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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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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찬란히 빛나서 더욱 어두운 도시에서 – 11
잠들어 있던 유진의 의식을 깨운 것은 솔솔 풍겨온 고소한 빵 냄새였다.
깊고 깊으면서 어둡게 불타고 있는, 비릿한 물 냄새와 타오르는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미지의 심연 속에 잠겨 있던 유진의 의식은 그 순간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어두운 방에 전등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왔고, 잠들어 있던 동안 듣고 본 모든 것들은 아주 깨끗하게 기억 속에서 삭제되었다. 그것은 몹시도 무겁고 깊으며 심오한 진리와 세상의 비밀에 관한 것들이었지만, 유진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그런 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잊는 순간에도 아무 아쉬움도 없었다.
대신 눈을 뜬 그의 시선을 가득 채우고 기억과 본능을 지배한 것은 한 무더기의 따뜻하고, 고소해 보이는 빵들이었다.
정말 가끔 밖에 먹어본 적 없는, 너무도 유명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빵 바게트와 크루아상, 뺑 오 쇼콜라, 브리오슈 등이 테이블에 가득 쌓여 있었다.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기호품들보다 더 접하기 어려웠던 그 부드럽고 고소한 마약들이 유진의 시선을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유진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몇 개월 이상을 굶주리는 동안에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허기가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비정상적인 상황이지만 그걸 인식하지도 못했다. 눈에는 빵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몸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그곳으로 움직였다.
빵이 아니라 돌이라도 씹어 먹어야 할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허기와 마치 배속에서 손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절박감으로 유진은 빵을 움켜쥐고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럽기는 해도 사람 주먹 2개 크기는 되는 브리오슈를 통째로 입안에 욱여넣고 씹지도 않고 한 번에 통째로 삼켜 버렸다. 목구멍이 한도 이상 부풀어 오르며 상처까지 생겼지만, 그 상처가 순식간에 재생되는 동안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바삭한 식감의 뱅 오 쇼콜라와 크루아상은 같이 입 안에 넣고 씹었다.
딱딱한 겉면 때문에 입에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작게 떼어서 겉면이 안으로 가게 해서 먹어야 한다는 바게트도 통째로 들고 우걱거리면 씹어 먹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입이 엉망이 되었겠지만, 유진희 입과 혀는 끄떡도 없었다. 총과 칼도 막아내는 유진의 피부가 그런식으로 이용되었다.
아무 말 없이, 조금도 쉬지 않고, 광기 어린 눈과 손길로 유진은 그렇게 차민영이 실제로 다 먹으려는 용도로 보다는 화려함과 과시, 그리고 풍성해 보이는 효과를 위해 10인분 이상으로 잔뜩 사 온 빵들을 순식간에 모두 위장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마지막 바게트의 마지막을 씹어 삼킨 다음 혹시 남은 빵이 더 없는지 주변을 살피기까지 했고, 옆에서 건네주는 머랭과 쿠키, 초콜릿 같은 간식들을 다시 입으로 마구 쏟아 부어 넣었다.
그 예민하기 그지없는 미각조차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마구잡이로 욱여넣고 대충 씹은 후 삼켜 버렸다.
정신을 차린 것은 먹고 먹고 또 먹어서 더 이상 먹을 만한 고체는 하나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진 손잡이 달린 커다란 플라스틱병 속에 담긴 검은색 음료수를 원샷으로 통째로 마셔버린 다음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없이 그거 하나 먹은 것만으로도 배가 가득 차 버렸어야 정상일 2리터짜리 초코우유 하나를 통째로 목구멍 넘어서 넘겨버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유진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그러는 동안 차민영은 질리다 못해 공포에 빠져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먹어버린 엄청난 양도 매우 놀랍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먹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 절박함과 광기까지 보이는 먹을 것에 집착하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마치 이야기 속 아귀나, 공포 영화에서 본 좀비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다.
중간에 빵이 다 떨어지자 얼른 같이 준비해 두었던 쿠키와 간식들을 내밀거나, 그것까지 떨어지자 얼른 우유를 병 채로 얼른 건넨 것도 그런 이유였다. 마치 더 이상을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그녀 자신을 뜯어 먹으려 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느껴질 정도였다.
나름의 계산을 하고 사 온 음식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그리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효과를 발휘한 시간이었다.
‘먹을 것이 없었으면 혹시?’
아주 무섭고도 끔찍한 생각이 잠시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좀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실제 상황이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유진도 그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유진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민영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유진은 자신이 지금 식탁에 앉아 있다는 것도 그제야 인식했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표정에 유진은 자신이 조금 전까지 보인 모습을 뒤늦게나마 자각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유진은 차민영을 만난 후 처음으로 그렇게 마주친 시선을 먼저 피했다.
유진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연구소 놈들이 자신들을 언제나 실험체들을 상대로 관리가 필요한 짐승이라고 자신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정당화했다. 그래서 실험체들의 탈출과 반란에 있어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로자가 그들에게 가르쳤던 첫 번째 원칙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자기 자신이 고귀하고 존엄한 하나의 인격체이지 절대로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 것.
그래서 이성을 잃고 본능에 몸을 맡기고 짐승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는 것은 유진에게 우선적인 행동 원칙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금 전까지의 행동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모습이었다.
유진이 살짝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차민영은 여기서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침묵 속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기껏 수고롭게 아침부터 잔뜩 음식을 사다 나른 보람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뭐라도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주제가 애매했다.
원래는 맛있는 것 잔뜩 먹이고 음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했다. 초콜릿과 아이스크림 같은 단 음식을 좋아하던 어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의 경험상 원래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해야 할 때는 맛있는 것으로, 배를 꽉 채워주는 것은 최고의 협상전략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음식 때문에 멋쩍어하는 사람을 상대로 음식 이야기는 애매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며 유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주제는 그의 얼굴이었다.
“마스크를 벗은 것은 나를 조금은 믿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섹스 중에도 벗지 않은 마스크를 자는 중에 벗은 것은 그녀에게 나름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어 보이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번 기회에 확인하고 싶었다.
미리 생각대로 어젯밤의 섹스로 유진이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사적인 유대감이나 소유욕이 생겼다는 증거로 여겨졌기에, 대화를 시작하는 주제로 괜찮을 듯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유진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침묵했다.
다시 어색해진 분위기에 그녀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차민영의 당황한 정도는 유진이 당황한 정도에 비교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어?’
차민영이 말하기 전까지 유진은 ‘바벨의 기억’ 혹은 ‘바벨의 봉인’이라고 부르는 자기 머리를 감싸고 있는 봉인구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은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가장 간단하게만 생각해도 초능력을 이용한 투시안으로 보던 것을 갑자기 육안으로 보면서도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거기에 차민영의 언급으로 ‘바벨의 기억’에 대해 인지하는 순간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벌어졌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바벨의 기억’에 대한 여러 가지 비밀들과 숨겨진 기능 그리고 사용법들이 갑자기 원래 알고 있던 것처럼 뇌리에서 떠올랐다.
그 갑작스럽고 생소하지만 그런데도 매우 익숙한 그 정보들을 파악하는데 정신이 팔려 유진은 차민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것이다.
대답이 없는 그 모습에 약간 긴장했던 차민영은, 유진이 대답은 없어도 기분 나쁜 모습이나 거부감을 표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꽤 젊어 보이네요.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유진은 많은 생각 중이었지만, 이 질문에는 무심결에 대답했다.
“아마 19살?”
이 대답은 차민영을 움찔하게 했다.
유진이 어려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워낙 피부가 좋은, 동안이어서라고 생각했다. 말투, 태도, 행동 그리고 섹스에서 보여준 능숙함까지. 그 어디에도 유진이 어린 나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녀보다 젊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20대 후반, 어쩌면 자기보다도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19살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그리고 정말 정말 아슬아슬한 나이였다.
그 강렬한 숫자에 차민영은 잠시 사고가 마비되었다.
‘일단 법에는 안 걸리는 나이기는 하네.’
차민영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상호 동의하에 성인과의 섹스가 허용되는 법적 최소 연령이었다. 대한민국은 16살 이상, 프랑스는 15세 이상, 미국은 18세 이상. 다행히 19살이면 전부 피할 수 있는 나이이기는 했다. 현실도피였다. 어차피 두 사람의 관계가 정상적인 연애도 아니고, 둘 중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차민영에게 유진의 나이가 준 충격이 컸다.
서로서로 충격을 받은 탓에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여전히 표 안 나게 혼란을 겪고 있는 유진 대신, 이번에도 차민영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더 이상 말을 돌리지 못하고 직접적으로 문제를 언급했다.
“나를 구해준 대가로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고 했죠? 뭘 원하나요? 내가 뭘 해줘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유진도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
‘어라? 이제 뭘 해야 하지?’
그녀가 필요했던 이유 대부분은 ‘바벨의 기억’ 때문이었고, 이제 ‘바벨의 기억’은 유진 자신의 통제하에 들어왔다. 원래 그녀를 이용해서 하려고 했던 대부분의 일들은 이제 굳이 꼭 그녀가 필요하지 않았다.
‘바벨의 기억’은 누가봐도 수상해 보이는 물건이며, 유진을 추적하고 있을 UE에게 확실한 표적이 될 상징적 모습이었다. 그래서 유진은 정상적인 거래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외지고 인적 없는 곳에서 노숙하거나 빈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혹시나 돌아올 집주인을 걱정하면서 선잠을 자야 했고, 식료품과 의복 그 외에 자질구래 하게 필요한 것들은 좀도둑질로 구해야 했다. 그 모든 행위는 사소하지만 귀찮으며, 굴욕적이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진은 차민영이라는 대리인을 이용할 계획을 세워본 것이다. 필요한 것들은 차민영을 내세워 거래하고, 차민영이 그녀의 이름으로 구한 숙소에서 머물고, 필요한 것들은 그녀를 시켜서 구매하겠다고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계획은 ‘바벨의 기억’이 자신의 제어하에 들어온 이상 더 이상 필요 없었다.
UE가 자신조차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자기 얼굴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을지 부정적이다. 파악하더라도 그걸 바탕으로 추적하기도 어렵다. 숙소도 필요한 물건들도 현금으로 구매하면 그만이다.
유진은 더 이상 차민영이 필요 없었다.
한편 이번에도 유진이 대답 없이 입을 다물자 차민영은 서서히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섹스, 오늘 아침의 식사까지 나름 할 수 있는 준비를 다 거쳐서 대화를 시도했는데도 제대로 된 대답을 얻지 못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만큼 유진도 불안했다.
원하는 것이 있지만 쉽게 얻을 수 없기에, 신뢰할 수 없음에도 그녀를 원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가치는 별로 없었다. 그녀를 이용하면 여전히 여러 가지 편의를 얻을 수 있겠지만, 신뢰할 수 없는 상대를 협박으로 조정하면서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을 필요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그녀를 놓아주기 싫었다.
유진은 이런 자신의 마음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었고, 그것은 눈앞의 이 여자가 뭔가 문제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왜 이 여자를 구했지? 굳이 이 여자여야 했나? 한국인이라고?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의미지? 한국으로 돌아갈 것도 아닌데? 이 여자를 이용해 잠자리와 식사, 물자를 조달하겠다는 것도 억지 핑계다. 그따위는 지난 3년간 충분히 견뎌왔고, 앞으로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어. 바벨의 기억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고. 그리고’
‘바벨의 기억’에 대해서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진은 조금 무서워졌다.
‘왜 갑자기 봉인이 해제되고 나에게 제어권이 넘어왔지?’
어제와 오늘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유진은 눈앞의 차민영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필요에 따라 손에 넣은 쓸만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던 이 여자가 갑자기 너무 의심스러웠다. 유진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지 불안해졌다.
차민영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을 마주 보았다. 나름 머리 굴려서 몸도 쓰고, 돈도 썼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눈앞의 이 수상하고 위험하며 이제 어리다는 것까지 확인한 남자가 자신에게 뭘 원하는 것인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빛의 도시 그러나 그 빛만큼이나 깊게 어둠이 도사린 도시에서 만난 두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꺼림칙하고 위험하게 느껴지지만, 그런데도 상대를 떨쳐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 모르게 하지만 서로 똑같이.
#002 찬란히 빛나서 더욱 어두운 도시에서 – END