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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6화 (16/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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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찬란히 빛나서 더욱 어두운 도시에서 – 06

“엄마, 일어나! 엄마, 일어나!”

딸아이 목소리로 만든 익숙한 알람 소리에 차민영이 번쩍 눈을 떴다.

알람은 짧게 울리다가 사라졌고,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난 차민영은 잠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핸드폰을 찾았다.

습관적으로 머리 옆에 두는 핸드폰은 잡히지 않았다. 잠시 핸드폰을 찾아 손을 움직이던 그녀는 그러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 남자? 그 남자 어디 있지?’

정신이 몽롱한 상태이기도 해도, 오늘 자신이 겪은 일들인 납치와 강간미수 그리고 살인 목격과 그 살인자에게 애원하며 암묵적으로 몸을 허용한 일까지 꿈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이 왜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지, 조금 전까지 낮이었는데 왜 지금 깜깜한 밤이 된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것이었다. 그 이후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욕조에서 잠들었을 자신을 침대로 옮겨줄 사람은 그 남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리번거리다가 어느 지점에 시선을 집중했다.

방구석의 어둠 속,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시선을 느꼈다.

“거기 있나요?”

벽에 기대서서 벌거벗은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작은 고민을 하고 있던 유진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차민영이 찾던 핸드폰은 유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하고 있나?”

마치 어둠 속에 녹아들어, 허공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나타나는 유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차민영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죽을 뻔했고, 당신이 나를 구해줬죠. 당신은 원하는 것이 있었고, 나는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했어요.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내 폰에서 알람이 울렸죠? 내 딸과 통화할 시간이에요. 폰 돌려줘요.”

차민영은 꺼림직했다.

남들이 보면 안 되는 위험한 것들은 스마트폰에 절대 남겨 두지 않는 그녀였지만, 대신 딸인 소진이나 돌아가신 부모님, 그 분들과 살던 집, 지금 사는 집, 그리고 그녀의 직업과 친구에 관한 정보는 잔뜩 있었다. 눈앞의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폰을 돌려주며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사진첩을 봤다. 좋은 집에 살더군. 꼬마도 이쁘고.”

차민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항의하지 않았다. 대신 서둘러 손가락을 눌러 딸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진아, 엄마야.”

“엄마!”

딸아이의 목소리를 듣자 감정이 울컥하기는 했지만, 최대한 표 내지 않고 평소처럼 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주로 듣는 편이었으니까. 딸아이는 신나게 오늘 하루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를 설명했고, 차민영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어 줄 수 있었다.

그 사이 유진은 통화 중인 차민영의 몸을 감상 중이었다.

그녀는 벌거벗고 있었고, 통화를 위해 몸을 일으키면서 이불이 흘러내려 몸의 상당 부분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의 몸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 보이는 부분은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불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는 아랫배 아래쪽은 상상이 되기 때문에 몹시 자극적인 자태였다.

애써 가라앉혔던 유진의 성욕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통화를 끝내자 유진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말을 걸었다.

“딸은 한국에서 따로 여행 중인가? 왜 굳이 당신 혼자 파리에 왔나?”

“그러게, 말이에요.”

차민영이 딸을 남에게 맡기고, 자신은 혼자 해외로 나온 데에는 나름 몹시 개인적이고, 복잡하며, 추잡한 과거가 얽힌 사정이 있지만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도 화제를 돌렸다.

“내 폰을 뒤졌나요? 뭘 확인하려고 했나요?”

대답은 몹시 최악이었다.

“당신의 집, 당신의 가족, 당신의 친구, 무엇보다 당신이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던 당신의 딸. 당신이 지켜야 할 것들. 솔직히 말해서 많이 의외였어. 내가 보기에 당신이 간절히 지킬 것은 하나밖에 없더군.”

유진이 차민영의 스마트폰에서 본 사진과 동영상들에는 딸로 보이는 소녀 외에 다른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의 대화도 거래처 사람 혹은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과의 업무적 대화 그리고 딸이 다니는 걸로 보이는 유치원 교사와의 대화 말고는 오직 광고뿐이었다.

유진이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은 엄청난 수의 택배 도착 알림이 메시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사적인 대화 상대는 오직 딸과 언니라고 적혀 있지만, 친자매는 아닌 것이 분명한 어떤 여자뿐이었다. 그 외에 가족이나 친구라고 여겨질 만한 그 어떤 대화 상대도 없었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차민영은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도 딸을 걱정했던 이유는, 걱정할 사람이 오직 딸 뿐이며, 딸이 그녀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였다.

“당신이 나를 배신하면 당신에게 벌을 줄 방법은 너무 분명하더군.”

어느 정도 예상하였지만, 절대로 그러지 않았으면 했던 그런 대답이었다. 단지 딸이 언급된 것만으로,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나쁜 상상이 가능한 것만으로도 차민영은 감정이 격해졌다. 그녀는 악에 차서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약속은 지킬 거에요!”

“그랬으면 좋겠군. 나도 아이는 죽이고 싶지 않다. 이미 죄 없이 죽는 아이들은 너무 많이 봤지. 너무 많이.”

차민영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대답하는 유진의 목소리가 너무 차갑고도 무거웠다.

차민영은 본능적으로 유진이 아이들의 죽음에도 능숙하고, 꺼리지만 망설임이 없으며, 말로만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딸 소진이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간절함을 담아 애원했다.

“절대로, 절대로 내 딸은 안 돼요. 그러니까 난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원하는 것을 말해요. 뭐든지, 뭐든지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요.”

“그랬으면 좋겠군. 나도 굳이 당신을 죽이거나, 당신을 죽일 수 없어 당신 딸을 대신 죽이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지 않으면 되잖아요!”

“당신도 대충 눈치채고 있겠지만, 난 쫓기고 있다. 오해할 수 있겠지만, 무슨 범죄자라서 국가나 경찰에 쫓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내가 가진 비밀을 원하는 거지. 문제는 그들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그래서 난 군이나 경찰, 혹은 신문기자 따위에 눈에 뜨이는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그 흑인 갱들을 죽이고 당신을 구하는 것은 내게도 큰 리스크가 있는 행위였다. 나를 쫓는 자들은 거기서 충분히 내 흔적을 찾아낼지도 몰라. 당신이 경찰 따위를 부르거나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고.”

“신고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목숨이 위험할 때, 내가 곁에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가 곁에 없으면? 내가 외출해서 혼자 있는 동안에도 그런 마음이 유지될까? 혼자 외출해서 가게에 다녀오는 동안 순찰 중인 경찰이 옆에 지나가도 과연 망설이지 않을까? 그래서 필요한 거지. 당신이 나를 배신하면 치를 대가를 확인하고 당신에게 알려주는 일이.”

듣고 있는 차민영에게 유진의 이야기는 점점 더 불길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애원했다.

“믿어줘요!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게요!”

“우리 사이에 아직 그런 신뢰는 없지. 말로만 그래봐야 별로 믿을 수 없는 건 당연하잖아. 걱정하지 마라. 당신이 정말 위험한 일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유진의 이야기는 그것이 협박이라는 점만 빼면 몹시 상식적인 것이었다. 그녀가 배신만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으니 배신하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배신하지 않더라도, 그냥 우연히 위험해진 것만으로도 이 남자는 틀림없이 자신이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딸에게 복수할 터였다.

그녀는 이미 그런 일을 겪었다.

남편의 죽음은 사고였다. 하지만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고, 남편이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그것을 위험 혹은 기만이라고 느낀 사람들이 그녀를 위협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비롯해 그녀와 남편이 이룩한 모든 것이 그때 한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당시 임신 중이던 딸도 잃을 뻔했다.

일방적인 약속 따위는 불안하다. 신뢰가 있어야 했다.

“신뢰가 필요한 거예요? 말이 아닌 몸으로 증명하면 되는 건가요?”

약간 흥분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유진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향했다. 욕실에서도 그의 눈길을 끌었던 그 곳, 다리가 모이는 곳의 옅고 짙은 검은색 털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렸다.

유진의 얼굴은 바늘구멍 하나 없는 검은 마스크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지만, 차민영은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담긴 강렬한 욕망마저도 아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다리를 벌렸다. 시선은 더욱 강렬해졌고, 차민영은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느꼈다.

사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섹스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남녀가 섹스 한번 한다고 특별한 신뢰 따위가 생긴다면, 이 세상에 그리도 수많은 원나잇이나 성매매 따위가 성립될 리가 없고, 강간 범죄 따위가 넘쳐날 리도 없다.

하지만 차민영은 유진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만만치 않게 일그러진 정신세계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남자라는 생물은 자신의 것이 된 여자에게 강렬한 소유욕을 느끼며,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바로 섹스에 대한 절대적 우월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섹스란 사랑의 결실이나, 즐거움을 위한 유희가 아니라 복종과 굴복의 증거이며, 신뢰와 헌신의 표현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그녀는 유진에게 욕망을 느끼는 순간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발밑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바지의 단추를 풀고, 자크를 내리고,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잡아 아래로 내렸다.

유진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약간 당황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서서히 끓어오르는 욕망이 그가 그녀의 행동을 말릴 이유를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유진은 오히려 바지와 속옷이 발목까지 내려가자 발로 바지와 팬티를 벗겨내서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그 명백한 신호에 차민영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유진의 자지를 붙잡았다.

유진의 그것은 발기하지 않아 축 늘어진 상태에서도 차민영의 한 손을 가득 채우고도 귀두가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가 평소 거의 보지 못했던 크기의 것이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입을 가득 벌리고 그 귀두를 입에 삼켰다.

차민영에게는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 의식이었고, 유진에게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섹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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