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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찬란히 빛나서 더욱 어두운 도시에서 – 03
차민영은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 손으로는 자기 귀를 틀어막고 다리는 한껏 웅크린 채로 고개를 숙이고 눈앞의 광경을 외면하고 있었다.
틀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뽀얀 가슴이 노출되고 있는 것도, 속옷이 아직 허벅지에 걸쳐져 있어서 사타구니 사이의 음부가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방금 전 흑인 다섯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기다릴 때만 해도 최소한 사랑하는 딸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곧 닥쳐올 고통을 참고 견뎌내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은 괴롭겠지만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 흑인들에게 분노하고 그들을 저주했다.
살기 위해 참겠다고 결심하던 마음속에는 기회가 되면 자신이 직접 이들을 죽이겠다는 결심도 있었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혐오스러운 벌레처럼 짓이겨 죽어가는 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마음을 가지는 것과 그것이 현실로 구현된 것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반쯤 잘려 목이 덜렁 거리는 시체의 목 갈라진 부분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반대쪽을 바라보며 쓰러진 흑인의 뒤통수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주변에는 머리에서 터져 나온 피와 뇌조각이 흩뿌려져 있었다.
엎어져 있는데도 얼굴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시체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가슴 앞이 온통 피로 젖어 있는 시체는 그 중에서 그나마 가장 무난했지만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체들은 그녀가 TV나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으며 피와 죽음의 냄새는 지금 당장이라고 토하고 싶을 만큼 역겹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비명 소리.
귀를 막아도 전혀 소용없이 울려 퍼지는 저 비명소리가 그녀를 가장 괴롭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소진이, 소진이, 우리 소진이.’
그녀는 딸의 이름만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딸의 존재만이 지금 그녀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다행히 고문당하고 있던 흑인 만큼이나 그녀를 고문하던 비명 소리는 영원하지는 않았다.
어느 사이 비명이 멈추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차민영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검은 금속제 마스크에는 눈구멍이 없었지만, 차민영은 상대방과 눈이 마주친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은 마스크의 사내가 그녀의 바로 앞에서 허리를 굽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겁하게 놀라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녀에게 상대방이 물었다.
“한국인인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한국어였다.
차민영은 그 질문을 분명히 귀로 들었고, 뇌로 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대답이 아니었다.
“사, 사, 살려주세요. 딸이 있어요. 다섯 살이에요.”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상대방의 질문을 듣고도 딴소리하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고,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상대방의 차가운 시선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 노력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오는 말은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살려주세요.”
앵무새처럼 나오는 말에 스스로 놀라고, 당황해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검은 마스크의 사내, 유진은 여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허리를 폈다.
살려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여자에게 지금 당장 뭔가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여러 가지 고민 끝에 끼어든 일인데, 그렇게 해서 얻은 대상이 너무 상태가 너무 나빠서 귀찮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했다.
딱히 만만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연구소에서 벗어나 만나게 된 사회에서 그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정말 너무 없었다.
유진이 무장을 갖추고 수송 장갑차를 빠져나와서 시작했던 사냥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3년 전 유진과 친구들의 탈출을 막아서고, 친구들을 학살했던 전투팀의 일원이었던 바렐라의 팀원들은 꽤 원한에 찬 상대였지만 쫓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워낙에 사방으로 흩어져 빠르게 도망가고 있어서 유진의 초월적인 감각으로도 꽤 막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보다 훨씬 더 순위가 높은 목표, 장 폴 리샤르를 찾기 위한 중간 단계로 여겨진 레퀴프 트루아는 도망은 치지 않았지만, 유진의 생각보다 훨씬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유진과 같은 특별한 초인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 보였고, 유진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유진이 예전 반란당시에 사용했던 압도적인 공격 전술은 그들에게 별로 통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몇 명 처리하기는 했지만, 그러는 동안 입은 반격에 유진이 받은 피해도 컸다.
그리고 당황한 유진이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도 전에, 놀랍게도 레퀴프 트루아는 유진을 두고 철수해 버렸다. 그 와중에 발레라의 팀원과의 교전 중에 죽거나 유진의 손에 죽은 동료들은 물론이고, 발레라의 팀이 두고 간 그들의 시체와 유진을 수송하는데 사용되었던 장갑 수송차까지 모조리 챙겨가는 수완을 보였다.
유진은 다른 건 몰라도 장갑 수송차에 남겨 두었던 닥터 요하임의 시체는 차지하고 싶었던 유진이 그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전선을 구축하고 탄막을 쏟아 견제하며 침착하게 퇴출하는 그들의 행동을 결국 막지 못했다.
유진은 철수하는 그들을 쫓았지만, 유진의 초인적인 몸으로도 시속 100킬로를 넘는 속도로 달리는 차를 도로도 아닌 숲길을 달리며 쫓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로를 따라 같이 달릴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앞서가는 차를 도로를 따라 달리며 쫓는 일은 딱 좋은 사격용 표적지가 되는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진은 어느 독일 시골 산길에 홀로 남겨졌다.
레퀴프 트루아를 완전히 놓쳤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유진은 분노하고 좌절했다.
평생 꿈꾸었던 대로 탈출에 성공했고, 그 와중에 닥터 요하임이라는 노리고 있던 목표도 하나 처치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가 된 유진은 이것이 성공이라고 또 자유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과연 노력과 행운의 결과로 자유를 되찾은 것인지, 아니 지금 자신이 자유로운 것이 맞는지부터가 의심스러웠다.
레퀴프 트루아는 너무 쉽게 유진의 나포를 포기했다. 그들이 과연 자신을 노리고 있던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특히 유진이 배후로 추정하고 있던 리샤르나, 그를 사주했을 마담 보른의 자신에 대한 집착을 생각하면 유진이 잡히건, 이들이 모두 죽건 양자 중 하나로 결판이 났어야 옳았다.
떠나기 직전 그동안 전혀 접점이 없던 연구소장 유센코 박사의 갑작스러운 도움도 사실 의심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언제든지 다시 잡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유진 자신을 밖에 풀어 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런 비정상적인 일을 할 이유 따위는 생각나지 않지만, 유진의 관점에서 UE는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조직이었다.
추적을 위한 전자기기 따위가 몸속에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런 전자기기 외에 자신을 추적할 방법이 없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도 몸에서 벗겨내지 못한 ‘바벨의 기억’이나 ‘이름없는 사슬’같은 물건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누구도 완벽하게 모르는 물건이었다.
몸 밖의 아티펙트들은 고사하고 유진의 몸속에 이식되어, 유진의 일부가 되어 있는 수많은 생물학적 그리고 비생물학적 신체 조직들도 유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진뿐만 아니라 UE의 그 누구도 그것들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 유진은 알지 못하는, 하지만 UE에서는 쓸 수 있는 뭔가 특이한 추적 방법이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유진은 고민 끝에 탈출 후 원래 목표로 하던 스위스가 바로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길을 파리 방향으로 돌렸다.
레퀴프 트루아의 후퇴 방향이 그쪽이었고, 장 폴 리샤르가 있을 곳이 그곳이었으며, 무엇보다 가장 의심스럽고 뜬금없는 존재인 닥터 유센코가 언급한 주소가 그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파리로 오는 길은 완전히 고난길이었다.
독일 남부 프라이부르크 인근의 로핑엔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프랑스 파리까지는 직선거리로 500km남짓, 차를 타고 이동하면 넉넉잡고 7-8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불과했지만, 유진은 거의 보름 가까이 걸렸다.
유진은 걸어야 했다. 그것도 사람들 눈을 피해 어두운 밤, 인적 없는 숲과 산길을 이용해야 했다.
추격의 위험성보다는 사람들의 주목도가 문제였다. 봉인이 해제되었음에도 ‘바벨의 기억’이 머리에서 벗겨지지 않았고, ‘이름없는 사슬’도 손목과 발목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머리에 눈알구멍도 없는 검은색 철 가면 투구를 둘러쓰고, 손과 발에 사슬이 묶여 있는 수상한 남자의 존재가 사람들 눈에 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세상 경험이 전혀 없는 유진도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먹고 자는 것도 문제였다.
‘바벨의 기억’이 벗겨지지는 않아도, 온 정신력을 집중하면 몇 분이라도 입 부분을 열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았다면 유진은 아마 미쳐 날뛰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나마 입에 넣을 수 있게 된 식량을 구할 방법이 좀도둑질이라는 것은 유진에게 크나큰 스트레스였다.
돈이 없지는 않았지만, 차를 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식당이나 가게는 이용할 수 없었다. 숲에 마땅히 주워 먹을 것도 없었고, 사냥할만한 동물도 마땅치 않았으며, 사냥할 동물로 요리할 방법은 더욱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자급자족도 불가능했다.
결국 유진은 사람들 눈을 피해 남의 집이나 가게에 몰래 들어가 음식을 훔쳐야 했다.
잠자리도 비슷했다.
잠자는 동안에는 유진도 무력화된 상태가 된다. 초식동물처럼 예민하게 주변을 감시하며 자는 것도 원래는 불가능하지 않아야 하는데, 잘 안되었다. ‘바벨의 기억’의 영향으로 추정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와 마주칠 수 있는 편한 남의 집은 쓸 수 없었고, 숲속 깊은 곳에서 땅을 파고 낙엽으로 위장해서 숨어서 자야 했다.
그나마 우연히 훔친 침낭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것도 스트레스를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고생해서 파리에 도착해서도 상황은 그렇게 좋아지지 않았다.
식량을 훔칠 것도 좀 늘었고, 훔칠 수 있는 식량의 질과 종류가 늘어난 것은 좋았지만, 대신 잘만한 곳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남들 눈에 띄지 않으면서 잘 수 있을 좋은 장소들은 이미 선점한 노숙자들이 가득했고, 유진은 노숙자들 눈에 띄는 것이 경찰 눈에 띄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을 피해야 했다.
유진이 연구소에서 만났던 성인 실험체의 상당수는 노숙자 출신이었고, 정말 많은 숫자가 파리 출신이었다. 유진은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UE가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노숙자들 사이에 자신들의 정보망을 구축해 두었다는 합리적 의심을 결론 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의 눈을 피하고자 선택했던 장소가 지금 이곳 근처였다.
워낙 갱들이 범죄장소로 많이 사용하는 우범지역이라서 노숙자도 피하는 장소.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갱들의 피해자가 된 여자를 보게 되었고, 그녀가 한국어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파리에서 듣게 된 굉장히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언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직접 써본 적은 없지만, 유진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 들었던 언어. 갑자기 그 언어를 듣는 순간 유진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