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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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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찬란히 빛나서 더욱 어두운 도시에서 – 04
유진은 움직이기 전에 짧은 시간 동안 길게 고민했다. 그리고 여러모로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들이 쓸만하겠다는 생각에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는 일에 끼어들 결정을 내렸다.
우선 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와중에 얻은 위조 여권에 대한 추가 정보는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 목표인 여자의 모습이 전혀 기대와 다르다는 점은 문제였다.
여자는 질문을 던져도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대화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가진 여자의 모습은 유진이 고민하던 그리고 계획하던 일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이래서야 쓸모가 있나? 계획이 시작도 전에 무용지물이 된 것 같은데, 목격자를 남겨 두기도 애매하니 그냥 죽일까?’
한국인이라고, 여자라고, 무고한 사람이라고 딱히 죽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유진의 관점에서 이 세상 누구도 자신에게 무고하지 않았다. 같이 실험당하던 실험체 동료들조차도 마찬가지였고, 일반시민들은 아예 가차 없었다.
유진은 닥터 요하임이 유진 자신을 실험에서 얻은 결과로 수많은 질병 치료제나 최고위 권력자들을 위한 특수 의약품뿐만 아니라 시민을 위한 일반 의약품들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UE가 자신을 이용하고, 고문해서 만들어낸 혜택을 전 세계 인류가 골고루 받는 상황에서, 유진은 인류 그 누구도 자신에게 무고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도 아예 고민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 사, 살려주세요. 딸이 있어요. 다섯 살이에요.”
살려달라고 애원한다는 이유로 죽이는 것은 좀 애매하다. 어린 딸에 대한 모성애가 살아야 하는 이유인 점은 유진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포인트이기도 했다. 모성애는 유진에게 가장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망가진 여자는 유진에게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유진은 기회를 준다는 생각에 딱 한 번만 말했다.
“살려달라는 말 밖에 할 줄 모른다면, 살려 둘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딱 한 번 만 더 묻겠다. 한국인인가?”
유진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차민영에게 다행스럽게도 차민영의 살고자 하는 의지가 공포를 이겨냈다.
“한국인이에요.”
제대로 된 대답이 나왔고, 그래서 유진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유학생인가?”
“관광객이에요.”
“일행이 있나?”
“혼자예요.”
“운이 좋군.”
이 점이 유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일행이 있다면 유진의 계획에 도움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경우 사실 유진이 차민영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지 애매했다.
다행히 일행은 없었고, 그녀의 신분과 상황은 유진의 계획에 알맞았다.
“도와주겠다. 대신 대가를 원한다. 내가 원하는 대가는.”
“목숨만 아니면 뭐든지, 뭐든지 원하는 대로 줄게요.”
유진이 조건을 말하기도 전에 차민영이 서둘러 대답했다. 유진은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거래하지. 딜?”
“딜.”
유진이 누군가에게 자주 듣던 탓에 습관적으로 내뱉은 계약 체결을 의미하는 딜이라는 단어에, 차민영도 익숙하게 딜이라고 대답해서 그들의 계약이 이루어졌다.
* * *
차민영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유진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강렬한 생존 본능이 망가진 정신을 간신히 복구해서 이성이 돌아온 상황이었다. 나름으로 고민의 결과로 내린 결정이었다.
차민영은 굳이 협상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었지만, 사회 생활하면서 이런 종류의 일방적인 거래 제안, 혹은 거래를 가장한 통보를 받아 본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차민영이 경험으로 쌓아온 협상 기술은 일단 극단적인 상황을 피한 다음에 나중에 은근슬쩍 조건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어차피 무조건 들어줘야 할 조건이라면, 구체적으로 들어봤자 손해가 될 뿐이다. 일단 거론된 조건은 나중에 상황이 호전된 다음에라도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차민영은 일단 자신이 어떤 조건도 거절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모면한 다음에, 조건은 좀 더 안정적인 상황에서 들어보고 가능 여부를 판단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딸인 소진이가 위험해질 일만 아니라면, 어지간하면 다 들어줄 생각이기는 했다.
그녀에게 지금, 딸의 안전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섹스를 요구당하거나, 마약 범죄에 이용당하거나, 살인 범죄 같은 것의 공범이 되더라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따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면에서 유진이 그녀에게 요구한 첫 번째 요청사항은 좀 애매한 것이기는 했다.
“당신 숙소가 어디지? 시설 괜찮은 곳인가?”
그녀의 숙소는 4성급은 되는 상당히 비싼 곳이기는 했다. 사실 차민영 본인의 취향보다 더 비싼 곳으로, 그래도 성수기라 싸고 좋은 마땅한 숙소가 부족했다는 점과 여자 혼자라는 점을 고려해서 비싸도 시설 좋고 믿을 수 있는 곳으로 고른 곳이었다.
그건 유진에게 꽤 만족스러운 부분이었지만, 가는 길은 좀 많이 고생스럽기는 했다.
차민영의 숙소는 그녀가 납치당했던 그리고 유진이 머물고 있던 생드니의 우범지대로부터 꽤 거리가 있는 파리역 인근에 있었다. 차민영은 생드니로 오기 위해 버스를 이용했지만, 당연히 유진은 그럴수가 없었다. 유진 수상한 외모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차민영의 몰골도 남의 눈에 띄어서 유진에게 좋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둘은 철로 옆을 따라 걸어야 했다. 유진은 상태가 안 좋은 그리고 당연히 체력도 부족할 차민영에 함께 걷자고 하지는 않았다. 유진은 차민영을 들쳐안고 걷는 것을 선택했다.
그건 일단 가장 위험한 상황을 넘겼다는 것을 깨달은 차민영에게 색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차민영에게 유진은 매우 수상하고, 위험해 보이는 무서운 사람이기는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구원자이기도 했다. 그런 남자가 어디선가 가져온 외투로 자신을 감싼 다음 든든하게 품에 앉고 걷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죽음의 위기를 느끼다가, 어느 사이 든든한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안겨서 안전을 보장받는 상황에서 감정이 흔들리지 않을 여자는 아마 없을 것이고, 보통의 경우라면 상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차민영은 아주 약간 흔들리는 마음과 달리 눈을 감고 최대한 주변을 보려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아직 안전한 것 아니야.’
상대가 굳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교통수단을 피해 계속 외진 곳으로만 이동하는 수상한 상황에서 굳이 대화를 시도해서 소리를 내는 바보는 되지 않으려 했다.
차민영은 최대한 영화나 소설에서 보는 병신같이 사고 치는 여자 캐릭터처럼은 행동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간은 변한 감정과 달리 이성은 날카롭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 남자를 믿지 말라고.
‘자기 이름을 말해 주지도 않았고, 내 이름을 묻지도 않았지. 이 사람이 원한 것은 내 숙소 주소뿐이었어. 숙소에 도착한 다음에도 안전할 수 있을까? 이대로 계속 가도 되는 건가?’
두어 시간 동안 차민영은 계속 갈등했다.
그리고 갈등은 두 사람이 결국 목적지인 차민영의 숙소 앞에 도착하자 최고조에 이르렀다.
차민영의 숙소는 파리 북역과 파리 동역 사이 나름의 번화가에 있는 곳이었다. 호텔 자체는 대로에서 약간 떨어진 안쪽에 있었지만, 주변에 사람들도 많이 통행하는 곳이었고, 1층의 커피숍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차민영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될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신기할 정도로 절묘하게 사람들의 눈을 피했지만, 이제는 한두 사람쯤은 지나가다가 이상한 눈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만약 차민영 자신이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유진을 떨쳐낼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당신 방은 어디지?”
태연하게 물어오는 유진의 질문에 차민영은 마음 굳게 먹고 결정을 내렸다.
유진이 함부로 떨쳐 내려 하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인 것이 첫 번째 이유였지만, 그녀는 그보다 유진이 자신을 구해줬고 그와 약속했으니 지켜야 한다고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다.
차민영은 순순히 유진에게 협조했다.
“저기 3층 왼쪽에서 4번째 방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들어갈 건가요? 사람들 눈 피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니었어요? 로비로는 못 갈 텐데요?”
“잠시 실례.”
유진은 대답 대신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워낙 강한 악력이 턱과 입 주변을 움켜잡아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유진의 행동에 당황한 차민영이 뭔가 하려고 하기도 전,
그녀는 허공을 날았다.
“!!!”
차민영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멀찍이 모이던 건물 벽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미리 준비한 유진의 손에 입이 완전히 막혀 있었던 탓에 비명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그녀의 안에서만 맴돌았다.
물론 그녀의 몸은 혼자 날아오른 것은 아니었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허공을 날 듯이 뛰어오른 유진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었다.
유진은 차민영이 방을 특정해준 순간 우선 그 안쪽에 사람의 기척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미약한 투시력과 염동력으로 잠겨 있는 창문의 걸쇠를 확인하고 열었다. 최고급 호텔이라는 이름과 달리 한쪽 창문의 고리를 반대쪽 창문의 위에서 아래로 거는 방식의 원시적 창문 걸쇠를 여는 작업은 간단했다. 그리고 염동력을 이용해 그렇게 잠금을 푼 창문을 살짝 당겨 열었다.
그다음은 타이밍의 싸움이었다. 주변의 사람 중 유진과 차민영의 모습을 수상하게 여겨 힐끔거리는 사람은 있었어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유진은 날카로운 감각으로 몇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서 떨어진 틈을 정확하게 캐치해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혼자라면 몰라도 차민영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한 번에 3층까지 도약할 수는 없었기에 중간에 2층 창문턱을 밟아 한 번 더 도약했다. 그렇게 얻은 추가 도약력으로 목표한 차민영의 방, 열린 창문까지 올라간 유진은 발로 창틀을 밟아 앞으로 살짝 뛰어 들어가는 것으로, 방안 진입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중간에 어디 걸려서 부순 물건도 없었고, 발자국조차 남들 눈에 뜨이는 곳에 넘기지 않았으며, 시간도 약 3초 정도 걸렸을 뿐이었다.
아무도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유진과 차민영에게 관심을 보이던 몇몇 행인도 갑자기 사라진 두 사람의 모습에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관심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