서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 놀란 민영이 비명을 지른 것에 화가 나 곧바로 손찌검으로 응징했던 것처럼, 그도 소리를 지른 것에 곧바로 응징당했다. 그건 멍이나 남을 손찌검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비명이 음습한 터널에 울려 퍼졌다.
무릎 관절의 연골을 정확하게 노리고 찌른 칼날은 인간의 신경이 가장 예민하게 모인 곳 중의 한 곳인 그곳을 사정없이 후벼 파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그의 귀에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죽을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고 싶지는 않을 텐데?”
고통으로 마비되어 가던 그의 뇌리에 고향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재미로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던 자들, 죽여 달라고 몸부림치는 자들을 최대한 죽지 않게 유지하며 고통을 가하며 웃고 있던 자들의 목소리도 이 정도로 무감각하지 않았다.
고향의 그자들이 늘 하던 말이 있었다.
죽을 이유가 있고, 죽을 수 있다면 충분히 축복이라고.
그는 정신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떠들었다.
위조 여권을 취급하는 것이 누군지,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는지, 여권의 시세는 어느 정도인지 등등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사력을 다해 외쳤다.
그리고 세 번 연속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외친 다음에야 이야기는 끝났다.
그는 심장을 파고들어 오는 칼날에 고통이 아닌 안도를 느끼며 겨우 친구들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