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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20화 (20/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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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찬란히 빛나서 더욱 어두운 도시에서 – 10

다정한 모습으로 끌어안고 잠들어 있던 두 사람 중에 먼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차민영이었다.

누군가 알면 사람의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할 만한 상황이었다.

어린 딸 보살피며 당일 업무를 준비를 위해 근 5년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야만 했던 그녀는 오전 6시가 되는 순간 칼같이 잠에서 깨어났다.

심지어 서울과 파리는 7시간의 시차가 있는데도 그랬다.

차민영은 여기를 자기 집으로 착각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감싸고 있는 팔과 단단한 눈앞의 단단한 남자 가슴을 보며 기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잠에서 깨서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는 사이에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어제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녀의 뇌리에서 생각나는 어제의 일중 가장 선명한 기억은 납치의 순간도, 치욕스럽던 강간 직전의 상황도, 두렵기 짝이 없던 죽음의 공포도 아닌 지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이 남자에게 유린당하며 내질렀던 음란하고 음탕한 외침들이었다.

남편이 죽은 지 이미 5년을 넘었고, 그런 생활을 그만둔 지도 그만큼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훈련받은 대로 습관적으로 내뱉은 그 말들을 떠올리자, 칼에라도 찔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혹시 직업 창녀나 음란하고 문란한 여자로 생각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사실 반쯤은 그런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때도 진짜는 아니었고, 지금은 전혀 아니니까.

차민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섹스 중에도 벗지 않았던 그 이상한 마스크를 자면서는 벗었는지 맨얼굴이 보였다.

수염 한 올 보이지 않는 깨끗한 피부와 날카로운 턱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잠든 그 얼굴은 그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의 것이라고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앳된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어려보이는 동안이라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일단 잠에서 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점에서 당장 유진과 어젯밤의 민망한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이어서 아침에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요의가 느껴졌고, 차민영은 유진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부끄러운 마음에 유진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원래 그녀의 루틴대로라면 가볍게 샤워를 진행했겠지만,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욕조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그리고 서서히 차오르는 따뜻한 물을 느끼며 우선 자기 몸을 살폈다.

우선 어제 옷을 벗었을 때 보았던 자잘한 상처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거친 돌바닥에 엎드려졌던 탓에 생겼던 무릎의 피부 상처도, 흑인 갱에게 뺨을 맞으면 생겼던 얼굴의 붓기도 멍 자국 하나 없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어젯밤 정신이 나가기 직전에 자기 자궁에 쏟아지다 못해 넘쳐흐를 정도로 퍼부어졌던 유진의 정액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뒤처리를 한 것이 아닌 이상 보통은 말라붙은 정액이 사타구니 가득 흔적을 남기고 있어야 정상인데, 그녀의 사타구니는 지금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정액의 흔적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어젯밤의 섹스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성기에 부은 부분 하나 없었고, 평소라면 자연스럽게 있을 그녀 본인의 분비물 흔적도 없었다.

혼절해서 쓰러져서 그대로 잠들어 버린 자신이 뒤처리한 것은 아니니, 그 남자가 잠든 자신을 깔끔하게 관리해줬다는 의미인데, 많이 생소한 느낌이었다. 최소한 그녀가 한국에서 만난 그 수많은 남자 중에는 그런 매너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프랑스 남자의 매너인가?’

한국어를 하고, 동양인 그중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얼굴이기는 해도 한국인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아마 동양 혈통의 프랑스인으로 여겨졌다.

어젯밤의 섹스도 정말 특별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는 정말 많은 남자와 정말 다양하고도 끔찍한 수많은 방법으로 섹스를 한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마약에 기구 거기에 재벌가 여자들도 찾는다는 프로 지골로를 상대로도 어젯밤 수준으로 좋았던 적은 없었다.

극한 상황에서 몸이 평소보다 훨씬 극적으로 반응했을 수도 있고, 너무 오랫동안 참아오기만 했던 욕망이 터져나온 것으로도 여길 수 있었지만, 차민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상대가 너무 좋은 것이었다. 왜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여자와의 섹스를 위해 아주 특별하게 훈련받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여자 스파이를 그런 목적으로 훈련 시키는 이야기를 다루는 실화 기반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남자라도 그런 사람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이제는 별로 무섭지 않아서 이상하지만, 유진은 명백하게 냉혹한 살인자였다.

칼과 총을 능숙하게 다루고, 사람을 죽이고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세련되고 담담하게 싸우던 모습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의 느낌이었다. 비밀을 가지고 있어서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합쳐지니 어쩐지 쉽게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직 스파이나, 전직 특수부대원 같은 종류의 사람이 틀림없어 보였다.

자면서 벗은 이유는 애매하지만, 섹스 중에도 끝까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것에서 그가 얼마나 비밀을 지키려 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고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삼을만한 것은 영화나 드라마, 소설 같은 것에 본 이야기뿐이었는데, 대부분 스파이를 도와주는 여자들의 결말은 좋지 않은 편이었다. 범죄 조직을 쫓는 스파이도 아니고, 권력자에 쫓기는 스파이라면 더욱 그랬다.

어제 그 남자가 굳이 자신의 폰을 뒤져서 한국 주소와 딸 아이의 정보 등을 확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남자 말대로 정말 지금이라도 경찰에 신고하고 빠져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차민영은 경험상 경찰을 믿지 않았다. 거기에 한국 경찰도 아니고 프랑스 경찰을 믿을 마음은 더욱 들지 않았다.

그럼 문제는 하나다.

‘이 남자는 나에게 뭘 더 원할까? 나를 놔주기는 할까?’

뭐든지, 원하는 뭐든지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말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눈앞에 있었다. 딸을 고아로 만들뻔했다. 그 대가라면 몸도 재산도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과 딸의 안전 그리고 시간이었다.

살기 위해 그에게 붙은 것인데 목숨이 위험하면 본말전도다. 딸이 위험해질 일이라면 그건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이 났다. 그리고 뭐든 해줄 수 있지만, 영원히 그럴수도 없다.

차민영이 파리에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제한이 있었다. 고작 4일 후에 예약되어 있는 귀국 비행기편은 좀 미룰수 있지만, 언제까지 딸인 소진이를 옆집에 맡겨둘 수는 없었다. 그들이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이고, 자신이 사고로 죽기라도 하면 소진이를 대신 맡아줄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적당히 섹스를 즐기고, 어느 정도의 돈으로 무마한 다음 그에게 정말 필요할지 모를 간단하지만 덜 위험한 일 몇 가지 해주고 헤어져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해도 일단 저 남자의 생각이 중요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차민영은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국 내린 결론은 교섭이었다.

유진이 뭘 요구할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자신이 들어 줄 수 있는 정도 내에서 조건을 조정해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은 거부해야했다.

그런 면에서 어젯밤의 섹스는 괜찮았다. 자신도 나쁘지 않은 정도를 넘어 꽤나 즐거웠고, 그 과정에서 그와 개인적인 관계도 형성했다. 유진. 진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상황은 그를 설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역시 교섭에 최고는 그거지.’

차민영은 옷을 갖춰 입고 방문을 나섰다.

그 과정에서 혹시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유진이 잠에서 깰 때를 대비해 메모도 하나 남겼다. 어젯밤의 인연도 있으니 그 정도면 그가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약간의 모험이지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섹스만으로는 유진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부족했다.

물론 지금 동원할 방법으로도 대등한 위치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의 경험상 지금 그녀가 동원하려는 수단은 인간이라면 거의 피해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상대가 이 방법에 대해 알고 있건 모르건 상관없이 거의 틀림없이 먹히는 방법이었다.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남편과 함께 회사를 만들어서 제법 규모 있게 키워낸 경영자인 그녀는, 자신이 오랜 경력과 경험으로 터득한, 교섭을 위한 최강의 방법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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